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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용감한 조개가 되고싶다

자기 계발서 중독자가 소설을 사랑하게 된 이유

by 흐름

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읽고있어. 음료를 주문하며 요즘 읽는 책은 무엇인지 친구가 묻는다. 대학생 이후로 소설은 정말 오랜만이야. 특히 장편소설은. 두께에 압도되어 쉽게 시작할 수가 없더라고. 근데 어쩌다 소설을 읽게 된 거야? 친구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질문을 이어간다. 자기 계발서를 중독 수준으로 읽었어. 성공하고 싶거든. 물론 여전히 성공은 하고 싶어. 너는 뭐 읽고 있어? 이번엔 내가 질문한다. 나도 소설. 요즘엔 에세이조차 안 읽히더라고. 왜? 에세이도 처세술도 손에 안 잡혔던 터라 어떤 이유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다른 사람 인생에 관심이 없어진 것 같아. 지금은 타인의 세상이 너무 쉽게 읽히고 들리고 보이니까. 글조차 피로해졌달까. 아 그렇네. 바닥에 깔린 까맣고 동그란 펄을 빨대로 휘저으며 대답한다. 소설도 남의 이야기인데 내 삶으로 대입해 읽기 때문인가. 혼잣말처럼 되네인다. 내게 소설은 경험해보지 않은 감정, 사건, 사람들에 대한 신선한 자극 때문인 거 같아. 친구가 덧붙인다. 현실이 아니여서인가.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으니까. 소설이 몇 년 만에 손에 잡히는 이유는 뭘까 생각하며 빨대로 바닥에 몇 개 남지 않은 펄을 찾는다. 미처 빨아들이지 못한 까만 펄이 서로 엉겨 붙어 거품이 인다.

출근길, 늘 생각한다. 성공하고 싶다. 돈도 많이 벌고 싶다. 하고 싶은 일로 성공해 부자가 되는 상상을 한다. 로또를 산 적은 다섯 손가락에 꼽지만 당첨되는 망상은 일상이다. 성공한 사람의 삶을 흡수하려 온갖 자기 계발서를 빨아들인다. 읽다 보니 월급으론 도저히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눈을 감으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퇴사가 답인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뭐지? 내 꿈은 뭐였지? 성공한 인생은 뭐지? 얼마나 가져야 부자인거지? 머리가 지끈해 눈을 뜨니 옹기종기 모인 까만 뒤통수만 보인다. 월요일 오전 8시 45분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강남역 스크린도어가 열린다. 거대한 빨대로 빨려 들어가듯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지하철을 빠져나간다.

자기 계발서를 아무리 읽어도 내 삶은 그들처럼 반짝이지 않았다. 그들이 만들어낸 동그랗고 빛나는 진주는 내겐 밀크티 안에 든 물컹한 반죽에 불과했다. 눈뜨자마자 이불을 정리하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항상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도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는 누구도 답해주지 못했다. 돈 말고 무엇이 있으며 내가 쫓아야 할 이상 앞에선 늘 방황하는 처지였다. 월급 받으니까 다녀야지. 밖에 나가면 이 정도 못 벌걸. 요즘 같은 불경기에 회사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야지. 현실에 허우적거리며 파도에 흰 거품만 무는 조개껍데기의 하루 같달까.


자기 계발서의 작가와 달리 소설 속 주인공은 저마다 문제가 있다. 몸이 약하거나, 가난하거나, 도덕적 결함이 있거나 인생이 지독히도 잘 풀리지 않는 이들이다.

내가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할까. 마음껏 도전하고 포기하고 시도하며 주인공 삶을 모의 시연 한다. 내 삶이 아니니 이렇게나 쉽다. 나의 상상과는 별개로 주인공은 자기 앞에 역경을 헤쳐나간다. 스스로 깨닫기도 하고 조력자의 도움을 받기도 하며 반짝이는 진주로 성장한다. 진주는 이물질에 대한 조개의 방어반응이다. 조개가 이물질이나 기생충을 밖으로 토해내지 못하면 껍질의 재료가 되는 탄산칼슘을 주위에 축적하기 시작한다. 이런 방어반응이 계속되면 탄산칼슘이 겹겹이 쌓여 점점 커지고 둥근 모양의 진주가 만들어진다. 조개에게 진주는 피 터지는 삶의 흔적이었다.


자기 계발서가 더 이상 읽히지 않은 건 보석함 속 진주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조개껍질 속 작은 세상의 진가를 알게 된 순간 그 어떤 보석함도 조개껍질보다 반짝일 순 없다. 진주가 갖고 싶은게 아니다. 치열하게 스스로를 지키며 진주를 쌓아가는 용감한 조개가 되고 싶다.



사진 출처 : 작가 예슬




[요마카세] 월요일 : 퇴사할 수 있을까

작가 : 흐름

소개 : 모든 것이 되고파 나 조차도 못 된 10년차 직장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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