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개편 - 떠나는 자와 올라가는 자
인사철은 이사철이다.
다들 짐을 싼다.
집으로 가기도 하고,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잘 나가는 임원이 있었다.
목에 힘주고, 거만한 말투.
그런 분들의 종특 (종족 특성) 이다.
보통 보면 아침에 비서 분에게 되지도 않는 농담을 하고 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데 말이야.
근데 내가 말이야.
크하하하“
“아, 네, 그러셨어요?
잘하셨어요. “
“그렇지?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지?”
비서 분이 맞춰주는 사회생활 해주는데,
모르고 저러는 건지, 알면서도 계속 저러는 건지
말 들어주니 사무실에서 큰 소리로 떠든다.
저놈의 자기 타령은. 참.
집에 가서 사모님에게나 하시지.
직원들이 업무 협의한다고 웅성웅성하면,
“사무실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다들 일은 안 하고 말이야.“
하는 양반이 ㅎㅎ
이런 걸 내로남불이라고 하나.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다들 아실 거지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며칠 전 어김없이 비서 분에게 되지도 않는 농담을,
이젠 아예 귓속말 비슷하게 하면서 키득거리고 있는데,
한 직원이 찾아왔다.
“상무님, 안녕하세요.”
웃으면서 인사하는데,
받아주는 이 아저씨는,
“어, 어, 어”
완전 당황한 표정이었다.
인사팀 자네가 여기 왜? 하필 이 시기에? 혹시...
인사철에 예민한데, 인사팀 직원의 예고 없는 방문이라.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평소엔 문 열고 큰 소리로 빵빵 다 들어라는 듯이 스피커 폰으로 전화를 하거나, 회의를 하더니 문을 스르르 닫는다.
30분 후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아니 인사팀 직원이 나가고,
열린 문 사이로 망연자실한 이 분의 얼굴이 보인다.
말없이 넋 놓고 한참을 앉아 있는다.
그러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는지 옆에 묻고 알아보러 다닌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회사에서 리스해서 준 차는 반납해야 하는지 등
맞다. 잘린 거다.
한마디로 통지를 받은 거다.
결국 계약직인 임원과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즉, 짐 싸서 나가라는.
100여 명을 밑에 두고 있던 조직의 수장이,
동네 아저씨가 되는 순간이었다.
자기만을 위한 사무공간인 방도,
회사에서 기름값까지 대주던 차도,
월 몇 백씩 긁을 수 있는 법인카드도
모두 반납해야 한다.
열심히 일하고 아부도 해서 겨우 올라간 임원의 자리에서, 어떤 회사에서는 100가지가 바뀐다는데,
그걸 다 잃으면 갑자기 초라한 인생이 된다.
마치 비즈니스 클래스로 비행기를 타다, 이코노미로 내려온 느낌이랄까 무척 불편할 거다.
자신이 열심히 해서 차지한 자리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결국 누군가가 시켜준 자리.
그 사람이 ‘너 맘에 안 들어. 나가’ 하면 하루아침에 저렇게 된다.
보통 직원들에게 인사는 하고 집에 가는데,
갑질 많이 한 인간들은 뒤늦게 본인의 죄를 깨닫는지 인사도 없이 내뺀다.
아름다운 이별이 있으려면,
아름다운 만남이 전제되어야 한다.
불사신.
하지만, 퇴직 임원이라고 막 대하면 안 된다.
잡초처럼 불굴의 의지로 돌아오는 분들이 종종 있다
유종의 미라는 것은,
떠날 때 좋은 일을 기억하고 나쁜 일은 훌훌 털어버리고, 하던 일도 마무리 잘하고 가라는 뜻이지만,
떠나는 사람을 보낼 때에도, 자신에게 못되게 굴었어도 너무 모질게 대하지 말고 아름답게 보내 드리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좋게 좋게 잘 지내고, 잘 헤어지자는 뜻도 있지만,
불사신처럼 살아 돌아와서,
“너 그때 나한테 그랬지.
사람은 안 좋을 때 드러난다더라.“
하며 칼을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잘려서 회사를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특이 케이스도 있다.
어떤 임원은, 사장님에게 찍혀서 임원에서 잘렸다.
보통 집에 가는데 이 분 계약직 직원으로라도 회사에 남겠다고 한다.
우리 한국 사회는 정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를 불쌍히 여겨 ‘아직 퇴직 준비가 안되었나’ 하며,
“그러면 1-2 년 직원으로 다니면서 깎인 월급이라도 챙기시라”라고 배려해준다.
뒤늦게 자른 미안함이 들어서인지,
보통 그 임원을 자른 사장도, 어차피 월급쟁이 사장인 경우가 많아, 같은 직장인 마음에서 마지막 배려를 해주는 것 같다.
계약직으로, 나이가 있으니 임금 피크제에 걸려 그나마 받던 직원 월급도 줄어드는데,
(요즘은 임금 피크제가 단어가 길기도 하고 듣기 좀 거북해서 사람들이 ’임피‘ 직원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첨엔 무슨 말인지 몰라서 물어봤음)
“사무실 나오니까 때 되면 밥도 주고, 사람도 만나고, 할 일도 있어서 좋네.
집에서 놀면 뭐하나. 마누라 눈치만 보지.”
나름의 이유와 정신 승리를 비탕으로 다니는 모습이 대단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불편하다.
드러내 놓고 싫어하진 않지만, 보통 보면 많이들 피한다.
그런데, 이 분은 갑질도 덜 하고, 임원 때 챙겨줬던 사람들도 있어서 그런지 같이 밥 먹을 사람은 있는 것 같다.
고생 많으시네. 저러다 집에 가셔서 안 보이시겠지 하고 말았다.
그러다 사장이 바뀌었다.
이 회사를 잘 모르는 낙하산 사장으로.
그때부터 이 분의 행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자꾸 뭔가 만들어서 사장실에 들어갔다.
부르지도 않았을 텐데.
누군지 몰라서 임원 안 시키고,
자꾸 보다 보니 말도 잘 듣고 시키는 것도 잘하네 하다 임원 시킨다는 말이 있었나.
낙하산 사장과 놀아주고 코치해주고 도와주니 예뻐 보였나 보다. 보통 보면 낙하산 사장은 자기도 낙하산이고 잘 몰라서 놀아주고 대우해주면 좋아한다. 그게 두려워 아예 친구들을 데리고 같이 회사에 오는 경우도 있고.
그럴 때 예전에 임원이 되었을 때의 스킬을 구사했으니 좋아했을 것 같다. 입안의 혀처럼 군다고 하나.
다음 해 덜컥 다시 임원이 되었다.
우와, 집에 옛날에 가셔야 할 분이 버티더니 다시 임원이 되다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신기한 일 다음에는, 더 신기한 일이 뒤따른다.
자신을 멸시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칼을 날리고,
힘들 때 조금이나마 자신을 챙겨줬던 사람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준다.
결국 다시 잘리고, 그때는 그냥 집으로 가셨지만, 아무도 그분에게 막 대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러서 이런 말이 있나 보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