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박사에 진학하고, 끊임없이 연구를 하는 것이 과연 멋진 일일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마치 깊게 뿌리내린 나무와도 같다. 견고하고 아름다워 제 아무리 건드려도 잘 흔들리지 않는다. 혹은 공부를 통해 신분 상승이 가능해서일까? (물론 지금의 사회로선 힘든 일이지만 과거에는 시험을 통해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사회적인 분위기는 어린아이를 치열한 경쟁사회로 몰아붙인다. 경쟁에서 승리한 아이는 어른들의 예쁨을 받곤 한다.
나는 천재라던가 엄청난 인재는 아니었어도 어른들의 예쁨을 받고 자랐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상’에 부합했던 아이라고 할까. 너무나 ‘올곧게’ 자라 버린 덕에 옆 비탈길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그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다. “너네는 학생이야. 학생의 본분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거야.” 모든 담임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다. 많은 생각도 할 필요 없이 그저 중간고사, 기말고사, 방학, 또다시 중간고사, 기말고사, 방학의 쳇바퀴를 돌다 보니 어느덧 나는 명문대 학사와 석사를 졸업한 ‘어른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어른이 되었지만 아이였다. 무성히 자라난 가시밭에 혼자 발 내딛을 용기가 없었던 어른아이,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혀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용기가 없었던 어른아이, 따가운 햇살이 두려운 어린 새싹 같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가정에서 아이에 대한 기대가 공부로 이뤄지진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 주변에서 나를 ‘잘한다, 멋있다’ 하니까 나의 삶이 멋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인정받으면서 지내온 삶에 심취해 있었다. ‘인정’이라는 도파민에 흠뻑 취해 마치 그것이 없으면 큰 일이라고 날 것처럼 중독되어 있었다. “요가강사로 살면 나는 인정받을 수 있을까?” 내 내면에는 이 같은 질문이 대뇌이고 있었다.
박사 진학에 난항을 겪고 있는 그때, 나에게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한 번 더 박사에 도전하거나, 내가 ’ 좋아하는’ 요가를 하거나.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고 그냥 회사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르겠다. 공부와 요가,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가지 모두 하고 싶지 않았다. 박사과정을 밟는다는 것은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다. 나이가 들면서도 굶주린 삶을 견뎌야 하며, 여전히 학생이라는 신분과, 학위를 따고 나서도 안정적이지 못한 취업현황이 나를 주춤하게 했다. 요가강사가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 왔던 나날들, 나를 우러러보던 시선들, 이것들을 포기해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삶은 주어진 과제를 숨 가쁘게 해치웠다면, 지금부터의 삶은 새하얀 도화지에 나만의 그림을 그려 넣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걸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지? 나는 연구와 요가 모두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둘에 대한 열정은 고작 여기서 멈칫할 만큼 여기까지 인 건가? 도무지 모르겠다. 나와의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너란 인간, 참 알기 어렵구나.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나’를 찾는 여행을.
[요마카세] 수요일 : 집착과 노력사이
작가 : 요기니 다정
소개 : 국제 정치 배우다 요가 철학에 빠지게 된 사연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서라고 하는데, 내가 잡고 있는 것은 집착일까 노력일까 방황하며 지냈던 세월을 공개합니다. 누구나 힘들 수 있고, 누구나 고민할 수 있는 그 질문들을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