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좋은 전시는 질문을 던진다
저번 편에서 인생 전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때의 나에게 가장 동시대적인’ 전시가 가장 기억에 남기 마련인 것 같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 그 내용을 쓸 때는 전시 얘기 잔뜩 하느라 좀 신난 상태였는데, 나중에 읽어보니 ‘동시대성’이나 동시대 미술이 집중하는 여러 의제에 대해서 설명이 빈약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시를 많이 보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 내용들이긴 하지만, 전시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다면 어떤 돌다리를 딛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잘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편에서는 동시대 미술이 가장 집중하고 있는 주요 의제 몇 가지와 그 의제가 던지는 질문들을 네 가지 정도로 추려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한 전시들을 함께 다룰 것이다.
클릭 한 번, 터치 한 번이면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도 한 번에 연결되는 초연결 사회에 익숙했던 우리의 ‘보통’이 전례 없는 팬데믹을 수 년간 겪으며 완전히 무너졌다. 연결이 기본 옵션이던 우리는 매일 스크린 혹은 빈 벽을 마주해야만 했으며, 경험해보지 못한 단절로 인한 불안과 근원적인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포스트 팬데믹 시대는 역설적으로, 아니, 당연하게도,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논의는 더 확장되어, 나와 타인이 연결됨으로써 구성되는 사회에서 우리가 다시금 찾아 집중해야 하는 여러 가능성에 집중하는 움직임으로도 이어졌다.
관련 전시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2024)>, MMCA서울
사물의 물성을 탐구하는 것에서 시작해 무엇이 생물이고 비생물인지, 나아가 인간을 다른 생물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는 전시. 주제를 확장해가며 논의를 발전시키는 방식의 기획이 인상깊었다.
<소원을 말해봐(2024)>,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팬데믹 이후, 단절과 혼란을 겪은 사람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이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다는 근원적인 불안감을 안고 살게 되었다. 팬데믹 기간동안 민간신앙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 것도 그 영향이 클 것이다. 이 전시는 우리가 다시금 ‘우리’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가 가졌던 여러 신앙에 집중하는 전시이다. 생경한 것들이 우리가 공유한 뿌리를 통해 위안을 주는 경험은, 우리가 다시금 시간을 거슬러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듯 했다.
<재난과 치유(2021)>, MMCA서울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2021)>, 아르코미술관
두 전시 모두 2021년, 그러니까 한참 팬데믹 상황일 때 열린 전시였던 만큼 지금도 어딘가 생생한 단절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일상은 이윽고 여러 시간관이 공존하거나 물질과 비물질이 혼재하는 듯한 상황을 만들며 우리의 보편적인 인식을 본질적으로 흔드는 혼란을 야기했다. 유독 팬데믹 기간동안 관계와 더불어 물성이나 매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들렸던 것도 이러한 경험에서 온 혼란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현대미술 중에서도 미디어 아트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거의 벤야민 정도로 아이돌같은 존재인 마셜 맥루언(매클루언)이 ‘미디어(매체)가 메시지다’라며, 미디어가 전달하는 속알맹이가 아닌 미디어 그 자체가 우리에게 메시지로 작용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맥루언에 따르면 인간은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신체 혹은 감각을 확장시키는데, 이때 사용하는 수단이 미디어이다. 물리적인 거리와 상관 없이 인간은 시공간적으로 타인과 분리될 수밖에 없으므로 인간은 매체를 통해 타인과 서로 접속되고, 이러한 접속은 기술을 활용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기술은 마치 타인과 더 깊이, 친밀하게, 은밀하게 연결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만 같다. 만약 정말 맥루언이 말했듯 미디어가 메시지 그 자체라면 우리가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 현실을 지각하는 방식, 타인을 인지하는 방식 등은 모두 매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기대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이 주장이 맞아떨어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가끔씩 일상을 살면서 ‘이거 인스타 스토리에 올려서 자랑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보며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나는 벌써, 인스타그램의 스토리 기능이 있기 전에는 어떤 방식으로 사진을 찍고 일부 가까운 다수에게 나의 일상을 공유했는지를 잊고 새로운 매체에 내 사고 과정을 맡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체는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사고를 뒤흔든다. 이러한 과정은 점점 가속화되고 그 정도도 강해지고 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고가 너무 지나치게 빠르고 유연하게 적응하며 변화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에 공포 혹은 즐거움을 느낄 필요가 있는지를 질문하며 우리의 현재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전시들을 소개한다.
<합성열병(2025)>, 스페이스 씨
<영혼은 없고 빈 껍데기만(2024)>,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디지털 데이터로만 존재하는 인물 ‘안리’와 관련한 작품이 해당 주제를 가장 잘 다룬다. 기술적인 복제가 가능한 시대, 무한히 복제하고 생성시킬 수 있는 디지털 데이터 인간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란 있을 수 있을까? ‘안리’의 데이터를 완전히 삭제하더라도, 누군가의 개인 기기에 그 인물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면, 애초부터 디지털 데이터 인물이었던 ‘안리’는 복제된 채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2024)>, 일민미술관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던 시간 혹은 공간에 대해 매체를 통해 알 수 있으며 쉽게 ‘향수’를 느낀다. 본래 ‘향수’란 과거의 기억에 대한 감정이었으나, 디지털 매체가 등장하며 우리는 손쉽게 ‘구현된 과거’에 대한 ‘향수’를 학습하게 된다. 2000년대생 시청자가 1988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시청하며 막연한 ‘향수’를 느끼고, 1970~80년대 일본 시티팝을 즐겨 듣는 것처럼 말이다. ‘포에버리즘’이라 정의된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다루는 전시이다.
<일어나 2024년이야!(2024)>, 백남준아트센터
<게임사회(2023)>, MMCA서울
<문경원&전준호: 서울 웨더 스테이션(2022)>, 아트선재
인간은 기술과 함께 환경에 대해 어디까지 개입하고 관여할 수 있을까? 인간이 관여해 변화가 일어난 자연을, 온전히 ‘자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자연’의 정의는 무엇이며, 기술과 살아가는 인간은 어디까지 ‘자연적’일 수 있을까?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의 바다(2022)>, MMCA 서울
내 손 안 작은 화면을 통해 접한 세계는 얼마나 불안정하고 부정확하며 편협한가.
사실 이 주제는 오늘 말하는 모든 주제를 내포한다고도 볼 수 있을 만큼 가장 큰 주제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신유물론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아마 보자마자 뒤로가기를 눌러 나가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여러 주제를 다뤄본 다음 이 주제를 던져 보았다.
신유물론은 말하자면 가장 따끈따끈한 철학 이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슬하에서 자라난 신유물론은 다양한 간학문적 시도를 받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 장성한 청년이 되었다. 이미 몇백 살쯤 된 노인보다 훨씬 젊은데, 수많은 주제를 아주 많은 언어를 쉬이 넘나들며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 경계라는 덫에 걸린 수많은 모호한 논제들을 덫에서 빼내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란 몹시도 매력적이지 않겠는가.
신유물론은 유물론적 사고의 한계를 탈피하려는 시도이다. 다시 말해, 물질에 기반을 두고는 있지만 ‘생명력 없이 정지된 물질’에서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물질과 의미를 정의한다.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의미’를 품은 ‘기호’로서 생명력을 얻고 끊임없이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넘나들 수 있다는 가정을 긍정하면, 마냥 단순하게 맞아 떨어지지만은 않는 현실의 수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신유물론의 이러한 관점은 포스트휴머니즘 논의로까지 확장된다. 인간 너머의 인간을 상상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에 대해 닫힌 정의를 열고 인간이라는 물질이 내포한 신체, 자연, 문화, 사회 등의 개념에 집중해 이해의 폭을 넓히는 시도이다. 최근의 포스트휴머니즘 논의는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학습하고 인간의 ‘우월종적인’ 행위를 완전히 뛰어넘어버리는 새로운 존재인 AI가 등장하면서 더욱 널리 퍼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도덕적인 인간성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인류는 눈부신 기술 발전으로 인해 더 물리적이고 실질적인 세계에서 인간의 조건을 다시금 논의해야 하는 때를 너무 빨리 맞이해 버린 셈이니 말이다.
‘이성’마저 기계에 빼앗긴 인간에게 무엇이 남는지, 어떤 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지에 대한 질문은 기술과 함께 살아가며 수없이 인간의 근본 혹은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공격당할 우리에게 언제나 유효하다.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2024)>, MMCA서울
<아니카 이: 또다른 진화가 있다, 그러나 이에는(2024)>, 리움
생물의 조건을 완전히 기계장치가 재현 가능하다고 할 때, 그 기계장치는 생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언두 플래닛(2024)>, 아트선재
<미카 로텐버그:NoNoseKnows(2024)>, 현대카드 스토리지
사물의 경계를 깨고 물성을 달리하며 자유롭게 현실의 모든 가능성을 오가는 상상이 유쾌하고 즐거웠다.
<이안 쳉: 세계건설(2022)>, 리움
기계장치를 통해 나의 ‘최선의 인생’을 알 수 있다고 할 때, 나의 인생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주체는 아마 대체로 그 기계장치일 것이다. 그러면 그 인생은 정말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기계장치가 판단한 결과가 쌓여 만들어진 ‘나’ 역시 진짜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당연하게 수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삶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잃는다는 뜻이다. 보통 사회에서 ‘소수자’라고 불리는 존재가 가진 작은 목소리를 더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확성기를 가져다 대 주는 전시가 점점 자주 보이는 것 같다.
소수자성이란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한국이라는 배경에서만 보면 나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대학을 졸업한 화이트칼라로,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배경이 제거되면, 나는 아시아 출신 여성이 되며 그에 요구되는 스테레오타입에 복종하기를 매우 자주 요구받을 것이다. 더 복잡한 예를 들어 보겠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부유한 여성이, 신체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성소수자라면, 그녀는 ‘어느 정도’ 소수자라고 할 수 있는가? 만약 그가 아시아 국가 출신 디아스포라의 자녀인 이민 2세대라는 조건을 추가한다면, 모두의 이견 없이 ‘소수자’가 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사람을 채썰듯 수많은 기준으로 나누자면 나눌 수 있다. 모두가 저마다의 약함과 강함을 안고 살아가는 만큼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약함과 강함이 너무 쉽게 사회로 확장되는 일만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자로 잴 수 없는 인간 사회에서의 논리로 인해 우리는 가끔 경계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흐름에 따라 경계 밖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가장 약한 존재는 헐벗은 얼굴로 다가온다.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은 그 나약한 타인을 맞이하고 돌볼 의무가 있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그 무엇도 안전할 수 있는 세상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그 상상을 현실로 끌어올 의무가 있는 것이다.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2025)>, MMCA 서울
접근성 논의에서 시작해 타인과의 공존과 연결까지 확장해 다룬다. 장애 있는 신체가 약하지 않다면 ‘보편적’이지 않은 신체에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2025)>,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Ua a‘o ‘ia ‘o ia e ia 우아 아오 이아 오 이아 에 이아>, 서울시립미술관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2024)>, MMCA서울
서구 중심의 사회에서 ‘변방’으로 취급당했던 아시아, 그리고 그 변방의 땅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신체에 집중하고 있다. 너무 쉽게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도구화되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논의는 여성의 참정권과 사회 진출이 상식이 된 지금도 아직 너무나 부족하다고 느낀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2024)>,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사실 여기 적은 주제는 일부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네 갈래의 키워드와 질문은, 미술관을 떠도는 수많은 질문들 중 가장 몸집이 크고 자주 보이는 것들만 골라낸 것이다. 그리고 이 각각의 키워드가 다루는 주제는 상당히 깊고 방대하다. 너무 뭉뚱그려 쉽게 뚝딱 말해버린 것만 같아 죄책감이 들 정도이다. 하나만 잡아도 이야기할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깊게 파고 들어가면 저 깊은 심연에서 너무나 많은 철학자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나 역시도 전시를 보러 다니다가 별안간 오래 미루어 온 철학 공부를 어영부영 최근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현대미술의 의제 중 가장 관심이 가는 것부터 직접 더 많이 알아가는 것 역시 전시를 일상으로 확장시키는 방법 중 하나인 만큼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하지만 우리는 평론가도 미학자도 아니다. 그저 아주 조금씩, 딱 한 입씩 맛본 그 지식을 안고 미술관에 들어가도 충분하다. 전시를 보다 보면 더 알고 싶어지는 주제들이 분명 생길 것이다. 혹은 기대하지 못한 순간에 나의 심장을 꿰뚫는 질문을 던지는 전시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공부는 그 때 해도 늦지 않다. 다만 이 글이 마음에 얕게 자리하다가, 우연히 좋은 전시를 만날 당신이 더 좋은 질문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종로구 평창동), 7월 27일까지
종로구 평창동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에서 진행되는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이하 ‘<우리는 끊임없이>’) 전시를 추천합니다.
전시 제목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경구에 착안한 것으로, 기록이 항구적인 것이 아닌 그것을 읽고 감각하면서 지금의 인식과 만나는 현재진행형의 과정임을 강조합니다.
이 전시는 사적 기록인 ‘매뉴스크립트’의 가치를 조명합니다. 매뉴스크립트란 제도권이나 주류 매체에서 다루지 않는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공적 기록이 포착하지 못한 사적인 기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자면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직접 경험한 수감자의 편지나 석방 운동을 벌인 어머니들이 희망을 기원하며 짠 숄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오키나와에서 살며 오랜 시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담배곽 등도 매뉴스크립트의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서울에 퀴어 문화가 자리잡아가는 과정을 이태원에 오래 살며 지켜본 누군가의 구술 기록 역시 매뉴스크립트의 일종입니다.
뿐만 아니라, ‘what if’에 대해서도 조명합니다. ‘만약 ~라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은 현실을 기반으로 새로운 서사를 구축하여 현실을 더 넓은 가능성의 장으로 확장시킵니다. 대안적인 현실을 상상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현실의 한계와 개선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말이죠.
이 전시는 조명받지 못했던 목소리를 따라가며 목소리의 소리를 키우는 전시입니다.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저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역사는 승리했던 자들의 후예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야만적일 수밖에 없음을 역설했습니다. 그렇기에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 즉 그것이 큰 흐름에서 비켜나는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무명의 존재에게 관심을 갖고 역사의 야만성을 덜어내는 노력이 우리 모두의 과제임을 강조합니다. 이 전시는 현재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잊고 있으며 어떤 이야기 위에 서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며, 우리가 전승받은 이 역사가 승리했던 자만을 대변하지 않도록 다시금 솔질하는 전시입니다.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는 말그대로 ‘아카이브’에 집중한 연구를 하고 관련된 전시를 개최하는 곳입니다. 다른 곳보다 훨씬 더 큰 시간대를 다루는 전시를 하거나, 보다 여러 주제나 작품들을 횡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의 기획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곳과는 조금 다른 톤의 전시를 볼 수 있습니다. 훨씬 더 ‘연구’의 목적이 강한 전시라는 인상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만큼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의 연결을 경험하게 되어, 언제나 좋은 전시를 잘 마련해 둔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경복궁역에서 굽이굽이 버스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시원하게 뚫린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멋진 도서관에 앉아 있는 경험은 그 어떤 곳보다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인 것 같습니다. 날씨 좋은 주말, 평창동으로 나들이를 떠나 보시는 건 어떨까요. 전시와 공간 모두 강력 추천합니다.
[요마카세] 토요일 : 전시 왜 봐?
작가 : GARDEN
소개 : 주말마다(사실 평일에도..) 전시를 보러 다니는 직장인의 전시 보는 이야기입니다. ‘전시 왜 봐?’ 라는 질문에 짧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상상해도, 무엇이 펼쳐져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 미술관에서 보낸 시간들을 글로 풀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