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무거운 짐을 싸 들고 봉정사로 올라갔다.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다짐하고도 무슨 짐이 이리 많은지, 봉정사의 입구는 가도 가도 보이지 않았다.
“버리지 못하면 가는 길이 멀고도 힘들구나,” 느꼈다. 어쩌면 내가 가려는 길도 이런 느낌일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이고 가려는 것일까? 아등바등 공부해 얻어낸 나의 졸업장과 포근한 부모의 울타리는 내려놓기 힘든 ‘짐’ 이었다. 어쩌면 이 ‘짐’ 때문에 마음의 고통이 나에게 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했을 때 이런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멍청한 행위였다.
“머? 요가를 한다고? 간극이 너무 큰 거 아니야? 난 너가 내려 놓을까를 고민하는 데에는 박사를 하지 않고 일을 한다는 줄 알았지. 갑자기 요가강사가 되겠다고?” 요새 괴롭다고 찡찡거리며 머나 먼 중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 함께 박사를 하겠다고 다짐했던 친구인데 지금은 중국 환구시보에서 국제정치 분야 오피니언 글을 작성하는 친구다. 이 친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박사진학을 포기한 것일까? 지금은 어떤 심경으로 일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이 친구는 벌써 ‘직장인’ 이 되었다. 요새 리더십이 바뀌었는데 전 상사에게 충성을 해야 할지, 지금 상사의 입맛에 맞춰야 할지가 난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구하고자 하는 답변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보다 궁극적인, 집착과 노력의 차이였다. 그래서 안동의 봉정사로 떠났다.
박사 진학을 멈추는 것은 집착을 내려 놓는 것일까, 노력을 회피하는 것일까?
“스님, 탐진치를 버리지 못하면 괴롭다고 설명하셨는데, 탐진치란 무엇입니까?”
“탐, 탐욕이란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을 뜻하지. 끝없이 무언가에 대한 욕망으로 불타 있지. 집착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진은 증오와 분노를 의미하는데 인내할 줄 모르는 것을 의미해. 치는 어리석음이란 뜻인데 모든 것이 영원불변하다고 믿는 것을 의미하지.”
때마침 ‘집착’이라는 단어에 내 눈은 번쩍였다.
”집착이라고 말씀 주셨는데 집착이란 무엇인가요? 예를 들어, 제가 체중 유지를 위해서 샐러드를 먹어야 하는데, 맛있는 것(곱창, 삼겹살)도 먹고 싶습니다. 그럼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체중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체중 유지에 대한 노력을 회피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무슨 질문이더냐.”
갑자기 봉정사에 들어온 누군가 하는 뜬금없는 질문에 스님은 당황하시면서도 흥미를 보이시는 듯했다.
“스님께서는 왜 스님이 되셨습니까?”
“해탈하고자 함이지. 세간의 현혹으로부터 벗어나 몸과 마음을 닦고자 하지. 다 같이 머리를 깎았지만 모두 해탈을 위해 하는 행위는 달라. 나는 기도를 하지, 선수행을 하시는 스님도 계시고, 공부를 하시는 스님도 계셔.”
“그럼 스님께서 대웅전에서 기도를 하실 때 일반인이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까? 집중이 잘 되시나요? 힘들지 않으신가요?”
“힘들어도 집중을 해야지.”
“그럼 스님께서 하시는 기도는 시끄러운 소리에도 불구하고 기도에 집중하려는 노력인가요, 아니면 어떻게든 기도를 하려는 집착인가요?”
스님께서는 나의 이상한 질문에 의아함만 생기셨다.
“도대체 보살님은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저는 그저 불교철학에 관심이 많은 중생일 뿐입니다. 대학 때 불교철학에 관한 교양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과연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될 수 있을까 궁금하여 절에 들어왔습니다.”
나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진 않았다. 스님마저 “무슨 요가야! 그 정도로 했으면 박사를 해야지!” 라고 하실까봐 두려웠다. 그저 집착과 노력이 무엇인지 궁극적으로 파헤치고 싶었다. 그리고 선택은 나 스스로 하고 싶었다.
“스님들께서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 모든 스님이 해탈이나 수행에 진심이지 않아. 지금은 심사를 거쳐 절에 들어오지만 옛날만 해도 신용불량자가 되어 도망치듯 절에 들어오시는 분들도 많았어. 나는 스승이 계셨지, 어렸을 때부터 스님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지만 계속 피했어. 세간에 재미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절에 들어와?”
“스님께서 세간에 재미난 것들을 뿌리치고 절에 들어오신 것은 해탈을 향한 노력인가요?”
“노력이지.”
“해탈을 하셨나요?”
“노력 중이지.”
“해탈을 하기가 어려운데 끊임없이 해탈을 향해 노력을 하는 것은 해탈을 향한 집착이 아닌가요? 어디까지 집착이고 어디까지 노력인가요?”
어느 덧 해는 지고 절은 캄캄해졌다. 저녁 8시반, 절은 벌써 취침을 준비하여야 한다.
“내일 새벽기도 후에 종무소로 저를 찾아오세요.”
똑같은 말씀을 매일 반복하셨다.
“저 절에 남아 있을 돈이 없어요.. 템플스테이 너무 비싸요 스님.”
“마당 쓸고, 공양간 일 돕고, 종무소 일 돕고. 공짜로 지내려고 했니?”
그렇게 스님과의 차담은 쭉 이어졌다. 몇 날 며칠 동안 다양한 스님과 차담을 연결해 주시면서 나의 ‘집착과 노력의 차이는 무엇인가?’에 대한 여정에 큰 도움을 주셨다. 그래서 독자가 가장 궁금한 질문은 “그래서 그 차이는 뭔데?” 일 것이다. 집착과 노력의 차이는 무엇일까?
[요마카세] 수요일 : 집착과 노력사이
작가 : 요기니 다정
소개 : 국제 정치 배우다 요가 철학에 빠지게 된 사연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서라고 하는데, 내가 잡고 있는 것은 집착일까 노력일까 방황하며 지냈던 세월을 공개합니다. 누구나 힘들 수 있고, 누구나 고민할 수 있는 그 질문들을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