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역사 - 이승만과 김구 (2)

3. 이승만에게 씌어진 잘못된 프레임 (1)

by 철가면

3번 챕터가 길어서 둘로 나누었습니다. 후편은 내일 업로드합니다.


사실 이승만과 김구편은 완성된지 오래였으나 업로드에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두 사람은 글의 내용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정치적 평가로 인해 매우 민감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고민이 깊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작지만 의미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과감하게 연재합니다.


글의 제목처럼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구독과 라이크는 큰 힘이 됩니다. 학술적 비판과 토론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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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승만에게 씌어진 잘못된 프레임


이승만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근거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겠지만, 크게 네 가지 정도 일 것입니다. 다른 부분들을 모두 언급하면 책 한권으로도 부족하거니와, 일반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부분들 위주로 나누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친일파 청산을 해야 했던 반민특위를 해체시킨 사건입니다. 세 번째는 제주 4.3사건이나 여순반란사건, 6.25 전쟁중에 일반 민중을 학살했다는 부분입니다. 마지막이 이승만의 종신통령제를 통과시킨 것도 모자라서 3.15부정선거로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크게 네 가지입니다. 여기서 개헌을 통한 이승만의 종신통령제와 부정선거 논란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이승만과 당시 집권세력의 불찰이자 치명적 한계입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독재부분을 제외한 세 가지를 중점적으로 글을 전개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한국의 발전을 방해하고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급급했던 타락한 독재자이자 정치가였을까요. 필자는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필자가 그 시대를 정확하게 판단한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상황을 조금이나마 정확하게 바라보고자 노력을 한다는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하나씩 살펴봅시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요구한 부분을 파악하기에 앞서 한국 현대사의 전반적 흐름을 파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직후 한반도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항복 직전에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며 전쟁에 개입,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로 진입하여 38선 이북에 주둔했습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더 이상의 확전을 원하지 않던 미국과 소련에 의해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임시로 통치를 하게 됩니다. 1945년 12월에 있었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 한반도의 단일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는데, 유독 신탁통치만이 부각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에 한반도는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여론이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대립이 격화됩니다. 이러던 중 반탁의 입장이던 박헌영이 소련의 지령을 받고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한반도 내 갈등이 극에 달합니다. 1946년 3월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됩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하는 세력에게만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는 소련과 모든 정치세력에게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주자는 미국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까닭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잘못된 프레임이 씌여집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소련의 청을 무시했다는 것이죠. 이로서 미군에게는 점령자 프레임, 소련군은 해방군 프레임이 씌여집니다. 그리고 이런 프레임은 현재에도 유효합니다. 유력한 대권 후보로 평가받고 결국 당선되어 새로운 대통령이 된 이재명 대통령의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발언에서 이런 인식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옳고 그름에 문제가 아닌, 프레임의 문제입니다.


박헌영이 찬탁으로 돌아서게 된 이유가 바로 소련의 주장에 있습니다. 소련은 찬탁운동을 벌이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에게 통일 임시정부에 참여할 권한을 주자고 주장했는데, 이는 소련이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세우기 위한 야욕이었습니다. 비슷한 사례가 이미 동유럽에서 많이 발견되죠. 대표적인 것이 폴란드와 핀란드입니다. 폴란드는 우리나라와 매우 유사한 형태로 공산정권이 들어섭니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폴란드에 공산정부가 수립되는 상황과 모습은 통일정부냐 단독정부냐를 놓고 대립이 격화되고 있던 한반도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만약에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도 현재 공산정권 치하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승만의 업적은 의도적으로 무시당합니다. 통일정부를 구성하려고 했던 수많은 우리민족의 숙원이 짓밟혔다는 프레임으로 말입니다.


이승만의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 주장은 다른 것을 떠나서 아쉬운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 분단된 우리의 현실과도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안을 내면서 분단이 고착화 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 왜곡입니다. 이미 38선 이북에서는 소련의 지시와 김일성을 주축으로 박헌영 등의 위시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토지개혁이 실시되는 등 공산체제를 굳히고 있던 과정이었습니다. 나라만 건국되지 않았을 뿐, 이미 38선 이북에는 소련의 위성국가가 사실상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타이밍에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주장하는 ‘정읍발언’이 나오게 됩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의 핵심은 통일정부를 기대하지만 쉽지 않으니 남한만의 위원회 등을 구성해 세계의 공론으로 공산정권을 몰아내자 입니다. 여기서 흔히들 하는 생각이 이승만이 대통령을 할 욕심과 권력을 가지고 싶은 욕심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구성하려 했다입니다. 권력욕의 화신으로 보이기 충분한 생각이고,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풍기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이는 이승만의 정읍발언의 핵심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승만은 시종일관 반탁운동을 전개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앞서 이야기한 폴란드의 예를 간단하게나마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폴란드는 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소련의 전신 러시아와는 적대적 관계에 있었습니다. 스탈린 입장에서는 이런 적대적 관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은 소련을 서방의 자유 민주주의라는 사상의 위협으로부터 막아줄 방파제의 역할로 폴란드를 택한 것이죠. 그리고 스탈린은 폴란드 내에서의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냉전의 종식 이후 발표된 NKVD의 비밀 보고에 계획에 의해 1947년 벌어진 총선이 부정선거 조작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작된 선거를 통해 좌익 세력들이 정권을 잡았고 그들은 장악한 권력을 통해 모든 우익 정당을 불법화 했습니다. 그 이후는 자연스럽게 폴란드라는 나라 자체가 공산화 되었던 것입니다.


폴란드와 똑같은 과정이 한반도에서 그대로 재현될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었습니다. 폴란드는 결국 소련국의 위성국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소련의 주장과 함께 UN이 권고하기도 했던 순차적 선거를 통해서는 공산당에게 노려질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총선거를 주장한 이는 이승만 뿐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시종일관 UN에서 제시한 순차적 선거를 거부하고 한번의 총선거를 주장했습니다. 제주 4.3 사건에서 남로당의 핵심 인물들이 선거위원회를 습격하고 결국 제주도가 이 사건의 여파로 총선거 실시가 무산된 것을 보았을 때, 국제 정세를 통한 현실을 제대로 자각하고 있는 정치인은 이승만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들은 이후 베트남에서 정확하게 재현됩니다.


김구는 통일정부 구성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안고 북으로 가 남북협상을 벌였으나 이승만에 의해 거절당했다는 악랄한 프레임까지 씌이며 과대평가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통일정부를 반대한 독재자라는 프레임이 씌워집니다. 교묘하고, 악랄합니다. 사실을 뒤틀어 편집한 것입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의 시도자체를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미 때는 많이 늦었습니다. 그리고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협상을 통해 얻은 것이라고는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현실 파악뿐이며, 결국 김일성의 대외선전용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거기에 김구는 해방이후 단독정부 수립까지 오락가락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입니다. 귀국 후 송진우에게 정치자금을 받고 거부하였으나 이내 받아들였고, 이승만과 친밀하게 지내는 듯 했으나, 이내 결별하였으며, 백의사라는 김구 추종단체를 이용하여 국내외 정치 인사들에 대한 테러 및 암살 기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김구가 해방 이후 암살 활동을 벌였던 것은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에 대한 과도한 비난만이 난무하죠. 김구도 안두희와 다를바 없는 암살기도를 주도했는데도 말입니다. 역사의 양면성이자, 상대성입니다.


또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구성하자는 이승만의 정읍발언에 김구가 즉각 반발한 것도 아닙니다. 우익 세력 결탁의 차원에서 침묵, 또는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장덕수 암살을 기점으로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된 이후부터는 적극적으로 이승만의 단독정부 노선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단독정부 구성이든, 통일정부 구성이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공산주의에 맞서 남한만의 자유정부를 수립하고, 그 이후 소련과 북한 괴뢰 정부를 몰아내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 이승만 정읍발언의 핵심 골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승만의 주장은 이후에도 지속됩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주장합니다. 1.4후퇴 이후 다시 서울을 수복한 이후 북진을 하려는 시도가 없었을때에도 이승만은 대한민국 단독으로 북진을 하겠다고 하고, 때로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는 등의 돌발 행동으로 미국을 당황시킵니다. 이런 이가 과연 미국의 꼭두각시이며 권력욕의 화신인것일까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이왕 일어난 전쟁으로 완전한 통일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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