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맥주가 없었더라면
대학 시절 맥주는 사치였다.
주머니가 가벼워서 그랬었겠지.
어느 날 소개팅을 해야 했는데 통장에 만 오천 원이 있었다. 친구에게 과외비 받으면 준다고 빌려달랬더니 그 녀석도 만 오천 원 있어서 3만 원 가지고 소개팅에 나갔다.
그날 꽤 괜찮은 친구를 만났는데 어깨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군대 다녀온 후에 바로 복학하지 않고 1년 동안 죽어라 돈을 벌게 된 계기였다. 상당히 오래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이 난다.
대학 때 선배들이 술 사준다고 했을 때 내가 맥주 마시고 싶다고 하면 눈에서 레이저를 쏘았다. 여학생도 아닌데 무슨 맥주냐며 무조건 소주 마시라는 지금 생각하면 희한한 이야기.
의역하자면 술도 많이 마시는 인간이 잘 취하지도 않는 비싼 맥주 마시지 말고 싸고 한두 병만 마셔도 가버리는 도수 높은 소주 마셔라는 이야기였다.
친구와 마실 때도 만원 짜리 오징어 데침에 소주만 마셨으니 다 비슷한 사정이었을 거다.
그때 학교 앞 단골집 아주머니가 제대로 안주도 없이 김치에 술 마시는 게 불쌍해 보였는지 돈 없으면 이거 오천 원에 먹으려면 먹으라고 내준 것이 돼지 껍데기였다.
여자에게 진리라는 ‘피부에 좋다’는 짧고 임팩트 있는 광고로 지금은 꽤나 비싼 음식이 되어 버린 돼지 껍데기가 그때는 버리기는 아깝고 팔기엔 좀 그런 음식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회사에 가니 천국이었다. 회식 때 법카로 맥주를 마실 수 있으니 배가 터질 때까지 마셨다. 냉동 대패 삼겹살만 먹다 1인분에 2-3 배 가격인 두꺼운 냉장 삼겹살을 먹으니 좋다고 배 불리 먹고, 2차에 가서 맥주 원샷으로 세잔 연속 때리다 정말 배가 터질 뻔했다.
그때 맥주에 대한 한을 푼 이후론 그렇게까지 마시지는 않는다. 역시 먹고살만해야 인생이 여유로워진다.
한국 맥주는 외국 맥주에 비해 물을 많이 타고, 유명 연예인 광고를 앞세워 많이 팔아먹으려 한다는 속설이 있다. 조금 그런 것도 같다. 그래서 소맥, 맥주에 소주를 타서 먹기도 한다.
이제 돈 좀 벌었다고 수제 맥주도 마시고, 해외 출장 다니면서 각국의 맥주를 마시면서 한국 맥주 (대표적으로 카스, 맥스)는 잘 마시지 않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단골이 된 동네 맥주 집에서 호스를 깨끗이 관리하고 장사가 잘 되어 재고가 안 쌓인 생맥을 냉동고에 있는 잔에 마시니 참 맛있긴 하다.
그래도 처음 일본 맥주를 마셨던 기억이 난다. 도쿄에 출장을 가서 미팅을 모두 마치고 식사나 하자고 해서 갔더니 각자 상을 하나씩 내와서 신기했다.
우리는 찌개도 그냥 각자 숟가락으로 같이 먹던 시기였는데 문화 차이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우리는 없는 시절 고깃국을 같이 옹기종기 모여서 먹는 역사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코로나 이후엔 덜어 먹는 문화가 많이 확립이 되었지만 아예 일본식처럼 각자 나눠서 나오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말 많이 하고 일 많이 한 다음의 맥주는 얼마나 시원한가.
그런데 이건 질이 달랐다 (quality) 뭔가 물이 덜 들어간 듯하면서도 목 넘김이 부드럽고 끝 맛이 좋은. 회식 때 맥주로 배 터질 뻔 한 이후로 맥주 세 잔 연속 원샷한 것은 그때가 오랜만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맥주의 베이스 (base 기본)을 만드는 비용이 일본 맥주가 한국 맥주보다 비싸다고 한다. 롯데 다니는 지인이 알려준 얘기다.
산토리 같은 것이 대표적으로 베이스가 비싼 맥주이고 롯데에서 만든 클라우드도 국내 맥주 중에서는 가장 베이스가 비싼 맥주를 설명이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일본 맥주 중 내 원픽은 ‘기린 이찌방’이다. 그날 도쿄 회식 때 처음 맛 본 후 반해 버렸다. 한국 생맥주가 500 cc 한잔에 3000원 할 때, 만원을 받았으니 꽤나 비싼데도 마셨다.
맥주를 조금 마셔 본 들은 아시겠지만 한잔에 7천 원 차이면, 둘이서만 마셔도 한국 생맥주로는 2-3 만원에 가볍게 먹을 수 있지만 잔단 만원이면 5-6 만원 이상 나오기도 해서 부담이 있다. 그런데도 마신다.
아사히 생맥주도 맛있다고 하는데, 취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에겐 확실히 기린 이찌방만은 못했다.
돈 대로 간다고 보통 아사히보다 기린 이찌방이 2-3 천원 정도 더 비싸다.
몇 번 기린을 먼저 마시고 아사히를 마셔보고, 아시히를 먼저 마시고 기린을 마셔 본 결과, 기린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맛있는 걸 마시고 조금 떨어지는 걸 마신 느낌이랄까.
나라마다 많은 종류의 맥주가 있다. 남미에도 각국에 맥주가 종류별로 있다. 꽤 괜찮았던 것 같지만 솔직히 기억에 남을 정도의 임팩트는 없었다.
워싱턴이나 런던에서 마신 현지 수제 맥주도 괜찮았다. 보통 우리가 마시는 맥주가 가벼운 느낌이라면 이런 나라에서 수제 맥주는 진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마치 진한 육수 같은 느낌이랄까. 정성이 들어간 것은 알겠으나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주로 내가 좋아하는 맥주가 라거 (lager, 저온숙성)이고 수제 맥주 중에는 에일 (ail, 상온 숙성)의 차이가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특유의 맛 때문에 호가든은 종종 마신다. 호가든 잔도 왠지 매력적이다. 하지만, 1664 블랑은 별로다. 여성들이 좋아하는 과일 향과 라이트함이 나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다.
라거가 좋기 때문에 런던 출장을 갈 때면, city of london에 있는 영국 파트너 회사 앞 맥주 집에서,
현지 친구들이 수제 맥주를 마실 때 계속 한 소리 씩 들으며 벡스를 마신다.
중국 맥주 중에도 하얼빈 맥주와 칭다오 맥주 둘 다 괜찮은데, 양꼬치엔 역시 칭다오가 손이 간다. 독일이 중국 청도에 들어왔을 때 (조차지) 맥주 공장을 만들어 맥주를 물처럼 마신다는 (혹은 물 대신 맥주를 마신다는) 맥주 선진국의 맛이 배어 있어서 더 맛있다.
옥토버페스트라는 맥주 축제까지 있는 나라인데 오죽하겠는가.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맥주는 헤페바이젠이다.
우리가 마시는 맥주는 주로 보리 맥주다. (맥주 ‘맥’ 자가 한자로 ‘보리 맥’ 자이다.) 보리 자체가 가진 서늘한 성격 때문에 시원하게 마시기 좋기도 한 것 같다. 밀 맥주는 옥토버페스트에 가 보았을 때 헤페바이젠을 마시면서 맛을 들였는데 지금도 꾸준히 마시고 있다.
한국에선 가격이 한잔당 만원 이상으로 기린 이찌방보다 더 비싸게 파는데도 한 번씩 마시게 된다. 동네에 이 헤페바이젠을 기가 막히게 들여와서 관리 후 판매하는 곳이 있어서 좋았는데 몇 년 해외 근무를 하고 들어오니 망해버려서 아쉽다. 다행히 회사 근처에 비교적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곳이 건재해서 법카를 쓸 수 있을 때면 애용하고 있다.
내일은 주말이고 비가 온다는데, 더 추워지기 전에 창문 열고 빗소리 들으면서 맥주 한잔할 수 있는 동네 맥주 집에 가서 낮술 한잔 해야겠다.
아, 비 올 때는 막걸리에 파전이지. 막걸리는 다음번 비 오는 날 나의 최애 느린 마을 막걸리를 마시면서 다루겠다.
(사진 출처 : B Disco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