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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나남 Dec 29. 2020

나는 살기 위해 읽기 시작했다.

02 스무 살 합천 해인사의 기억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으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사제지간을 비유하거나 서로 합심하여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알을 깨고 나오려는 욕망과 알을 부수고자 하는 자극이 동시에 시작되면 변화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합천 해인사 3,000배가 그런 변화의 시작점이었다.  

나는 왜 합천 해인사 3,000배를 종종 떠올리는 걸까?

나를 온전히 이긴 첫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자존감을 회복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나는 자존감이 바닥날 때 스스로 어떻게 회복해 나가야 하는지 이때 배웠다. 


마음의 고통과 우울감은 몸을 움직임으로써 치유할 수 있다. 

신체가 행동해야 새로운 에너지가 생성된다. 

그러면 마음에 남아있는 분노와 속상함, 나태와 게으름이 조금씩 옅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이후 나는 몸을 움직이고 행동하는 일을 즐겨 찾아서 했다. 

마음의 방황은 몸으로 치유할 수 있음을 해인사 3,000배로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빵집 서빙을 시작으로 텐트 홍보, 은행 고객 안내, 결혼식장 보조 등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벗어나 모르는 세상과 부딪히고 싶었다.

나의 알을 깨고 나오고 싶었다. 


빵집 서빙할 때다.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하니 3일 만에 코피가 터졌다.

이 단순한 서빙도 못 하나 하는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이 빵집 서빙을 3개월 동안 계속했다.


스물의 아르바이트를 통해 내가 확실히 안 것이 하나 있다.

아르바이트로 평생을 살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경제적 독립을 하고 싶다는 것을.     

 사람은 다음의 세 가지가 아니면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첫째, 시간을 달리 쓸 것 둘째, 사는 곳을 바꿀 것, 셋째, 새로운 사람을 만날 것, 이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나의 환경을 바꾸기 시작했다. 

자주 만나던 친구와는 한동안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시간을 온통 이전에 해보지 않은 경험으로 채워나갔다.     


지금 돌이켜 보면 스무 살의 방황은 인생의 통과의례였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절실했다.

헤어 나오기 힘든 암흑 같았다. 

정신적인 무력감과 좌절감이 육체적인 고통보다 치명적일 때도 있다. 


빠져나오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현재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것’과 ‘몸을 움직일 것’이다. 

 현재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지금의 내가 내 책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대학에 실패한 나’,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내가 ‘희망하는 나’와 ‘현실의 나’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정신적으로 힘들어진다. 

자신을 지금의 나로 온전히 받아들일 때, 모든 것은 내 책임이 된다.

그러면 그때부터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변하기 시작한다.  


스무 살 합천 해인사 3,000배 이후, 내 인생에 다시 3,000배를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 이후 세월이 30년 흘렀다. 

지금 3,000배를 한다면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때만큼 절실함이 없어서? 아니,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스무 살의 그때, 나의 아버지가 나를 합천 해인사에 데리고 간 마음을 지금은 알 것 같다. 

아버지의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알겠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갈 힘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도. 

지금 내가 나의 아들과 딸에게 절실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처럼.


갑자기 가슴이 먹먹하다.

7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문득 생각난다.

지금은 불경 소리가 나는 산속 깊은 사찰 근처에 계실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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