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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파트의 뒤통수

7000보 채우기

by 엄살

매일 걸어 다니지만, '마음먹고 걷기'를 선택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전날부터 설렌다.


이번에 나가는 이유는 단순했다.

중1 신입생인 둘째의 하복 체육복 찾으러 가기.

집에서 걸어서 20-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라서 평소 같으면 자전거를 이용했을 테지만

요즘은 웬만하면 걷다가 힘들면 차라리 버스를 이용하는 쪽으로 취향이 바뀌었다.

(내 취향은 매우 갈대 같아서 한 계절을 못 넘기고 바뀔 확률이 높다)


내 취향만큼이나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맞춰 옷을 입으려니 가장 만만한 게 후드집업이다.

운동화에도 무난히 어울리니 얇은 티 위에 걸치고 한결 편안해진 채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난 엄청난 길치다.

한번 갔던 길은 '안갯속 실루엣' 정도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길을 확실히 알려면 최소한 3번은 내 발로 직접 가봐야 한다. 버스를 타거나 누가 운전해서 데려가면 대체로 아무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뇌 속의 회로 중 길을 아는 어떤 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나 싶다.

그 와중에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넘쳐나니 언제나 발과 다리가 고생이다. 하체가 발달되어 있어서 다행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프리모 학생복'

우리 아파트에서 출발해 큰 도로를 건너 '교하'라는 다른 지역으로 건너가야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로를 건너 맞닥뜨리는 길은 아파트를 짓고 있어 높이 쳐진 가림막이었다. 길은 길인데 차도 바로 옆이라 운치는 전혀 없고 먼지 풀풀 날리는 그냥 길이라서 다니는 길.

그새 아파트가 완공되었고, 분양까지 된 모양이다. 새로운 정류장에 새로운 길까지 생겼다. 심지어 그 중간 길은 요즘 가장 애정하는 'Gtx운정역'으로 통한다. 괜히 뿌듯한 표정이 되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힘차게 전진한다. 까딱하다가는 예약시간에 교복점에 못 도착할 듯하다.


'프리모학생복'에 처음 가봤냐 하면 당연히 '아니다'. 우리 집 신입생이 입을 동복 체육복을 찾으러 갔었으니까. 그땐 겨울이라 추워서 버스를 탔고, 내려서 찾아갔기에 오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한 손으로는 네이버 지도앱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헤매면 안 된다'를 다짐하며 열심히 팔을 휘젓는다. 작은 샛길에서 나랑 비슷한 후드집업을 입은 사람들을 연속으로 마주쳤다. 역시 이 날씨엔 후드집업이 답이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들이랑 비슷한 옷을 입었다고 속으로 환호하며 빠르게 걸음을 재촉한다.


다행히 안 헤매고 예약 시간에 도착했다. 지난번에는 체육복 사이즈를 고민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오늘은 지난번 사이즈대로 받아오면 되어서 도착하자마자 10분 만에 받아서 돌아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긴장이 풀어진다. 왔던 길을 돌아가면 되니 헤맬 걱정도 없다.(심한 길치라 항상 그런 건 아니고, 오늘은 그저 직진하다가 한 번만 꺾으면 되는 별 하나 정도의 난이도라서 그렇다) '교하'를 지나 '운정'으로 들어서는 큰 도로 앞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요즘 새로 다운로드한 만보기 앱에 4000보 정도가 찍혀있었다.

'에게, 이거밖에 안 걸었다고?' 만보기는 걸은 만큼의 리워드를 주는데 최대치가 7000보이다. 기왕 걸으려고 마음먹은 거 7000보는 만들고 들어가고 싶어졌다. 왔던 길 그대로 가면 5000-6000보가 될 것 같아 다른 길로 돌아가는 위험한(?) 선택을 했다. 우리 아파트 정문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뒤로 돌아서 후문으로 들어가 보기. 실제로 이 길로 가는 건 처음이라 가슴이 콩닥거렸다.


길을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틀었다. 우리 아파트 바로 옆단지의 뒤통수를 오른쪽에 두고 힐끗거리며 걷는다. 야트막한 작은 나무로 둘레가 쳐 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넘어 들어가겠다 싶다. 단지도 넓고 평수도 넓어서 이 단지를 벗어나는 데만 해도 한참 걸렸다. 갑자기 웬 컨테이너 건물이 하나 등장하더니 연두색 높은 철조망이 등장했다. 우리 아파트와 옆단지 사이에 항상 물이 고여있던 자리에 물이 다 빠지고 구석에서 오리들이 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어대지만 연두색 철조망 사이로 보이는 오리들은 흐리멍덩하게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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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걸음을 재촉한다. 드디어 우리 아파트가 등장했으나 너무 높이 있어서 마치 성벽 위의 아파트 같다. 옆 아파트는 영국 정원 느낌이었는데 말이다. 올려다보기엔 목이 너무 꺾여서 포기하고 다시 앞을 보고 걷는다. '뒤통수 쪽으로 길이 나 준다면 이 길로 쭉 올라가면 바로 우리 동인데...' 오늘은 7000보를 걸을 예정이라 길이 안 나 있는 게 심히 아쉽진 않았다.


걷다 보니 오른쪽으로 꺾어서 우리 아파트의 옆통수를 오른쪽에 두었다. 여긴 아예 높은 흙더미가 쌓여있어서 더 볼품없다. 맞은편에 '투썸플레이스'가 보였지만 큰 도로를 건너서 다녀올 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는 없다며 빠르게 포기했다. 흙더미를 옆에 둔 재미없는 길을 가다 보니 후문이 나왔다. 아직도 7000보에 조금 못 미친다. 최대한 가는 데까지 가보고 집에 들어가 나머지는 앞치마를 두른 채 걸음수를 채워보기로 했다. (집안에서 걸음수를 채우는 게 불편해서 그동안 그렇게 고사하던 워치가 갖고 싶다고 남편과 통화하며 슬쩍 찔러 넣었다^^;) 노력의 결과 7000보는 채워졌고, 아주 만족스럽게 오늘의 최대 포인트를 획득했다.


만보기 덕분에 시도했던 새로운 길은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아파트의 뒤통수를 보는 건 내 머릿속 지도 한 부분을 깔끔하게 보수한 듯해서일까. 오리들이 잘 지내는지, 물은 얼마나 늘었는지도 궁금해서 한 번씩 그 길을 찾을 거 같다.


걷고 나면 느껴지는 상쾌함. 후드집업이 슬슬 더워지는 날씨. 여러모로 걷기 좋은 계절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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