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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나남 Jan 03. 2021

‘바꾸거나, 받아들이거나, 떠나거나’

     그 첫 번째 이야기

나는 나를 완전히 바꾸고 싶었던 적이 있다.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나의 ‘키’를 바꾸고 싶었다.

우리 집은 딸 부잣집이다. 

딸 중에서 내가 제일 작다. 

엄마와 아버지는 보통 이상의 키였다.

나는 주변 사람들과 가족들이 내 키에 관해서 하는 말로 서러움을 많이 당했다.

 아마 사람들은 별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정아가 우리 집에서 제일 작아”라고 자주 말했다.

 나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우회적으로 언니나 동생들은 크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성인이 된 뒤에는 “키 커 보이는 옷을 입어야 해”, “구두 신고 다녀라.”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다 나를 위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나에게는 그런 말들이 차곡차곡 쌓여 상처가 되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다른 형태의 키에 대한 서러움을 느껴야 했다.

시어머니가 ‘아휴, 장 며느리가 이렇게 작아서 어떻게 하나?’라는 무언의 시선을 주실 때가 많았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첫 아이가 태어난 후 아이가 걷기 시작하자, 아이의 키를 쟀다.

벽에 아이의 키를 표시하였다. 이것이 시집에 갈 때마다 하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엄마 닮아서 키가 작을까 봐? 아니면 손자에 대한 사랑의 표현? 무엇이었든, 나에게는 스트레스였고 힘들었다. ‘어쩌라고? 작은 키가 내 탓이 아닌데, 내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해요? ’라고 마음속으로 아우성쳤다. 


내 아이보다 한 살 위, 한 살 아래인 조카가 있다. 

같은 나이도 아닌데 조카들과 키를 비교했다.

참,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아마 걱정이 많이 되었나 보다. 엄마 닮아서 작을까 봐. 

친손자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표현했구나 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키에 대한 콤플렉스를 ‘그냥’ 탁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 내 키 작다? 어쩔래?’라는 마음의 배짱을 스스로 심었다. 

주문을 걸었다.

그 이후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내가 상처를 안 받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상처가 안 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면 괴로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해서 나의 콤플렉스를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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