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드디어 오늘 이곳을 떠난다.
쉽게 잠들지 못할 줄 알았는데, 짐도 다 빼서 사무실로 가져다 놓고 인사도 하는 등 할 일이 있어서인지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 기뻤던 일, 아쉬웠던 일, 다음엔 이렇게 해보야지 그리고 다시 한국에서의 삶.
“가신다고 하시니 아쉽네요.
같이 고생 많이 했는데요.
한국 가서도 잘 도와주십시오. 건강하시고요.
그리고,
살갑게 잘 챙겨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더 잘해드렸어야 했는데.“
어이쿠, 이 양반 왜 이러시나.
현지 영업 담당 친구가 좋게 마지막 인사만 하면 되는데, 굳이 또 오그라들게 이런 말을 한다.
강한 인상에, 외국인들과 파이팅 넘치게 아옹다옹하는 친구가 저런 말 하니 당황스럽다. 이 남미 땅에서 같이 고생한 정이란 참.
“죄송하긴요.
덕분에 나도 많이 배웠고 같이 고생 많이 했네요.
앞으로도 수고 좀 해주세요.“
지사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니,
“오늘 가는 날이죠? 고생 많으셨어요.
한국 가시면 안부 좀 전해주세요.
건강하시고요. “
“네”
그러면서 점심 식사로, 광어지리 해주신 사장님이 하시는 한식당에 가자고 하신다.
‘거기 어제 갔는데요.’
하려다 그냥 갔다.
“사장님, 또 왔습니다.”
“어이구, 오늘 가시는 날이죠?“
“네, 가기 전에 사장님 얼굴 한번 더 보라는 하늘의 뜻인가 봐요.”
“저야 좋죠.”
결이 맞는 사람은 자주 보아도 좋다.
그렇게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지사로 와서 양치를 하고 마지막 짐 정리를 하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사람 마음이 묘해서 그렇게 버리고 버렸는데도, 일부 짐은 못 버리겠어서 박스 하나를 지사 창고에 모아서 한쪽 구석에 이름표를 붙여서 고이 모셔 놓았다.
“여기 다시 올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실제로 그 이후에 한번 더 갔다. 다행히 한 달간 단기 출장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공항으로 가는 길 바깥 풍경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도시, 넓게 펼쳐진 시골 풍경. 한 번씩 걷기도 했던 곳에는 시선이 더 오래 머물렀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뒤척이면서도 꽤 오랜 시간을 잤다. 일도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고 인수인계까지 마친 상태에서, 한국에 도착해서도 해외 부임자 정기휴가가 있어서 푹 쉴 수 있어 마음이 더욱 편했다.
그렇게 인천 공항 도착 두 시간 정도 전에 잠에서 깼다. 계속 앉아 있다 보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화장실에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자리로 돌아와 창 밖 하늘과 바다를 보니, 지난 몇 년 동안 남미에서 살았던 시간이 마치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았다.
‘내가 거기서 살았던 것 맞나?’
싶다가도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아, 난 거기 일하고 돈 벌러 간 거라 생각했는데, 거기 살며 그 친구들과 같이 내 인생의 한 시절을 같이 보낸 거였구나.‘
고마운 추억이다.
남들이 쉽게 하기 힘든 경험을 했다.
입국 절차에서 안녕하세요 해야 하는데,
스페인어로 아침 인사를 할 뻔했다.
Buenos días
(good morning)
Como estas?
해외에서 몇 년 살다 오면 한국에서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휴가를 마치고 오랜만에 출근하니 사무실이 꽤 낯설었다.
그렇게 오래 다닌 회사였는데도 뭔가 새로웠다. 몇 년 동안 조직개편으로 내 자리도 없어져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비어있는 자리 아무 데나 앉아서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을 연결해서 아웃룩을 (outlook)을 연결했다. 어딜 가든 이 노트북과 인터넷만 되면 일이 되는구나. 편리한 건 맞는데 이게 축복 맞는 거겠지?
해외 파견을 몇 차례 다녀왔다 보니 본사에 짐을 따로 남기지는 않았다. 다이소에서 사무실용 슬리퍼 등을 사 와서 다시 본사에서의 삶을 차근차근 시작했다
본사 구내식당에서 주는 대로 먹는 밥이 참 편했다.
‘점심시간 줄 긴 건 여전하네.
그래도 때 되면 메뉴 고민할 필요 없이 밥 주니까 고맙다.‘
“구내식당 식판에 먹는 밥이 맛있어? 그럼 아직 회사 다닐만한 거야.”
깨작거리며 밥을 먹던 선배가 했던 말이다.
불만이 많던 그 선배는 후에 해외 파견을 나갔다 현지 공장에서 밥을 먹다,
“이런 걸 먹으라고 주는 거야!”
하며 식판을 엎었다고 한다.
현지 책임자가 다음날 비행기표를 끊어줘서 바로 복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했다.
솔직히 밥만 문제였겠나. 회사 생활, 현지 파견 생활이 맘에 안 들고, 연봉이 맘에 안 들고, 대우가 맘에 안 들고, 사람이 맘에 안 들고.
맘에 안 드는 건 사실 무진장 많다. 내 돈 내고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받을 때에도 맘에 안 드는 것이 있는데, 돈 받고 남의 일 해주면서 모든 것이 맘에 들 순 없다.
다만, 그래도 긍정을 생각하며,
“그래도 여기만 한 곳 없지. “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머. 다른 데 가도 별반 다를 것 없어.”라고 버티던가,
대출은 갚아야 하고, 고정 생활비가 있으니, 다른 대안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다니게 된다.
하지만, 확실한 대안이 있거나, 대출도 없고 살만한 무언가가 있으면 (집이 부자이거나, 와이프가 돈을 잘 벌거나) 본인의 임계점에 왔을 때 사직원을 던진다.
그렇지 않고, 임계점이 넘었는데도 어쩔 수 없이 다니다 보면 공황장애니 고혈압 등이 찾아와 약으로 버티게 되고, 스트레스 푼다고 술, 담배에 찌들어 있다 다른 병에 걸려 휴직이나 퇴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사정이 안되는데,
“에라 모르겠다. 못 해 먹겠다. 일단 쉬면서 생각하자. 어떻게든 되겠지. 산 입에 거미줄 치랴. “
라고 생각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그런 경향이 더 강해서, 인사팀에서도 고민이 많다.
신입 채용과정이 만만치 않아, 비용과 시간 그리고 노력이 많이 든다. 필기시험에, 수차례 면접까지 해서 가리고 가려 뽑아 교육시켜서 이제 좀 써먹으려고 하면 그만둬버린다. 1년도 안돼서 그만두는 친구도 많다.
그래서, 신입사원을 받은 팀에서 그 신입사원이 1년 혹은 정해진 짧은 기간 내에 그만두면 팀장이 인사상 불이익, 평가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많다.
‘지지고 볶는 건 참 한결같네.‘
그렇게 비교적 평온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담당 임원의 호출.
10년 이상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이 분이 날 왜 부르는지, 말을 안 해도 대충 알고 대비를 해서 가는데 감이 안 올 때가 있다.
심심하니까 놀아달라는 건 아닐 테고,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아, 불안함이 또 적중하는 건가. 미안하려면 미안한 일을 하지 마시지.
“퇴사한 A 부장이 담당하던 E 사업 있잖아. 그게 지금 엉망이 되어버렸거든. 일을 왜 그렇게 처리한 건지. 참.
그래서 말인데, C 과장이 해결사잖아. 지난번 일도 잘 해결했고, 이번 건도 비슷한 사안이야. 현지에서도 사람이 나와서 직접 서포트 (support, 지원)하고 처리해줬으면 한다는 요청이 왔어.
터키에 나갈 수 있나?“
“터, 터키요?”
머릿속에 떠 오르는 건, 유적지에서 날아다니는 수많은 형형색색의 열기구들 뿐이었다.
아, 이걸 싫다고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물쭈물 대면 이미 말린 거다.
이럴 땐 원래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아니, 진짜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두 달 나갈 걸 몇 년을 하고 이제 겨우 한국 들어온 사람한테 다시 다른 나라를 나가라니. 싫습니다.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
라는 말을 좋게 좋게 해야 하는데,
현실의 나는,
“언제 나가야 하는데요?”
라고 묻고 있었다.
“이 건도 급하게 요청해서 나갈 수 있다면 다음 주에 나가면 좋겠네.”
이 양반아, 한국 들어온 지 얼마 안되어 다시 나가라는 것도 좀 그런데, 당장 다음주?
가면 이번엔 또 몇 년을 있어야 하나?
“이번엔 지난번처럼 길어질 수도 있으니 파견 전 휴가를 쓰고 가지.
가서 할 일도 많을 텐데 머리도 좀 식히고 재정비도 하고 말이야.“
그것도 챙겨주는 거라고 말씀을 해주신다.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계약서에 잉크가 마르기 전에 일이 생긴다는 말처럼, 캐리어 짐 정리도 다 안되었는데 다시 짐 싸서 나가야 한다.
다행히 이전 짐이 있어서 그대로 다시 싸면 된다.
이래서 이사를 자주 다니면 짐을 다 풀지 않지.
이토록 긍정적인 나는 다시 짐을 싼다.
이번엔 ‘일주일 만에 배워서 써먹는 터키어” 책을 샀다.
"Merhaba"
(메르하바. 터키어로 안녕하세요)
(사진 출처 : 네이버 도란도란님 블로그)
- Como estas? 는 1, 2부로 모두 마칩니다.
그동안 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