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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의 브런치 카페

더리얼

by 엄살

집에서 10분가량 걸어가면 '고인돌 공원'이 나오고, 그곳을 쭉 통과하면 산길로 이어진다. 그 산은 우리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넘어가는데, 그 다른 동네가 이사오기 전에 살았던 곳이라 산을 넘어갔다 오는 것만으로도 몇 년 전 추억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산길을 쭉 오르면 제법 땀도 나고 운동도 된다 싶은 산 중심에 작은 마을이 나오고, 그 옆에 반가운 카페 '더리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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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가자."

이곳에 다녀오려면 적어도 3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 가는데 빠른 걸음으로 30분, 앉아서 식사하고 이야기하는데 두 시간, 돌아오는데 30분. 보통의 브런치 카페에 차를 타고 이동해 먹고 이야기하다가 차를 타고 돌아오는 코스와는 차별화되는 '건강 브런치 코스'가 아닐까. 편한 복장에 운동화를 신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산길을 올라가는 건 한여름과 한겨울만 피하면 사계절 즐거운 일이다.


주변의 숱한 아줌마들의 멋진 성공담에 눌려 명함도 못 내밀던 내가 집에서 열심히 홈트 하면서 나를 돌보게 됐다는 소재로 글을 써서 투고한 것이 편집자의 눈에 들어, 10명의 작가들이 함께 책을 내는 것에 숟가락을 얹은 게 생애 첫 책인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이다. 초보작가이자 글을 쓴다는 자부심에 바람이 잔뜩 들었던 과거의 나는 그 책이 나오는 순간 어디 멋진 데서 사인회를 하는 상상에 발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그 시점에 집안사정 때문에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고민할 때 '더리얼'에서 밥을 사주던 고마운 지인은 첫 책은 사줘야 한다며 5권을 주문하더니 봉투에 현금을 담아 주었다. 앞으로 작가로 살려면 밥도 잘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라는 격려에 눈물이 핑 돌았다. 책에 등장하는 나의 힐링푸드인 떡볶이를 기억하고 '국물떡볶이'를 주문해 주어서 매콤하고 달콤한 맛에 위로를 받았다.





방학 때면 아이들을 데리고 2-3번 정도 큰맘 먹고 외식을 하는데, 이곳이 딱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에만 있던 아이들 운동도 시킬 수 있고, 산길이라 좋은 공기도 마시게 하고, 식사 메뉴도 호불호 없고, 카페 내부에 만화책도 꽤 있어서 오랜 시간 놀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아이들은 갈 때는 조금 힘들어했지만 도착해서는 메뉴를 고르는 순간부터 신나 했다. 함박스테이크를 고르는 막내와 파스타파인 첫째와 둘째 모두 식사를 만족스럽게 끝내는가 싶더니 만화책을 가져와서 읽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진 첫째가 자신의 용돈으로 음료수를 사주겠단다. 달달한 초코와 우유에 얼음이 들어간 음료를 실컷 마신 꼬맹이들은 만화책을 거의 다 보고는 산길을 되돌아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화장실이 급하다고 아우성이었다. 공원길로 들어섰는데 새로 만든 화장실이 보여 뛰어갔더니 아직 공사 중이었다. 집까지 가려면 10분 이상 걸어가야 하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소리에 바로 앞에 보이는 아파트 상가로 뛰어갔지만 거기도 잠겨 있었다. '조금만 참아봐.' 둘째와 셋째가 졸업한 시립 어린이집과 같은 단지에 경로당이 있었다. 어린이집 다닐 때 거기로 인사하러 많이 갔었다고 하길래 급한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르신들께서 무슨 일인가 나오시길래 아이들이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니 빙긋 웃으며 안쪽으로 안내해 주셨다. 아이들은 소변을 해결하고 나서야 웃음기가 돌아왔다. 화장실 찾으러 헤맨 것이 너무 힘들다 못해 체기까지 올라온 난 '브런치 먹으러 갔다가 마무리가 왠 날벼락'이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그 후로 아이들에게 '리얼'에 함께 가자는 말을 아끼고 있다.



그곳을 처음에 소개해 준 또 다른 지인과는 그 후로 그곳으로 브런치를 먹으러 가지는 못했지만, 다이어트 마지막날 같이 산에 오른 기억이 떠오른다. '도전'하는 다이어트여서 시작할 때 적어놓은 기록에 도달해야 하는데 마지막날 살짝 불안하다며 갑자기 산에 가자는 연락이 왔다. 기대하지 않았던 나의 동행에 고마웠는지 그동안 힘들었던 얘기를 조금씩 들을 수 있어서 내심 반가웠다. 첫사랑이 무섭다고 '리얼'에 가면 날 처음 데려간 그 지인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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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리얼의 영업시간은 10:30-18:00라서 밤 풍경을 보기는 좀 어렵다. 산속을 걷는 것도 밤에는 위험해서 내키지 않는다. 영업시간을 생각하면 내가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은 정도로 매력적이다. 저녁 6시에 문 닫는 카페. 내가 아는 한 가장 일찍 문 닫는 곳인 듯하다. 글을 쓰면서도 달력을 힐끔거리며 3시간을 뺄 수 있는 날이 언제인가를 찾고 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산속의 브런치카페가 있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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