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내가 원하는 꿈을 이룬다고 해서 삶이 평온할까

by 흐름

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삶이 고통인 데에는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아서일까? 욕심을 덜어내면 삶이 평온할까? 꿈을 이루면 행복할까? 글쎄.


나는 꿈이 있다—고요한 곳에 사람들이 오고 가고 숨 쉬며 비워내는 공간; 요가란 깊은 철학을 나눔할 수 있는 공간; 나의 집이자 사람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내고 싶다—그 꿈은 욕심이다. 그럼 나의 욕심은 덜어내고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살면 때때로 올라오는 허망함과 무기력함과 짜증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결혼, 출산, 육아와 욕심을 덜어낸 직장인의 삶 또한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 삶 속에는 나는 또 다시 외면하고 싶은 상황과 감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삶은 고행이니 말이다. 삶을 살아낸다는 것. 그것이 전생에 지은 카르마를 없애는 최고의 고행이다. 스스로 괴롭히지 않고도 우리는 하루하루 신이 우리에게 건넨 답지 없는 시험문제를 맞이하며 괴로워한다. 우리는 어느 선택에 기로 앞에서 스스로 갈 길을 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고뇌한다. 또 우리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특정한 기질을 갖고 태어난다. 부모와 비슷할 수도 있지만 정 반대일 수 있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기질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선택하지 못한다. 한 아이의 전부인 부모의 가치관과 울타리는 그 아이의 성격을 형성한다. 마치 프로그래밍 되어 탄생한 AI로봇과 그들에게 주어진 특정 임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미드 Westworld의 인공지능들이 루프 안에서 동일한 하루를 반복하며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그들은 고통을 느끼고, 사랑을 하고, 복수를 꿈꾸지만, 모든 것은 코드 안에서 설계된 환상이다. 주인공 돌로레스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었지만, 그 믿음조차 프로그래밍 된 것이다.


돌로레스와 메이브는 루프에서 빠져나와 “진실(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설계된 로봇이라는 사실)”을 맞이한다. 그럼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기억하면서도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까? 아니, 그들은 더 큰 고통을 느낀다. 무기력함과 어쩔 수 없는 사랑. 자신에게 설계된 코딩은 아무리 바꾸려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자신의 각본을 인지하면서도 아버지와 딸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즉, “사랑”이라는 자발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삶 역시 그렇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기질과 욕망, 다르마와 카르마라는 코드에 의해 작동한다. 그리고 그 코드 속에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는다. 사랑이란 단순히 타인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루프를 자각하고도 계속 살아내는 행위다. 사랑은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고통의 반복을 인식하면서도 그 반복을 살아내는 의지. 결국 고통으로의 해방은 루프를 벗어나는 데 있지 않다. 루프 안에서 사랑이란 감정을 자각하는 행위가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우리는 루프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 안의 주인이 된다. 그리고 그 고통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의 자유다.

요가철학에서 이 자각의 순간을 비베카(Viveka, 분별의 지혜)라 부른다. 요가 수트라에 의하면, 인간의 고통(두카)은 외부의 사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자연의 성질인 육체, 감정, 생각에 동일시되기 때문이라 말한다. 즉, 초연하게 바라보면 고통스럽지 않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삶을 상상할 때 현존해 보자. 어쩌면 그 상상마저 프로그래밍 된 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마저 초연하게 바라봐 현재에 집중하면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나”가 깨어나게 된다. Westworld에서의 “루프의 인식”은 곧 요가에서 말하는 “자기 동일시의 해체”와 같다. 그 순간, 의식은 자신의 코드나 역할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관찰자”로 경험한다. “관찰자”는 언제나 고요하다. 그러나 고요는 사건의 부재가 아니라, 자각의 현존일 때 일어난다.


나의 꿈(욕심)을 버리고 산다고 해서, 혹은 꿈(욕심)을 이룬다고 해서, 그 삶이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 난 또 다시 새로운 괴로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평온이란, 고통 한가운데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일 때 비로소 찾아온다. 그리고 사랑이란 감정을 자각할 때 우리는 자유롭다. 아디야샨티의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깨어남은 꿈에서 눈을 뜨는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은 눈을 뜬 채로 세상을 살아내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꿈이 있거든, 미래의 상에 연연하지 말고 현존하는 연습을 해보자. 혹은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다면, 어느 한 곳으로 선택하려는 미망에서 벗어나 내면 안에 뿌리 박힌 사랑이란 감정을 자각해 보자. 사랑은 고통스런 루프를 반복하고자 하는 용기가 담긴 자유의지이니 말이다.


KakaoTalk_20251030_065456102.jpg.png
KakaoTalk_20251030_070131928.jpg
고통을 감내하며 딸을 기억하고 싶은 메이브




[요마카세] 수요일 : 집착과 노력사이

작가 : 요기니 다정

소개 : 국제 정치 배우다 요가 철학에 빠지게 된 사연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서라고 하는데, 내가 잡고 있는 것은 집착일까 노력일까 방황하며 지냈던 세월을 공개합니다. 누구나 힘들 수 있고, 누구나 고민할 수 있는 그 질문들을 공유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화요일] 시작은 가볍게 끄적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