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스무 살 합천 해인사 3000배의 기억
나는 스무 살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사춘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어둠의 바다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현실이 답답하고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우리 집은 아주 평범한 집안이었다.
딸이 다섯 명이라는 것만 빼면.
사립학교 과학교사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그리고 우리 다섯 자매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학급 반장으로 모범생이었지만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결과는 대학입시 실패로 나타났다.
아버지가 합천 해인사에 가자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따라간 이유이다.
나도 막연하지만 내 삶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있었다.
아버지는 겨울 방학이면 매년 해인사 백련암에 갔다.
항상 3,000배를 하고 성철 스님을 뵙고 왔다.
매년 12월 말이면 불교 교사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갔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갔다.
아버지가 해인사 백련암에 데리고 간 딸은 그때 내가 처음이었다.
그 이후 나를 왜 데리고 갔을까?라고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그 시절 나의 무기력한 모습이 보였던 것 같다.
우리 자매들은 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야단을 맞거나 잔소리를 들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말로 야단을 못 쳤을 것 같다.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는 소리 없는 채찍질이었을까? 아니면 둘째 딸이 유달리 예뻐서 데리고 갔을까?
내가 학창 시절 가장 좋아했던 작가는 헤르만 헤세이다.
그의 작품《데미안》은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는데《데미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내가 3,000배를 하고 나왔을 때 딱 이런 기분이었다.
새로 태어나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그 시절 사찰의 고요함과 풍경 소리, 싸늘하고 에일 듯한 새벽 공기가 내 세포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무려 30년 전인데도.
그만큼 나에게는 강렬한 기억이다.
나는 이전에는 108배는커녕 삼배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른들이 하는 대로 그냥 따라 했다.
그런데 신기했다.
내가 3,000배를 해냈다.
잠깐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새도록 절만 했다.
스님의 염불에 따라 경전을 읽으면서 절을 했다.
처음에는 온갖 잡생각이 났다.
어느 순간 무아로 접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육체가 힘드니 다른 생각할 여력이 없어진 것이다.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런데 정신은 조금씩 맑아졌다.
3,000배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에게 누가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 3,000배를 마치고 처음 든 생각은 ‘아!! 세상에서 못할 것이 하나도 없겠다’라는 것이었다.
온몸이 파김치가 되었고 안 섰던 근육들이 아우성쳤지만, 의식은 더 또렷해졌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스로 동행한 여교사 한 분이 나에게 예쁜 염주를 선물해주었다.
대견했나 보다.
내가 받은 생애 첫 염주였다.
그리고 3,000배를 해야 만나 뵐 수 있는 성철 스님도 만났다.
법희(法熙)라는 법명도 받았다.
왠지 이름 하나를 더 얻은 것 같아 기쁘고 벅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