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으로 치닫던 살림 줄기를 안으로 돌려세울 때
벼리, 안녕?
뭐?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어떻게 안녕할 수 있느냐고? 왜 아니겠어. 난데없이 마스크를 쓰고 한 해를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지냈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견뎌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생기고 널리 퍼진 까닭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산과 들을 파헤치며, 세계화라고 하여 사람들이 비행기나 배를 타고 세계 곳곳을 어디든지 오가기 때문이래.
내남없이 바깥으로만 치닫던 발길을 거두고 안살림을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오늘은 시골에서 태어나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살아온 할머니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을 함께 연주하려고 해. <우리 마을이 좋아>가 그것이야.
충남 부여 송정 마을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일곱 살 때부터 밥하고 나물 캐고 모시 삼고 빨래도 했어. 할머니는 스무 살에 아랫마을에 사는 총각하고 혼인했대. 그런데 그때만 해도 신랑 각시가 서로 얼굴도 모르고 혼인하기도 했다는데 이 할머니는 그래도 나은 편이 아니었을까? 윗마을 처녀와 아랫마을 총각은 낯익은 사이가 아니더라도 그리 낯설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할머니는 봄이면 산에 산딸기며 물앵두가 많이 열렸어도 따먹지도 못했대. 일하느라고 바빠서. 소와 염소, 닭이며 토끼, 돼지를 기르고, 무며 콩이며 옥수수며 감자며 고구마 따위도 심었다니까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랐을 터야. 그런데 그걸 다 거둬들이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그러면
고라니가 먹고, 너구리가 먹고,
오소리가 먹고, 멧돼지가 먹고, 다 먹어.
그래도 워찍혀, 심어야지.
지들이 먹든지, 내가 먹든지.
에효, 온갖 멧짐승이며 산새들이 달라붙어 먹고 짓밟는 바람에 이리 뜯기고 저리 뜯겼대. 어디 그뿐이겠어? 진딧물이 끼기고 하고 이런저런 벌레들도 다 달라붙어 갉아먹기 바빴을 거야. 너 같으면 마음이 어떻겠어? 산이며 들에 널린 열매 하나 따 먹을 겨를도 없이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가꾼 것들이 캐 먹히고 짓밟았으니. 속이 몹시 상하셨으련만 “그래도 워찍혀, 심어야지. 지들이 먹든지, 내가 먹든지.” 하시잖아. 속도 좋으시지? 이걸 보면서 이보다 몇 쪽 앞서서 할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 “소는 순하디 순하지. 시상에 그런 동물은 없어. 그 많은 일을 다 해주고 원망 한번 안 해.”라고 말이야. 나는 소와 할머니가 겹쳐지더구나.
이 대목에서 생각난 노랫가락이 있어. 영화 ‘포카혼타스’에 나오는 ‘바람 빛깔’이란 노랜데 간추려 볼게.
그대 발길이 닿는 땅은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여기나요? 푸나무와 바위까지도 누리 결 느낄 수 있어요. 사람들만이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아요. 생김새가 나와 다르다고 가벼이 여기지 말아요. 그대 마음 문을 활짝 열면 누리 결이 곱게 보여요. …… 얼마나 커지려는지 나무를 베면 알 수 없어요. 살갗이 희든 검든 그건 종요롭지 않아요. 바람이 드러내는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해요. 아름다운 빛 누리를 같이 보고 어깨동무하면 우리를 이룰 수 있어요.
노랫가락은 이리 와서 소나무 사이로 숨은 숲길을 달려 보고, 햇살이 빚은 달콤한 산딸기를 맛보라고 이어져. 세찬 비바람과 강줄기는 내 핏줄이고 왜가리와 수달은 내 동무라면서.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저 노랫말처럼 우리 발길이 닿는 땅과 그 안에 있는 건 다 우리가 가질 수 있다고 여겼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이리저리 파헤치며 살아왔지. 산을 허물고 논을 메워서 공장을 짓고 개발한다고 이리 파헤치고 저리 깎아내린 끝에 맞닥뜨린 것이 기후재앙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야.
그동안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은 가난과 노동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며 소 팔고 논 팔아 아이들을 도시로, 도시로 보냈어. 만약 우리가 우물 안에 개구리로 살아서는 안 된다며 너른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고 서로 부추기며 도시로 더 큰 도시로 나가려 하지 않고, 할머니처럼 태어난 곳에서 가까운 이웃과 어우렁더우렁 서로 보듬으면서 살았더라도 기후재앙을 불러들이고 코로나바이러스에 시달렸을까? <우리 마을이 좋아>에서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해.
서러운 일도 재미난 일도 참 많아.
그래도 나는 우리 마을이 좋아.
이 말씀이 나오는 풍경을 보면 울창한 나뭇잎 사이도 드러난 줄기와 가지가 마치 살아가면서 이리 헤매고 저리 흔들리는 인생길 같더구나. 이 그림을 보면서 코로나로 이리 몰리고 저리 쏠리며 휘청거리는 우리네 살림살이가 떠올랐어. 느닷없이 밀어닥친 코로나 탓에 너나들이 숨쉬기조차 힘들어하잖아. 그렇다고 해서 모두 잃기만 하는 것은 아니야. 얻은 것도 적지 않지.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를 되찾고 무엇이 쫓기듯이 허겁지겁 바깥으로만 치닫던 안살림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어떤 이나 어떤 일과는 조금 거리를 둬도 괜찮을지 어떤 사람과 어떤 일은 그래도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낱낱이 깨닫게 되었어. 또 코로나를 피하느라 덜 나다니다 보니 덜 움직이는 삶도 조촐하고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도시를 벗어나면 먹고 살길이 막막해서 어쩔 수 없이 도시에 목을 매는 도시 내기들이 적지 않았어. 그런데 코로나로 시달리면서도 집에서도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아. 집에 콕 틀어박혀서도 세계 곳곳에 있는 어떤 사람하고도 뜻을 나눌 수 있고. 인터넷을 비롯한 인공지능 기술 덕분이지. 그러니 이제 볼 둘레를 넓힌 개구리들이 어수선한 도시를 떠나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도 좋지 않을까. 덜 벌고 덜 쓰더라도 그 덕분에 삶터를 덜 더럽히고 삶을 더 짜임새 있도록 돌려세울 수 있으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