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과 함께 살아가기(2) 굿즈 편
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이번 편 역시 저번 편에 이어, 미술관 혹은 관련 각종 문화 행사에서 업어 와 잘 쓰고 있는 이것저것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이다. 업어 왔다고 순화하여 표현했지만 누군가가 보기에는 뭐 저런 걸 사 오나 싶을 만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물건이란 것은 이름을 붙이고 쓰임을 부여하면 쓸모 있는 것이 되기 마련이지 않은가? 아무튼 여기서 소개하는 것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몹시도 유용하고 쓸모 있으며 아름답고 특별하기까지 한 것들이니 자랑을 좀 해 보도록 하겠다.
저번 편에서는 주로 책을 비롯한 여러 종이에 인쇄되는 인쇄물을 위주로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물건이나 착용할 수 있는 무언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보려 한다. 그러니까, 전시장에서 뚝 떼왔지만, 이제는 전시보다는 내 일상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제니 홀저는 텍스트를 재료로 다양한 설치 미술을 하는 작가이다. <트루이즘>이라는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경구’라고 번역되는데, 사회의 여러 현안들에 대해 의견을 내는 방식의 여러 문장을 나열한 작품이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지 국현미 커미션으로 작업한 제니 홀저의 작품이 <당신을 위하여>라는 전시로 엮여 이곳저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 티셔츠는 그 전시의 굿즈이다.
2019년도에 사서 아직까지도 입는다. 정말 너무 많이 입었다. 내 친구들은 내가 이 티셔츠를 입은 모습을 적어도 한 번 이상 봤을 것이다. 당연히 옷은 딱 봐도 낡은 옷처럼 보인다. 등판의 전사 부분이 너덜너덜해졌고, 목이 다 늘어나 우레탄줄을 넣어 수선도 했다. 얼룩이 져 면봉에 락스 푼 물을 묻혀 지워서 가까이서 보면 얼룩덜룩한 부분도 있다. 묘하게 시간이 묻어 누래진 것처럼 보이는 컬러가 되어 이제 새하얀 바지와 함께 입으면 약간 머쓱하고 어색해진다. 하지만 그래도 절대로 버릴 수 없다. 앞면은 밋밋한 흰 티처럼 보이지만 뒷면은 강단 있는 문장들로 가득 찬, 반전 매력의 티셔츠. 단연 최애 티셔츠라고 할 수 있겠다.
퐁피두 하나 보러 파리로 갔다는 글을 혹시 기억하시는지. 이건 그 8박 10일간의 여행에서 업어 온 가방이다. 파리에 있는 죄 드 폼 미술관에서 구매했다.
죄 드 폼 미술관은 파리 퇼르리 정원 안에 위치한 작은 미술관이다. 사진 기술이 발생할 즈음, 그러니까 역사적으로는 근대라고 불리우는 때이며 미술사에서는 인상파 시대 이후의 작품을 소개하는 미술관이다. 말하자면 고전과 현대의 교두보같은 시대에 주목하는 곳이라고 해야 할까. 현대라는 시간과 왕정 시대가 남긴 유물이라는 공간(튈르리)이 만난 가운데에 위치하는 곳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밝은 회색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은색이라고 할 수 있다. 각도에 따라 색이 마구마구 번쩍번쩍하며 바뀐다. 방수 재질이면서도 빛을 반사하는 재질이다. 그야말로 비 오는 날에 들면 딱 좋은 가방.)
국립 미술관이긴 하나 사실 엄청 유명한 곳은 아니라서, 이곳에서 무언가를 사 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전시 경험이 손에 꼽을만큼 좋았고, 박물관의 MI(뮤지엄 아이덴티티)를 적절히 잘 활용한 디자인도 매우 훌륭해 패션 아이템으로 쓰기에도 손색없어 보였다. 게다가 방수 재질. 마침 날씨가 하루종일 오락가락하는 봄에 간 여행이었기 때문에 그 뒤 일정은 모두 저 가방과 함께 소화했다.
더 놀라운 점은 이후에 구매한 LP를 넣어오기에 맞춤제작한 것처럼 딱 맞아 떨어지는 사이즈였다는 점이다. 어쩌면 미래의 내가 보낸 시그널을 받았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샀다는 생각이 드는 가방.
2024 전주국제영화제 파우치(2024년, 전주에서 구매)
2024년도에 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사 왔다. 매년 굿즈샵을 기웃거리지만 노트나 펜 외에는 딱히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는데(아름답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자꾸 굿즈에서 감히 ‘쓸모’를 찾으려는 습관 때문인 것 같다) 이 파우치는 왠지 엄청나게 잘 쓸 것만 같다는 확신이 들어 사 왔다. 가격도 얼마 안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이 파우치는 그야말로 애착 파우치가 되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배터리 용량이 적은 핸드폰을 4년 반이나 쓰면서 20,000암페어의 거대한 벽돌 보조배터리를 들고 다녔는데, 그 배터리와 충전 케이블이 쏙 들어가는 사이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라비너가 기본 옵션으로 달려 있어 가방 안쪽에 고정해두기도 좋다. 그래서 용량이 작은 가방을 사용할 때 가방 스트랩에 카라비너를 걸어 파우치에도 물건을 담으면, 가방을 확장해서 사용하는 효과가 있다.
너무 많이 들고 다녀 초록색 물도 약간은 희끗해지고 너덜너덜해졌지만, 아마 이 파우치는 구멍이 나도 메워서 쓰지 않을까 싶다. 사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비슷한 게 있으면 또 사오고 싶었지만, 올해 굿즈 중에는 비슷한 게 없어 아쉬웠다.
도쿄에서 사 왔다. 보통 여행을 갈 때에는 손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의 가벼운 노트를 챙겨 영수증과 티켓과 같은 여행의 물리적 부산물을 모아 정리하고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이나 하루 일정 등을 기록하는 편이다. 그래서 마스킹테이프를 꼭 챙기는 편인데, 최근 도쿄 여행을 갔을 때 깜빡하고 마스킹테이프를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도쿄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대충 노트에 끼워서 보관하다가, 마침 21_21 디자인사이트에서 마스킹 테이프를 판매하고 있어, 여태 모아놓은 티켓과 영수증을 드디어 붙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별 생각없이 구매했다.
그런데 웬걸, 찢기기도 잘 찢기면서 끈끈이가 너무 과하게 끈적이지도 않고 부착력도 훌륭한 게 아닌가. 게다가 떼어내도 자국도 안 남는 아주 우수한 품질의 마스킹테이프라는 것을 사용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495엔이라는 합리적인 가격에 비해 아주 훌륭하다. 아직도 내 방 책상 한곳에 항상 두고 종종 사용하고 있다. 혹시 21_21 디자인사이트에 가게 된다면 한 번쯤은 구매를 고려해볼 만한 제품이라는 정보를 공유하고 싶다.
이제는 너무 많이 쓰고 너무 많이 빨아서 안그래도 워싱 처리된 모자가 더 워싱되어버린 이 ‘판소리’ 모자를 빼놓을 수 없다. 감도 높은 편집샵인 로파서울과 협업한 광주비엔날레 굿즈샵에서 구매했다. 아침잠이 많아 외출 준비를 매우 귀찮아하는 내게 아침 일찍 밖에 나가야 하는 일정(예를 들면 출근이나 MMCA 과천관 관람 등이 있겠다)을 소화할 때 꽤 자주 함께하는 아이템이다.
이 모자의 훌륭함은 ‘적당함’에 있다. 일단 컬러도 정말 ‘적당’하다. 적당한 중~저명도의 회색이라 아무 착장에나 잘 어울려 가장 고민 없이 착용하게 된다. 레터링도 ‘적당’하다. 아름다운 영문 레터링이 과하지 않게 있어 너무 심심한 느낌도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계절감도 ‘적당’하다. 워싱이 있어 텁텁한 느낌이 들지 않아 여름에도 쓰기 좋고, 시각적으로 약간 포근한 느낌도 있어 겨울에도 쓸 수 있다.
여러모로 대체할 만한 다른 제품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가끔 손빨래를 해야 한다는 점은 좀 귀찮지만, 소중한 만큼 잘 어르고 달래 천년만년 오래 써 봐야겠다.
가장 최근에 구매한 굿즈이다. 얼마 전까지 일민미술관에서 열렸던 <시대복장> 전시에서 사 왔다. 동시대 서울의 패션에 주목하며 디자이너 브랜드 HYEIN SEO, PAF(포스트아카이브팩션), 지용킴의 작업을 소개하는 전시로 상당히 트렌디하고 ‘힙한’ 전시였다. 당연히 굿즈의 디자인과 퀄리티도 매우 훌륭했는데, 이것저것 한참을 둘러보다가 결국 선택한 것은 이 틴케이스였다.
자꾸 굿즈에서 쓰임을 찾게 되는데, 이 틴케이스는 보자마자 ‘이것은 일단 사고 나서 쓰임을 생각하자!’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 매끈한 외관, 절제된 디자인, 사용 경험을 고려한 디테일이 꽤 잘 만든 제품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무엇으로 쓰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쓰임을 달리하며 며칠을 써 보았고, 지금은 약통으로 잘 쓰고 있다. 은근히 하드웨어가 잘 고장나는 편이라 항상 반창고, 소화제, 진통제, 항히스타민제 등을 한번에 넣을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아주 적절하게 쏙 들어가는 게 아닌가.
사실 전시 자체는 아주 취향에 들어맞는 편은 아니었지만(당연히 볼 게 많아 시각적으로 즐거웠지만 패션에 박식하지 못해 흥미가 덜했던 정도이다) 이 굿즈 덕분에 괜히 전시도 더 좋게 기억되는 것 같기도 하다. 잘 만든 굿즈는 전시에 대한 경험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역시 굿즈 하면 가방이고 가방 하면 언리미티드 에디션 부직포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립출판물을 다루는 행사의 특성에 맞게 아주 깜찍한 가방을 행사 주최측에서 모든 관람객에게 무료로 제공한다. 추측컨대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셀러에게 포장 가방을 준비하는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것 같다. 2018년도 이후 열린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매년 갔으니 2018년부터 배부된 모든 가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셈이다.
매년 기대될 정도로 아름다운 행사 비주얼을 그대로 담은 이 가방은 실제로 내구성도 꽤 괜찮아 너무 무겁지 않은 물건을 담아야 할 때 잘 사용하고 있다. 혹은 먼지가 붙지 않게 무언가를 장기간 보관해야 할 때도 상당히 유용하다.
책을 좋아할 만한 사람들이 모일 법한 행사(예를 들면 다른 독립출판 페어 혹은 뮤직 페스티벌이라거나..)에 가면 이 부직포백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나는 그들에게 당장 반갑게 인사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내적 친밀감을 느낀다. (물론 낯가림 인간은 그런 거 안 한다.)
자, 이제 할 말은 다 했으니 이 이야기를 멋들어진 한 문단으로 정리해야 하겠다. 흥청망청 소비일지를 무려 두 편에 걸쳐 쓰면서, 새삼 나는 그 어떤 물건도 허투루 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근검절약하고 절제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어쨌든 반드시 ‘이유’가 있는 물건만을 곁에 두려고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대체로 내게 그 이유란 ‘이야깃거리’인 것 같다. 누군가가 내 물건에 관해 물을 때 어디서 왜 그 물건을 샀는지, 그 물건이 왜 특별한지, 이 물건을 고르기까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등에 대해 신나게 떠들 만한 것들 말이다. 그러한 이야기 안에는 나라는 사람의 향취를 구성하는 취향이 숨어 있다. 나는 그런 이야기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물성을 가진 사물 위에 쌓인 이야기는 쉽게 흩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더 많은 취향과 대화가 더해지며 그 물건은 더욱 특별한 사물이 된다. 물건 하나하나에 뭐 그리 이유를 붙이는지 의아하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주변을 이루는 선택에 대해 구구절절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더 들여다보고 싶고 궁금해지는 것 같다.
전시 혹은 전시와 이어진 여러 경험은 내 일상도 많이 바꾸었지만, 내가 물건을 구매하는 기준과 소지품을 다루는 태도에도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좋아하는 것으로 인해 사소한 부분부터 큰 부분까지 그것에 맞게 변화한다는 감각은 꽤 즐겁고, 또 유쾌하다.
p.s. 펜타포트를 다녀오느라 기고가 하루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절대로 죽지 않는 락과 달리, 락놀이를 무한으로 즐긴 인간은 죽음에 가깝도록 깊게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들 온열질환 조심하면서 즐겁고 건강한 락놀이 합시다.
본 전시 중 좋았던 전시가 전부 끝나 버려 전시 추천은 잠깐 쉬어갑니다. 일상이 바쁘니 관람을 미루다가 곧 끝날 전시들만 서둘러 보는 탓도 있겠군요. 조만간 또다시 차력쇼를 달릴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 기다리는 동안, 한남동에 위치한 페이스갤러리에서 하는 제임스 터렐의 개인전 <The Return>을 관람하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이 전시는 긴 말이 필요 없이 직접 경험하는 것이 전부이니, 직접 찾아가 한번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한 시간 정도는 충분히 할애할 가치가 있습니다. 사전 예약제이니 반드시 네이버에서 예약을 하고 가셔야 합니다.
[요마카세] 토요일 : 전시 왜 봐?
작가 : GARDEN
소개 : 주말마다(사실 평일에도..) 전시를 보러 다니는 직장인의 전시 보는 이야기입니다. ‘전시 왜 봐?’ 라는 질문에 짧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상상해도, 무엇이 펼쳐져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 미술관에서 보낸 시간들을 글로 풀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