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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흑역사를 축하하며

by 흐름

과거의 영광에 머물지 말자. 흐르고 또 흘러야 한다. 강박처럼 하는 생각이다. 졸업은 안 하고 신입생들과 반지하 술집에서 매일 같이 소주를 먹으며 ‘왕년의 내가~’를 부르짖었던 그 시절 고학번 선배가 되긴 싫다. 인턴부터 차장이 될 때까지 10년 동안 다닌 첫 회사는 나의 영광이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다니고 싶었다. 차일피일 미뤄진 회사 합병이 된 다음 날 금요일 오후 4시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사실상 예견된 결과였지만 나는 아니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사직서에 5일 안에 사인하지 않으면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거라는 협박(?)과 함께 노트북과 출입증을 반납하라는 내용이었다. 10년이 5분 만에 치워지다니. 월요일이 되자마자 같이 정리된(?) 이사님과 함께 회사에 노트북을 반납하고 건물 로비 1층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됐지만 난 여전히 임 차장이었다. 이제는 쓸모 없어진 명함을 차마 버리지 못한다. 회사 로고가 박힌 노트북 가방이며 물컵도 물끄러미 날 쳐다보는 것 같다. 이제는 네 것이 아니지 않나며. 괜히 찔리는 마음에 안 보이는 곳에 처박아 둔다. 아 이렇게 과거에 살게 되는구나. 이력서를 쓰려 노트북을 켠다. 온통 과거의 일뿐이다. 미래를 보장받으려면 과거를 증명해야 했다. 과거의 내가 없으면 지금의 나도 없는 거네. 이따금 당연하지만 새롭게 와닿는 것이 있다.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준 거니 과거는 곧 미래가 아닐까. 과거가 미래라는 생각이 드니 과거의 내가 소중해진다. 과거에 머무는 게 고이는 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아주 오래전 일어났지만 여전히 나를 떠나지 않는 사건을 나열해 본다. 과거가 미래고 미래가 과거라니. 과거를 더 파헤쳐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곤 아주 충격적이었거나 쪽팔렸거나 잊어버리고 싶은 일뿐이었다. 흑역사가 내 미래면 안될 것 같은 생각에 번뜩인다. 알맞은 미래로 갈 수 있도록 자리를 찾아줘야겠다. 내 역사야 내가 다시 쓰면 그만이다. 기억은 언제나 왜곡되고 미화되기 마련이니까. 그게 무슨 일이든 일어난 일이 제일 좋은 일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 정신머리면 삶을 포기하는 일만은 면할 수 있었으니까.


매주 글을 쓰자고 해놓곤 언제나 고민은 뭘 써야 하나다. 도대체 어디서 소재를 얻는 거야? 어디서나! 글 소재 찾는 법을 검색하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다. 무엇이든 소재가 될 수 있지 물론 내 과거도. 과거를 현재와 미래와 연결하면 어떨까. 가령 흑역사의 미래라던가 나의 흑역사 연대기라던가. 추접한 내 과거의 행적을 쓸 수나 있을까. 벌써부터 망설여진다. 예전에 들은 에세이 수업에서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꼭 사실대로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글의 맛을 살리기 위해서 때론 약간의 비틀기가 필요해요. 우린 그걸 각색이라 부르죠.


시간을 각색한다 생각하고 쓰자. 글로 새롭게 태어날 과거를 축하하자.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지만 시간 속 나는 같은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흐르고 또 흐른다.


정리해고 날 반납한 사원증과 노트북





[요마카세] 월요일 : 흑역사 모음집

작가 : 흐름

소개 : 현재에 살자 집착하는 사람. 문득 지금의 나를 만든건 과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꽂힌다. 과거의 내가 미래를 만든다면, 과거는 미래요 미래는 과거가 아닌가. 흑역사가 미래가 될 순 없어 써내려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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