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하지 마세요. 신랑 얘기예요.
결혼하고 15년 동안 우리 사이에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이 사람은 계속해서 말이 많다는 것이다. 주제는 그때그때 달랐는데, 그래도 가장 재밌어하는 건 인상깊게 봤던 영화나 드라마, 책에 대한 얘기다. 한때 배우의 꿈을 가졌던 예술가 기질의 사람이 매일 출근해서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으니 답답하고 숨이 막힐텐데 그걸 매체를 통해서라도 일부 풀어내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안쓰럽다.
그래서 하는 얘기들을 열심히 들어주고 있다. 자기가 추천한 드라마나 책을 내가 보기라도 하면
"봐, 진짜 재밌지?"
그러면서 엄청 뿌듯해하니 좋다는 리액션을 넘어 잠잘 시간을 쪼개어 드라마 몰아보기도 하는
애청자가 되어가고 있다.
한달에 한두번은 혼자 극장 나들이, 넷플릿스와 디즈니를 넘나들며 이런저런 영상으로 스트레스를 풀다가 가끔 밤새서 게임도 하고 헬스장가서 땀도 흘리며 참 모범적인 중년남자로 살고 있는 듯 했는데....
어느날 기분이 이상하다며 우울증인 것 같다고 했다. 뭘해도 재미가 없단다. 겨울을 막 지나고 봄이 오고 있었다.
솔직히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진 않았다. 갑자기 왠 우울증? 그러면서도 '진짜 그렇다면 큰일났는데' 싶어서 걱정도 되고, 쨘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우리집 사정상 일을 잠깐 쉬라던가 하는 카드를 내밀 수도 없었다. 새순이 돋아나는 때 우울이 시작되었는데 어느새 푸른 잎들이 활력을 뽐내는 여름이 되었다.
어느날, 동네 도서관에서 주말에 하는 글쓰기 강의를 발견했다. 그걸 그에게 쓱 내밀었다.
"자기, 글쓰기 한번 해보면 어때? 이거 주말에 하는 강의라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글쓰기를? 잘 할 수 있을까?"
그의 주저하는 목소리 너머로 설레는 듯한 눈빛이 반짝 보였다.
"고민하지 말고 그냥 해봐. 이거 빨리 신청 안 하면 마감된다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강의가 맞을지도 알 수 없었지만 잠깐 반짝인 그의 눈빛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첫 강의 날, 그가 방에서 줌수업에 참여하는 내내 나는 거실에서 숨을 죽였다.
그는 첫 강의를 듣고나서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개구쟁이의 눈빛이 되었다가, 숙제를 한다며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3-4시간을 꼼짝앉고 뭔가를 쓰더니 날 불렀다. 여름의 한밤중에 딱 어울리는 '자기가 겪은 귀신'에 대한 얘기였다.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모르게 애매했지만 나름 신선했다.
"와, 자기야. 재밌다. 그럼 한국에 있을 때 봤던 귀신이 외국까지 따라간 거야? 근데 그게 같은 귀신인지 어떻게 알았어? 안 무서웠어? 혹시 지금은 안 나와? 우리집에도 있는 건 아니지? 뭐? 저번에 본 것 같다고? 묘사도 좋고 실감나네. 좋아."
엄지척 대여섯번에 궁둥이 팡팡,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면서 칭찬세례를 퍼부은 다음에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걸 다음 강의때 발표했더니, 다들 좋은 반응을 보여줬다며 신나했다.
'그 강사님도 그렇고, 같이 들으시는 분들도 그렇고 다들 천사네.' 난 마음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한번 글을 쓰기 시작하더니 강의가 진행되는 두달동안 매 주말마다 식탁에 앉아 숙제를 했다. 길가의 낙엽이 바스락거릴 때쯤 그의 마지막 글은 빨간 단풍보다 더 붉고 강렬해졌다.
그렇게 그는 우울을 넘었다. 물론 강의가 끝나고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일이 바빠졌고, 아이들과도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
그후로 글쓰기 강의는 좀처럼 주말에 열리지 않아 그는 평일 저녁에 시간이 되는 사람들을 위한 독서 모임에도 참석해보고 혼자 글을 써보기도 했다. 그가 선호하는 장르는 소설인데 전체 플롯을 짜고 한 장면 한 장면을 묘사하는데 꽤 시간이 걸린다. 2-3시간에 걸쳐 A4 반페이지를 완성하는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선명한 이미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듯 하다.
"자기야, 글 계속 써봐. 끝까지 완성해서 신춘문예에 한번 도전해봐."
난 계속 그를 펌프질하며 칭찬한다.
'말 많은 중년남자에게 글을 쓰는 것 만큼 실컷 떠들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
라고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자기 소설은 찐이야. "라는 사기를 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