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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을 즐기는 법

자발적 대중교통 이용자입니다

by 엄살

금요일 밤에 집에 돌아온 남편이 재밌는 제안을 했다.

본인이 지금 있는 회사 앞 숙소의 위치가 서울근교 문정동이니 중3 딸을 방학 때 일주일 간 데리고 있으면서 색다른 경험을 시켜주고 싶단다.

낮에 본인이 회사에 출근해 있는 동안 딸은 숙소에서 공부하고 놀고 식사는 전날 준비해 놓거나 밖에 나가서 사 먹도록 카드를 주고, 저녁에 퇴근해서는 근처의 롯데타워로 영화를 보러 가거나 대학교에 연극을 보러 가도 좋고 석촌호수까지 산책도 하고 맛있는 식당에 가서 저녁도 사 먹이고 박물관이랑 미술관도 가고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계획이었다.


"그거 괜찮다. 이녀석 워낙 혼자 있는 거 좋아하니까 낮시간에 동생들 방해 안 받고 있다가 저녁에 아빠랑 데이트하면 진짜 좋겠네."

"그렇지? 좋아할 것 같지?"


남편과 나는 신나서 이야기하며 늦게까지 와인 반 병을 비우고는 잠이 들었다.


다음날, 주말아침의 주메뉴인 라면을 거하게 끓여 아이들과 식탁에 앉은 남편은 간밤에 이야기한 멋진 계획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어? 그런데 딸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일단 집을 떠나는 게 마뜩잖고, 아빠의 좁은 숙소에서 같이 있는 게 불편할 것 같으며, 여름방학중 한주는 가족여행을 떠나고 한주를 아빠의 숙소에서 보내기엔 3주가 너무 짧다는 등의 이유였다.

자신의 훌륭한(?) 계획에 꽂힌 남편은 딸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어떻게든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쓴다. 나도 옆에서 장단을 맞추며 아빠에게 가있는 한 주 동안 읽을 책을 도서관에 가서 왕창 빌리고, 사고 싶은 책은 미리 사주고, 서울에서 가장 큰 서점인 교보문고도 가볼 수 있다며 여러 가지 미끼를 던져본다.


사실, 딸의 표정에서 감지했다. 이 녀석은 우리가 세웠던 주계획인 밤에 아빠와의 데이트이자 서울 구경에 크게 관심이 없구나. 최고급영화관, 대학로 연극, 석촌호수, 럭셔리한 저녁식사는 중학생이 원하는 게 아니라 실은 남편과 나의 취향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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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됐어. 안 가도 돼."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노'라는 걸 우회적으로 이야기하는 딸에게 단단히 삐친 남편은 특유의 삐돌이가 되었다.

"어떡하냐. 딸아. 아빠 한번 삐치면 좀 오래가는데. 한동안 못되지는 거 알지?"

남편의 표정을 살피며 농담을 던졌다. 다행히 이 말에 둘 다 웃는 걸 보니 남편이 엄청 실망하진 않은 듯하다.

"자기야, 실은 자기가 말했던 거 다 내가 하고 싶은 거더라. 멀어서 못 가고, 시간 없어서 못 가는 서울도심 나들이. 상황만 허락되면 내가 가고 싶네."

"역시 마누라가 최고야. 사실 자기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 딸들 다 필요 없다니까"

이렇게 남편의 기분이 풀어졌다.


나도 말로만 장단을 맞춘 건 아니다. 경기 외곽에서 서울로 나가는 게 무지하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입장에서 시간적으로 부담이 되기는 한다. 자차를 이용하면 좋을 텐데, 난 자발적인 대중교통이용자이니 결국은 내가 시간적으로 자유로워질 때를 기다릴 수밖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하루에 일정을 하나만 잡아야 하고, 오고 가는 길을 계산해야 하며, 혹시 무거운 짐이라도 생기는 날엔 낑낑거리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덕분에 네이버 지도로 장소를 검색하고 찾아가는 실력이 제법 늘었다. 갈 때마다 헤매니 조금이라도 덜 헤맬 수 있도록 조금 일찍 나선다는 기특한 생각도 하게 되었다. 한번 가본 동네를 내 발로 직접 밟으며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여유도 가질 수 있다. 하나에 집중 못하는 산만한 나의 정서와 기질을 강제로 안정시키는 작용도 일어난다. 시간이 부족하니 만나서도 '세월아내월아' 앉아있기보다는 상대방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들으려는 정성도 곁들여진다.






신랑의 계획에 이미 붕떠버린 내 머릿속은 언제 어떻게 실현해 볼까 하면서 계속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있다. 일주일만 시어머님께 아이들 식사를 부탁해 볼까? 그러기에는 매일 저녁 나와 그림책 읽는 시간을 기다리는 막내가 걸린다. 아직은 아기 같은 중1 둘째도 나의 손길이 필요하다.

'남편이랑 움직이면 여러모로 편하고 좋지만, 저 계획 중 하나만 실천하더라도 조금은 느리더라도 아이들이 나랑 다녀주는 동안에는 같이 시간을 보내야지.'

느리고 불편함을 선택한 엄마는 어떤 게 아이들의 입맛에 가장 맞을지를 고민하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린다.


외출할 때 각자의 교통카드를 챙기고, 집 근교에서는 어떤 버스를 타야 하는지 알고, 화려하진 않지만 적당한 가격의 식당을 이야기하는 정도까지 자라준 아이들에게 또 어떤 걸 가르치면 좋을까.


'자전거'

남편이 외친다. 자전거를 가르쳐야겠다고.

갑자기, 해가 뉘엿뉘엿 지는 선선한 여름날 저녁 자전거를 타며 낄낄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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