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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 Dec 30. 2022

회사 근처에 좀비가 있다

퇴직 임원 이야기

인사 발표가 12월 초에 나왔다.


1/1 부로 적용된다고 하지만,

집에 가시기로 결정된 분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인사 발표 다음 날 짐을 싸서 집으로 가기도 한다.


어느 대기업에서는 통지를 받고, 빠르면 당일, 늦어도 다음 날 인사팀과 IT 직원들이 찾아가서, 그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컴퓨터 및 서류 등을 정리하게 한다. 그래서 보안 상 문제가 없는 최소한의 자료만 갖고 집에 가시면 된다고 한다. 물론 가져갈 것이 없으면 소위 몸만 나가면 된다.


우리 회사는 그렇게까지는 냉정하지 않아서 알아서 정리하고 말일까지 노트북과 서류 등을 반납하면 된다. 어차피 컴퓨터 내에 심어 놓은 프로그램으로 추적이 되고, usb로 파일을 가져갈 수 없게 되어 있어서 그냥 놔두는 것 같기도 하다.


도처에 깔린 CCTV와 보안 인원들이 외부에서 오는 도둑만 감시하는 게 아니라, 이상한 짓 하는 임직원도 당연히 감시하고 있다.




그렇게 시간을 주다 보니 부작용이 생긴다.


(조금 냉정하긴 하지만 발표 나면 그냥 바로 다음 날로 집에 가시게 정해두는 게 모두에게 좋은 것 같다.)


자꾸 사무실로 나와서 서로 민망한 상황이 벌어진다. 잘린 임원에게 ‘아이고, 안 되셨습니다.’ 이야기 하는 것도 조금 그렇고, 이야기 한다고 해도 사무실에 나와 있으면 자꾸 마주치니 더 민망하다.


더군다나, 퇴직 임원이 짐을 싸고 나가면 방을 비우고, 회의실로 바꾸거나 신규 임원의 방으로 바꾸어 놓으니, 자리가 없다. 회의실로 바뀐 본인의 방에 앉아 회의할 수 있는 공간을 뺏고, 또 앞으로 할 일도 없는데 심심하니 자꾸 전에 친했던 누군가를 부른다. 밥 같이 먹을 사람 없으니 같이 밥 먹자고 한다.


그러면 가서 그동안 수고하셨다 정도만 이야기 하는데, 자꾸 일 이야기를 길게 늘어 놓으시면 더 곤란하다. 왠지 다른 곳에 일자리를 찾으셔서 후배들에게 연락해서 도와달라고, 들어드리기 어려운 부탁을 할 것 같기도 해서다.


그래서, 어떤 친구들은 퇴직 임원이 사무실에서 좀 보자고 하면 죄송한데 바빠서, 다른 미팅이 있어서 하며 피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도 같이 근무한 사이인데 너무 야속한 것 아니냐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만나다 개인 메일로 회사 자료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보내드렸다가 징계를 받고 결국 잘린 직원이 있었다.


그리고, 퇴직 임원이 거래 회사로 들어가서 전에 같이 일하던 직원에게 부탁을 해서 계약했던 건이 compliance에 문제가 되어 징계를 받기도 했다.


어떤 분은 퇴직 통지를 받고 나서, 지방에 본인 일자리를 알아보러 간 기차표와 숙박비 그리고 그 회사 분들과 먹은 저녁 비용을 법카로 결재해서 많은 사람들을 곤란하게 한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 회사 일도 아닌데, 앞으로 안 볼 거라 그러신지 참 용감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앞으로 회사를 더 다녀야 하는 직원 입장에서는, 때로 선의가 자신에게 큰 위험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12월만 직원들을 괴롭히는 분들은 약과다.


퇴직하신 분이 퇴직 관리 차원에서 (어디 가서 회사 비밀 이야기 하지 말라, 이상한 말 하고 다니지 말라)

소속을 유지해주고 어느 정도 챙겨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도 눈치 없이 끈을 놓지 못하고 사무실로 나오신다.


1-2년 동안 계속 그러시고, 심지어 부활을 꿈꾸고 자꾸 뭔가 일을 벌이려고 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만큼 일하고, 임원 연봉받고 하셨으면 이제 내려놓으셔도 될 것 같은데, 평생을 회사 일만 하고, 회사 사람 만나서 밥 먹고 술 먹고 하다 보니 너무 허하셔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떤 퇴직 임원 분은 회사 근처에서 너무 자주 마주쳐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예 회사 주변에 사무실을 얻어 놓고 거기로 출근을 하신다고 한다.


한번 놀러 오라고 하는데, 가면 회사 정보 알려달라, 자료 달라, 계약하는 데에 도와달라고 할 게 뻔한데 어떻게 가겠나. 선의로 한번 갔다가 빠져 나오느라 혼난 적이 있어서 다시는 가지 않는다.


이런 부작용이 있는 걸 회사도 아는지, 퇴직 임원들이 집에서 할 일 없어 심심하고, 집에서 밥 먹는 게 사모님 눈치 보일까 봐 모처에 그런 분들이 오시고, 소일거리도 하시도록 사무실을 한 곳 마련해두기도 한다.


신문도 비치해 두고, 다과도 있고, 간단하게 식사하실 수 있을 정도는 배려를 해준다고 하는데, 거기도 불편하신 것 같았다. 본인이 모시던 분들이 있는 경우도 있고, 경로당처럼 왠지 본인이 뒷방 늙은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으신다나.


그래서 본사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그런 장소를 마련해 두는데, 굳이 본인이 사비로 회사 근처 사무실을 얻어 오신다. 보통 퇴직 관리는 2년만 해주기 때문에, 그 후에는 그 비용이 아깝거나 감당이 안되기도 해서, 그제야 사라지신다.




어떤 임원 분은 퇴직 후에 하고 싶은 일을 (버킷 리스트) 계속 얘기하시기도 했다.


100가지가 있다고 하셨는데, 계속 들어드리다 보면 진짜 100가지 모두를 이야기하실 것 같아, 한 3가지 정도씩만 듣다가 조용히 빠져나왔다.


자전거로 전국 일주, 100일간 크루즈 여행, 그동안 읽고 싶었는데 못 읽었던 책 정독 등 참 많기도 많으셨다.


퇴직 임원 인사발령이 나서,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다 사무실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발령 봤습니다. 아쉽네요. 이따 인사 드리러 가겠습니다.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하시죠.”


했더니,


“됐어. 얼굴 봤으면 됐지. 잘 지내. 건승하고.”


하며 웃으며 사라지셨다.


과연 그 분은 사무실 근처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셨다. 회사 다니실 때도 사모님과 금실이 좋아서 산악회 산행에도 같이 오시고 그러셨는데, 아마 그 버킷리스트 같이 하고 다니시느라 회사 근처에 올 시간 자체가 없으실지도 모르겠다.


“60에 퇴직하고 80까지가 안 아프고, 그나마 잘 돌아다닐 수 있는 나이잖아. 그동안 회사 다니면서 못했던 것 그 기간 동안 실컷 하려고.”


그분이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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