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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살 Oct 17. 2024

김셰프의 탄생

라면에서 김치까지


'흑백요리사'라는 예능을 보며 감탄한 포인트는 '섬세함'이었다. 요리사야말로 요모조모 섬세해야 하는구나. 혀에서 맛을 느끼는 기능이 오로지 '진짜 맛없다'와 '맛있다'의 두 가지 만을 구분할 수 있는 세상 둔한 나 같은 혀만 있는 줄 알았는데, 과학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달고 짜고 쓰고 맵고신 것을 구분하고 정확한 간을 맞춘다?... 기타튜닝하듯이. 그럼 도대체 맛의 스펙트럼은 얼마나 넓고 세세하다는 건지... 감도 안 잡힌다. 



"우리 저녁에 알리오올레오 만들어먹을까?"

흑백요리사를 보느라 주말 저녁 메뉴는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멍해져 있는데 너무나 반가운 남편의 한마디!

"그렇지, 우리 집에도 요리사가 계신데 깜박했네. '김셰프'님의 알리오올레오는 최고!"

"재료는 뭐뭐 있어? 스파게티면은 저번에 내가 사다 놓은 거 있고, 새우랑 조개 넣고 하면 되겠다. 오케이."

   



남편의 요리를 먹을 수 있는 때는 주말이다. 평일에는 집에서 일을 하는 내가 요리를 하고 남편은 회사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주말이 되면 거의 방전상태가 되어 요리고 뭐고 멍해져있다 보니 남편이 요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라면을 이용한 요리가 주를 이뤘다. 해물라면, 김치라면, 투움바파스타라면, 짜파구리, 라볶이 등등 한껏 진화를 하다가 조금 질리면 다시 원래의 깔끔한 라면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라면값이 조금 더 싸다는 이유로 차로 30분 걸리는 거리를 장을 보러 가기도 하면서 라면의 질주는 계속되었다. 


'비상사태발생'

라면의 질주를 위해서는 차의 기름처럼 꼭 필요한 게 있는데 그게 우리 집에서는 "김치"였다. 지난 김장 때 시어머니께서 주신 김치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김장김치를 기다리기엔 너무 이른 2월이었다. 

"김치를 주문해야겠네." 난 태평하게 반응했다. 

"아니야, 이번 기회에 김치를 담가보자." 김셰프는 결연했다. 


마침 3.1절 연휴가 있어서 그 주말을 김장하는 날로 잡았다. 첫날 아침, 장보기 위해 준비물을 체크했다. '김치를 하려면 배추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배춧값이 2만 원 안팎이니 5만 원 정도면 6개를 사고 포기로 자르면 24 포기는 나오겠네? 쿠팡에서 주문한 김치통도 도착한 상태니 준비는 다 된 거 아닌가?' 혼자 배추 생각만 하면서 여유롭게 있는데 "장 보러 갑시다" 김셰프가 이야기한다.


"내가 유튜브를 찾아봤는데, 김치를 하려면 배추 외에 필요한 재료가 많더라고. 일단 소금, 고춧가루, 얼갈이, 새우젓 등등." 장 보러 가서 산 품목은 배추를 제외하고 20만 원 가까이 되었다. 우리 집엔 김치를 버무릴만한 큰 대야도 물을 뺄만한 채반도 없었던 것이다. 


난 절인 배추를 사면 어떠냐고 했지만 "김치는 절이는 것부터 제대로 해보고 싶다."라고 해서 직접 절이기로 했다. 먼저 배추를 4 포기로 자르고 소금으로 샤워시켜 소금물에 담갔다. 하루종일 뒤집기를 반복해서 물을 뺀 배추는 엄청 짰다. 소금의 양을 잘못 계산한 거였다. 


소금범벅으로 배추 절이기


배추의 양념을 만드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다져진 생강은 곰팡이가 피어 있어 먼 거리를 바꾸러 다녀와야 했고(나중에 알고 보니 생강은 한두 알만 있어도 되어서 다음부터는 덩어리를 사서 빻기로 했다), 찹쌀 풀을 쒀서 만든 속은 양이 너무 많아서 김치를 다 버무리고 나서 깍두기, 파김치까지 만들고도 남았다. 


   

김치 24 포기에 넣기엔 너무 많았던 김칫속


열심히 김칫속을 넣고 완성된 김치를 먹어본 남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김치는 엄청나게 짰다. 

"큰일 났네. 이걸 어떻게 먹지?"

"일단 익혀보자, 괜찮을 지도 모르잖아?"

고생한 남편에게 용기를 줘야 할 것 같아서 긍정적으로 얘기해 봤지만, 남편의 표정을 보니 김치 걱정에 잠도 못 잘 것 같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남편은 다행히도 유튜브에서 짠 김치를 살리는 방법을 찾았다. 무를 잘라서 김치 사이사이에 넣는 방법이었다. 그 덕분에 짠 김치는 서서히 삼삼하게 변했다. 날이 갈수록 김치는 맛있게 익어갔고 어느새 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사이사이에 무가 들어가서 소생한 김치


김치를 담근 이후로 남편은 '김셰프'로 불리게 되었다. 

"그래, 김치정도는 담아봐야 셰프라고 할 수 있지! 당신 대단하다!!!"


김치를 얻어먹기 위해 내가 그저 영혼 없이 '말로 때우는' 칭찬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남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면 사람 뼛속부터 '김셰프'였다 싶다. 기왕 칭찬하는 거 앞으로는 엉덩이도 토닥여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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