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방송작가는 프리랜서다. ‘프리랜서’, 이 네 글자가 주는 어감은 꽤나 멋들어져 보인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일하는 자유로운 삶이 그려지기 때문일까. 하지만 현실은 썩 자유롭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유에는 불안이라는 그림자가 항시 따라다닌다.
새해가 되거나, 하나의 프로그램을 끝마치고 공백기가 생기면 선배들이 으레 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용하다는 점집에 찾아가는 일이었다. 막내 작가 시절에는 대수롭지 않았는데 만나는 팀마다 신점 보는 선배들이 있음이 신기했다. 호기심에 물었다. 신점은 왜 보는 것이냐고. 선배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불안하니까’. 대답을 듣는 순간 숙명을 직감했다. 불안함과 이별할 수 없는 숙명을.
한 번은 방송일까지 6주 앞둔 프로그램에 급히 투입된 적이 있다. 기획 의도만 정해져 있을 뿐 출연진 섭외, 자료조사, 해외 현지 코디 섭외, 해외 로컬 섭외, 촬영 스케줄 정리, 구성안 작성, 즉 A부터 Z까지 모든 게 리얼타임으로 급박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24시간이 모자랐다. 그러나 또 언제나처럼 해내고 있었다. 해외 촬영까지 무사히 끝내고 한 번의 스튜디오 촬영만 마치면 2주 뒤 기약된 방송 예정일이었다. 끝이 보이는 어느 날 아침, 메인 작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촬영 준비를 그만하라는 통보를 들고서. 협찬사가 갑자기 협찬을 못하겠다는 이유로 방송 제작이 중단된 것이다. 길진 않았지만 4주간 밤낮 가리지 않고 불사 지른 우리의 피, 땀, 눈물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고, 프리랜서 작가는 하루아침에 갈 곳 없는 백수가 되었다. 이게 프리랜서 작가의 현실이다.
뭐 이런 일이 그렇게 잦겠느냐고?! 잦다. 잦고 말고. 정규 편성받아 방송되던 프로그램이 하루아침에 방송사 내부 사정으로 제작이 중단되었고, 명확한 이유도 모른 채 갑작스러운 작가 회식이 작별인사가 됐으며, 출연진 이슈로 종영선고를 받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이쯤 되니 타고난 운명 같은 게 있다면 그 운명을 원망하고 싶었고, 달아나고 싶었다. 때마다 용한 점집을 찾는 선배들의 마음을 일백 번 이해할 수 있었다. 모양은 달라도 종영선고로 귀결되는 갑작스러운 결말은 쉽사리 적응되지 않았고, 딸려와 충돌하는 불안함의 덩어리는 결코 작지 않았으니까. 덩어리가 남긴 움푹 파인 그 자리가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멘털 회복 시간도 필요하다.
불안함에 이리저리 치이던 중 디자인 전문 출판사의 기획자로 입사했다. 불안함을 안고 사는 프리랜서 삶에서 도망치기에 성공했고 안정이 보장된 정규직의 삶이 펼쳐졌다. 그런데 그 안정감은 3개월 짜리였다. 팀원들이 (공모해서) 자회사를 차렸고, 당장 다음 주에 퇴사를 한다는 것이다. 할 말을 잃은 채 눈만 뻐끔뻐끔 멀뚱히 뜨고 있었다. 나는?이라고 묻는 속마음을 읽은 걸까. 나는 알아서 하란다. 퇴사해도 좋고 남아 있으면 어떤 일이든 하게 될 거라고. 이런 쓰레기들! 말이야 방귀야! 지금 그게 할 말이야?!! 너무도 화가 났다. 결국 나는 3개월 만에 퇴사했고, 다시 불안함의 행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방송의 세계로.
인생이란… 참 맵고 쓰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천 번 일어서면 천 번 넘어지는 비슷하게 반복되는 삶에 지칠 대로 지쳤고 무기력의 늪에 몸을 맡겨 빠져 들어갔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빛을 내지 못하던 날들이 또 다른 페이지의 도약이 되어주었다.
프리랜서라서 불안한 건 맞지만, 프리랜서만 불안한 것은 아님을, 안전해 보이는 곳에도 불안이 도사리고 있음을, 결국 어디에도 보장된 안전지대는 없다는 깨달음이 날 붙잡았다. 변화무쌍한 이 세상을 겨우겨우 떠받치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기둥 하나에 기대어 안정감을 찾으려 했다니! 어리석었다.
도망쳐 떠났던, 그러나 떠밀리다시피 돌아온 방송세계에서 위로를 발견했다. 나보다 앞서 이 길을 먼저 걸어가신 선배들이었다. 당시 나는 5년 차였으니 짧게는 7-8년, 전문가의 경지라고 불리는 10년, 그리고 길게는 20년 이상 된 선배들. 내가 겪었던 불안함의 시간을 동일하게 겪으셨을, 때론 더한 격동의 시간과 시절을 지나왔을 선배들. 그분들의 존재는 마치 불안함이 인생을 흔들 수는 있을지라도 무너뜨리진 않을 거라고, 불안함의 공터는 버틸만하다고, 그러니 나도 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대변해 주고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앞으로 또 얼마나 흔들리며 넘어질까. 두렵기도 하지만 담담하기도 하다. 흔들리면 견뎌내면 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니까. 천 번 넘어지면 천 번 일어나면 된다
[요마카세] 화요일 : 읽히지 않은 인생
작가 : 세렌디피티
소개 : 긴 시간을 살진 않았지만 깨달음 중 하나는 야심찬 계획은 기꺼이 어그러지며 삶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통제되지 않는 인생의 파편들은 마음에 흉터를 내기도 하고 의욕으로 곧게 서 있는 두 다리를 꿇어앉히게도 합니다 마음의 흉터는, 꿇어앉은 다리는 ‘인연, 우연, 기회’ 라는 전혀 다른 모양과 색깔의 가능성을 만나 아물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 걸어갈 힘을 얻으며 인생이란 팔레트에 스스로 낼 수 없는 다채로운 색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만났던 그리고 여전히 만나고 있는 ‘인연, 우연, 기회’ 를 들려드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