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착각
늦은 저녁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린다.
'누구지, 이 시간에?'
화면에 뜨는 번호는 그녀였다. 지난주에 만나기로 한 약속이 불발되고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 했는데, 직접 전화를?
"네, 누나. 안녕하세요?"
아무렇지 않은 척 전화를 받았다.
"어, 난 줄 어떻게 알았어?"
그녀는 내가 아무렇지 않은 것에 당황한 듯했다. 내가 전화를 받고 몹시 쑥스러워하거나 기뻐하기를 바랐던 눈치였다. 난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남자다. 보통 남자들보다 훨씬 섬세하고 예민하지만 그렇다는 티를 안 낼 뿐. 죄송하지만 그쪽 생각이 저는 다 보이거든요?
그녀의 용건은 '밥 한번 먹자. 누나가 사줄게'였다. 굳이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난 귀국하고부터 그녀가 있는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귀국했다고 하니까 집안이 꽤나 유복해서 유학이라도 다녀온 것 같지만, 해외에 가자마자 수중에 있는 돈을 다 사기당하고 운 좋게 착한 한인들을 만나 악착같이 2년간 버티다가 고국이 그리워 돌아왔다는 게 팩트다. 가족들은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지만, 2년 동안 영어도 딱히 늘지 않았고 나이는 20대 후반에 접어들어서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또래들이 있는 모임에 찾아가 적응하고 있는 중이었다.
외국에서 고생을 하고 돌아와서 그런가? 또래들이 하는 고민이 시시하게 들렸다. 별거 아닌 것으로 한숨을 푹푹 쉬고, 세상을 다 잃은 듯 앓는 소리를 하는 게 우스웠다. 후배들이야 그렇다 쳐도 선배들도 별 다를 건 없었다. 그나마 모임에 나오는 친구들이 대부분 이쁘장하고 친절해서 나가는 재미는 있었다.
그해 가을, 모임 멤버의 결혼식이 있었다. 거기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다 같이 축가로 하기로 하고, 누군가가 축가 연습을 시켰다. 그러고 나서 축가 가사를 다 외워왔으면 한다고 해서 코웃음을 치며 "바람은 죄가 될 텐데..."라는 멘트를 날렸었다.
결혼식에는 외국생활하면서 장만했던 정장을 입고, 귀국해서 구입한 스니커즈를 신고 갔다. 딱히 신을만한 구두가 없어서였는데, 다행히 멤버들이 괜찮다고 얘기해 줬다.
얼마 후, 모임에서 친해진 J누나랑 얘기하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위아래로 흘낏거리는 게 느껴졌다. 여태껏 그 모임에서 그런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어 적잖이 신경 쓰였다. '나한테 관심 있나 부지 뭐.' 난 보란 듯이 J 누나와 더 친하게 얘기했다. '본인이 아쉬우면 와서 말 걸겠지.' 그때 처음 본 그녀는 뭔가 도도해 보이는 느낌이 별로였다.
그리고 곧 생일파티가 있었다. 매달 멤버들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는데, 그녀가 앞으로 불려 나갔다.
그녀는 생일 초를 몇 개 꽂겠냐는 말에
"저는 아직 철이 덜 들었으니 15개만 꽂을게요." 라며 활짝 웃었다.
나도 모르게 옆에 있던 친구에게
"저 사람 누구야? 예쁘네."
라고 했고 친구는 대답했다.
"저 사람 너보다 3살이나 많아."
모임에 있는 친구 중에 그녀와 친하다는 여자 동기가 있었다. 그녀에 대해 물어보았다. 중국어 전공에 현재는 고등학교에서 과학실험실 조교를 맡고 있고 등등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떤 사람에 대해 궁금한 게 생기면 그것을 파 들어가는 내 성향 탓에 그녀에 대한 호구조사가 되어 버렸다. 여자 동기는 내가 그녀에 대해 대해 꽤 진지하게 관심이 있다고 오해를 했고, 중간에서 다리를 놔주겠다고 했다. 그래놓고 본인이 사정이 생겨 약속이 불발되었다. 난 엄청나게 아쉽진 않았다. 어차피 나보다 나이도 많고... 세 보이고...
그런데, 그녀가 직접 전화를 한 것이다.
봄이 시작되는 4월의 금요일 저녁, 우리는 쌀국수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그날 그녀는 운동 후에 화장도 지우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왔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난 그녀에게 사소하고도 섬세한 질문을 던졌고, 그녀는 그전에 누구에게도 그런 식의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며 웃었다. 질문 후에는 내 얘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굉장히 잘 들어주었다.
우린 쌀국수를 다 먹은 후,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날이 어둑해져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때도 난 그녀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집까지 걸어서 데려다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신기하게도 우리가 만나기 얼마 전에 '남자는 자신이 정말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났을 때 집까지 데려다준다.'라는 내용의 글을 읽었던 터라 아주 기분 좋게 승낙했다. 난 그냥 얘기하는 게 재밌어서 데려다주겠다고 한 건데...
그날 이후로 일주일간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통화를 하면서 나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모임에서 하지 못했던 외국생활을 이야기하면서는 창피하게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녀에게 사귀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