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나가 봐”. 너와 나의 대화는 끝났으니 네 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이었을 텐데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와 발걸음이 향한 곳은 건물 밖이었다. 저녁 9시 30분쯤이었나. 적막과 어둠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웃음기 없는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속 안에 있는 수심을 입 밖의 연기로 내뱉는 몇몇 사람들 뿐이다.
“제발 그만둬 그냥”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10번 넘게 들은 말이다. 그만큼 마음이 무너졌고 무릎이 꿇렸다. 어떻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정신일 수 없었다. 이대로 집으로 가야 하나? 짐은 어떡하지? 지금 이대로 집에 가고 내일 아침 일찍 짐 정리하러 와야 하나? 그래도, 이렇게 그만두는 건 아니지 않을까? 근데 그만 두라잖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답을 찾지 못한 채 그대로 그만두거나 집에 갈 배짱도 없어서 회사 주변만 뱅뱅 맴돈다. 톡, 톡, 톡,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펼쳐본다. 빗방울이다. 제기랄. 비까지 내리는 거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톡. 톡. 톡. 가슴에 콱 맺힌 응어리에 구멍을 내어 숨통을 터주려는 듯, 한방울씩 조용히 내리던 비는 좀처럼 괜찮아질 줄을 몰라 결국은 울고 싶은 내 마음을 대신해 울어주듯 점점 굵어지더니 이내 쏟아지기 시작한다. 좀처럼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후배 동생이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온다. 그 친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울음이 왈칵하고 쏟아질 것 같아 차마 받질 못한다. 카톡이 울린다. ‘언니 괜찮아?’라는 걱정 가득 섞인 물음에도 바로 답장 하지 못한다. 괜찮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서, 안 괜찮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배회했을까. 마음을 정했고, 한 시간의 고민이 무색하리 만큼 결론도 빨리 지어졌다. 이 에피소드의 결말은 ‘그렇게 그만뒀다’는 호기로움도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다시 시작되는 같은 반전 서사도 아니다. 내게 남은 결말은 마음의 멍 뿐이었다. 몇 개월에 걸쳐 휘두른 언어와 감정 폭도에 맞아 좀처럼 쉽게 아물지 않는 멍 투성이들. 남은 건 그것 뿐이었다.
멘탈 회복이 필요했다. 멍 투성이는 주변 부위까지 통증을 일으켰다. 다시금 방송 일을 할 수 있을까 덜컥 겁이 났고 과거의 좋은 기억까지 흑화 시켜, 일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하노라면 헛구역질까지 나오고 숨이 턱턱 막혔다. 여태껏 만난 놈들 중 가장 악질의 멍 투성이였다.
그후로 수개월 뒤,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됐다. 업계 난황 속에서 구직이 정말 힘든 시기이다.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사실인데. 20년 차 선배 작가님, 내로라 하는 네이밍 프로그램 이력을 보유한 작가님들 사이에서 내가 최종합격 됐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시간이 좀 지나 그런 분들 중에 왜 저를 뽑았냐 물어봤더니. ‘거기서 버텼잖아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장 끔찍했던 기억 속의 그 때가, 두 번 다시는 반복해 겪고 싶지 않은 그 시절이 ‘기회’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저 버텼을 뿐인데.. 이게 전화위복이라는 걸까?
같이 일하는 작가님과 피디님은 나보다 연차가 한참 위인 업계 선배이다. 야근을 하며 라뗀 말이야~ 라는 주제와 어울리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만난 최고의 또라이를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경험했던 건 새발의 피 수준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은 담담하게 이야기 해도 당시엔 마음에 진물을 내고도 남을 아픔이, 딱지가 앉아 떼어낸 그 자리에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는 그 이야기가 참으로 위안이 되었다.
애정 하는 드라마 <또 오해영>에 이런 대사가 있다.
“든든해요. 어딘가 나랑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거. 나는 내가 못나서 그런 일 당한 줄 알았는데. 잘난 사람들도 나처럼 결혼 전에 차이는구나. 미안해요. 그쪽 상처가 내 위로라고 해서. 별 일 아니라는 말보다, 괜찮을 거란 말보다 나랑 똑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게 백 배 천 배 위로가 된다”
나를 무너뜨리는 것도 사람이지만, 결국 위로가 되는 것도 사람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내가 겪은 아픔도, 마음에 남은 멍자국도 다른 사람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부디 내 아픔이 누군가의 아픔보다 조금 더 깊고 넓고 커서 그 사람의 상처가 작아 보일 수 있을까?
“실컷 울어, 이리 아프지 않고서야 다른 무수한 이들의 아픔을 어찌 알겠느냐?” 라는 드라마의 대사처럼 실컷 아프고, 실컷 울었던 그 시간들이 다른 이들의 위로로 쓸모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상처가 뾰족한 돌이 되어 또다시 누군가에게 상처 내는 칼이 되지 않고 상처 입은 사람을 감싸주고 안아줄 수 있는 방패가 되어 주길, 그렇게 쓸모 있는 상처가 되었으면 좋겠다.
[요마카세] 화요일: 절찬리 기록중
작가명: 세렌디피티
소개: 쓰고자 하는 마음에 사로 잡히다가, 이제는 쓰고자 하는 마음을 붙잡아 놓질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버렸습니다. 무엇이든, 어찌됐든 계속해서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쓰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