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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살 Oct 31. 2024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그녀의 기억

정신 차려보니 10월이다. 그것도 마지막날. 10월이 얼마나 멋진 달이면 노래까지 있을까? 물론 이 노래를 떠올리니 닭살스러운 그때가 생각나서 굳이 소환하고 싶지는 않지만. 운 좋게도 잠시 나가서 걸을만한 여유가 허락되었고, 떨어져 있는 낙엽들이 몹시 아름다웠고, 집에서 나설 때만 해도 추워서 따뜻한 차가 간절했는데 삼십 분 이상을 걷고 나니 몸이 데워지면서 더 이상 춥지 않은 개운함까지 다 만족스러웠기에 그날의 쑥스러움도 참아줄 만한 너그러움이 생겼달까? 

 



우린 언제 처음 만났는지 서로 다르게 기억한다. 첫눈에 반하는 순간 같은 건 없었고 그냥 엇갈리고 엇갈리다가 '그 사람이 이 사람이었어? 희한하네' 하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의 결혼식. 그때는 친구들끼리 우르르 몰려서 축가를 해주는 분위기였다. 그 결혼식은 10월이었고 자연스레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축가가 되었고, 피아노를 조금 칠 줄 아는 나에게 연습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축가연습실에는 모르는 남정네들이 많았고, 나도 한창 운명의 상대를 찾고 있을 때라 '혹시라도 괜찮은 사람이 있나' 기대하면서 연습실에 들어갔다. 시끌벅적하고 집중도 안 되는 상황에서 연습을 마치면서 당부했다. "기왕이면 가사를 다 외워오셨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저 뒤에서 답변이 왔다. "바램은 죄가 될 텐데요?!"라고. '나름 위트 있는 대답이네.' 생각했으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웅성웅성하는 소리에 묻혀서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출처 Pinterest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악보 일부  


결혼식 당일, 다들 정장에 구두를 신고 비슷비슷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왜 남자들은 다들 정장에 구두를 신을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힘 준 스타일 정말 별로야. 스니커즈를 신으면 자연스럽고 멋질 텐데...' 그날따라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계속 혼자서 툴툴대고 있는데 갑자기 정장에 스니커즈를 신은 사람이 진짜로 나타났다. '뭐지? 저 사람 누구야?'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을 제대로 못 봤다. 아는 사람도 아닌데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도, 뒤에서 옆에서 힐끔힐끔 보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도대체 누구지?  혼자서 이리저리 레이더망을 굴려봐도 이상하리만치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출처 Pinterest 스니커즈. 



결혼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도록 신데렐라를 찾는 왕자의 심정이 되었다. 신발만 가지고 사람을 찾으려니 그럴 수 밖에... 그런데, 우연히 신발 주인과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사실 재회라기보다는 내쪽에서 그가 누군지를 알게 됐다는 것이 맞다. 예정된 모임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그가 나타난 것이다. 그 신발을 신고... 난 관심이 없는 척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인들이 그에 대해 하는 얘기를 수집했다. 


"나이는 나보다 3살 아래, 잠깐 외국에서 공부하다가 국내에 들어온 지 얼만 안된 뉴페이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듬직한 데다 유머감각까지 있다" 


포인트는 연하라는 것, 어른스럽다는 것. 오케이~접수! 내가 접수한다고 다 사귈 수 있는 능력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의 관심은 끌어보자는 목적이 생겼다. 당시 내 나이 30세. 내 나이가 많으니 동갑 아니면 연하와만 만나겠다는 선언(주변에서 다 비웃음)을 했고, 대신 연하가 너무 어리광스러운 스타일이 아니라 듬직한 스타일이면 좋겠다는 다음 조건까지 만족한 데다 꿈에 그리던 스니커즈 남이니 혹시 운명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관심 없는 척하면서 그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그는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출처 Pinterest



매년 생일이면 "생일선물 주세요"라는 기도를 했다. 그해에도 그랬다. 모임의 멤버들이 왕창 모여서 형식적으로 열어준 생일파티, 그런데 그날 그가 옆에 있는 친구에게 "저 사람 누구야? 예쁘다!"라는 멘트를 했다. 그는 그동안 나라는 존재가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물론, 친구의 "너보다 3살이나 나이 많아."라는 얘기에 바로 관심을 접었단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사귀게 되고 결혼까지 해서 15년간이나 아웅다웅 같이 살았을까?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연습할 때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의 주인공도 알고 보니 지금의 남편이었으니, 생각하면 신기한 인연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마치 내가 혼자 짝사랑한 것 같지만 이건 내 입장이고, 그의 입장은 또 달랐다(달라야만 한다^^;;;). 그의 입장은 다음 편에 써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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