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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200만 원만 벌어도 괜찮아

by 흐름

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휴가를 낸다.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본다.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고 7개월 만에 첫 휴가다. 월, 화, 수 3일을 연차를 써 주말을 포함한 4박 5일 일정이다. 수요일 저녁 늦게 한국에 도착해 목요일 아침 출근해야 한다. 눈뜨면 반겨주던 푸른 바다도 지저귀는 새소리도 없다. 정리 못한 캐리어가 현관에 놓여있다. 미련 가득 남아 쭈그려 앉아있는 옛 애인처럼. 저녁까지 일정이 꽉 차있어 내일이나 짐 정리를 할 수 있을 텐데 젖은 빨래가 걱정이다. 애써 외면하고 서둘러 출근을 한다. 늘 정돈된 삶을 꿈꾸지만 서울은 자비 없이 바쁘다.

야자수는 왜 이렇게 푸르른 걸까. 잿빛 사무실에 들어서니 숨이 턱턱 막힌다. 같은 하늘 아래가 맞나. 이곳은 직선만 존재하는 것 같다. 오늘따라 상사의 말이 더욱 날카롭게 들린다. 사무치게 그만두고 싶다. 점심시간 겨우 숨을 쉰다. 눈물이 가득 찬 마음으로 짝꿍에게 푸념한다. 그는 내가 월급 때문에 못 그만두는 걸 안다. 그 돈 안 벌어도 된다고, 너무 힘들면 그만두라 언제나 말한다. 내가 200만 원만 벌어도 충분하단다. 200만 원은 연금저축, Irp, 보험, 이자, 생활비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이다. 그만큼만 벌어도 우리 생활은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게 없단다. 당장 그만둬도 200만 원 벌 자신은 있다. 다만 스스로 200만 원만 버는 내 꼴을 못 볼 뿐이다.


언제부턴가 나의 쓸모는 내가 번 돈이었다. 월 120만 원 버는 인턴으로 시작했다. 상사의 끊임없는 갈굼에도 나는 웃으며 버텼다. 내게도 기회가 왔고 10년이 지나니 또래보다 제법 버는 임 차장이 되었다. 성장하는 회사에서 성과를 내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매년 경기는 어려웠고 매 순간이 위기였지만 이겨내고 버텼다. 우리 팀은 유능했고 나는 능숙했다. 성과에 따라 매달 월급이 달라졌고 통장에 찍히는 돈은 늘어갔다. 오르는 월급만큼 자존감도 높아졌다. 그렇게 내 자존감은 월급 위에 쌓였다. 그 얄팍한 자존감은 모래 무덤에 꽂힌 깃발이란 걸 아는 데까지 오래가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팀이 사라졌고 난 권고사직을 당했다.


연봉을 올리진 못하고 유지해 이직한다. 비슷한 업무였지만 성과급이 아닌 기본급으로 매달 같은 월급을 주는 구조다. 실적이 매년 떨어지고 있기에 고정급으로 받아 오히려 다행이다. 쓰러진 깃발을 다시 모레더미로 일으켜 세운다. 누군가 한 움큼 쓸어가면 다시 쓰러질걸 안다. 그럼에도 모래더미를, 월급을 놓지 못한다. 그런 내게 200만 원만 벌어도 된다니. 나의 쓸모를 돈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니. 그럼 나의 쓸모는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뜨거운 태양 아래 드넓은 바다를 보며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휴가동안 나의 쓸모를 찾는다. 라이프가드로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본다. 무동력 요트 조종면허로 리조트 손님들 태워주며 바다를 누빈다. 동력 수상 레저기구 조종 면허로 섬까지 사람들 태워 나르며 파도를 가른다. 사진 잘 찍는 만능 프리다이버로 마음껏 물고기와 헤엄친다. 힘센 서버로 접시든 물통이든 척척 나른다. 상상만으로 행복한 쓸모다.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 너는 너대로 충분하다. 이런 말은 하나도 와닿지 않는다. 내 성격에 아무것도 안 할 수 없단 걸 알아서다. 반면 ‘200만 원만 벌어도 괜찮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 이 말을 떠올리면 묘한 위로가 된다. 모래더미에 깃발을 못 뺄 거면 작전 변경이다. 여기저기에 깃발을 심어보자. 라이프가드 자격증을 검색한다. 힘들지만 도전할만하다. 한평생 쓸모만 증명하는 게 인생이려나.



[요마카세] 월요일 : 퇴사할 수 있을까

작가 : 흐름

소개 : 모든 것이 되고파 나 조차도 못 된 10년 차 직장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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