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의 남편이 남자 친구였을 때다. 그가 뜬금없이 아이스박스를 들고 우리 집에 찾아온 어느 날이었다.
"이게 뭐야?"
"아 오늘 지점에서 갯벌체험 워크숍을 했는데 거기서 잡은 망둥어랑 조개들 좀 갖고 왔어. 아직 살아있어 얼른 손질해서 매운탕 끓여먹자!"
정말 난감했다. 매운탕을 좋아하지만 집에서 끓여먹자니!
그때의 난 신촌의 한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었다. 신촌역 4번 출구에서 나와 쭉 올라가면 우리 집이 있었다. 실평수 13평 남짓한 우리 집 부엌은 싱크대가 작아서 매운탕거리를 손질할 각이 나오지 않았다. 남자 친구는 고무장갑을 끼고 망둥어 비늘을 벗기고 대가리를 자르고 조개를 해감했다. 그 작은 부엌 싱크대는 순식간에 비릿한 냄새와 뻘에서 나온 흙으로 뒤덮였다. 나는 옆에서 오만가지 인상을 쓰고 남자 친구가 하는 행동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아니 집에 가서 누나들이랑 끓여먹지 뭘 또 여기까지 갖고 와. 부엌도 좁은데"
"같이 끓여먹으면 좋잖아 누나들은 어차피 매운탕 별로 안 좋아해"
남자 친구는 허허 웃으며 일부러 이렇게 가져왔는데 핀잔을 주냐는 듯 한번 날 스윽 쳐다보고는 망둥어 손질 작업에 몰두했다. 밖에서 사 먹는 매운탕을 집에서 손질해서 먹으려니 여간 복잡한 게 아니었다. 괜히 자꾸 툴툴거렸다. 저놈의 망둥어 비린내가 내일 회사에 입고 갈 내 옷에까지 배는 거 아닌가 싶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날 먹은 매운탕 맛은 기억도 안 난다. 그저 남자 친구가 화룡정점으로 미나리를 매운탕에 투하하고 호로록 소리를 내며 망둥어 살과 뼈를 맛있게 발라 먹은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그때의 남자 친구는 현재 조금은 살이 쪄서 이따금씩 부어 보이기도 한다. 얼굴이 몹시 하얗고 순둥순둥 하게 생겨 돈가스와 파스타만 먹을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그는 홍어회를 무척 좋아하는 전주에서 나고 자란 오리지널 미식가이다. 나는 해산물을 사랑하지만 홍어회까지의 레벨은 안된다. 남편은 집에서 관자 덮밥이며 문어숙회며 골뱅이탕이며 온갖 생물을 직접 손질하여 요리하는 것을 종종 즐긴다.
일주일 전 영국에 사는 베프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친구와 친구 남편 그리고 아들까지 세 식구가 우리 집에서 즐거운 1박 2일을 보내고 갔다. 친구가 온 토요일은 마침 친구의 생일이었다. 워낙 남편들끼리도 성격이 잘 맞아 친구가 온다는 일주일 전부터 남편도 설레어하는 눈치였다.
"여보 유경 씨랑 형님 오면 저녁에 뭐 해 먹을까?"
"음.. 유경이 생일이니까 불고기 좀 하고 이든이는 파스타를 좋아하니까 파스타 좀 하고.. 케이크 좀 사놓고.. 또 잠깐만... 또..."
"여보 우리 문어숙회 해서 먹자! 내가 수산시장 가서 돌문어 사 올게!"
"무... 문어?? 유경이가 좋아할까? 걔 해산물 알레르기 있는데"
남편은 결국 친구가 오는 날 수산시장에 가서 돌문어를 사 왔다. 문어숙회는 남편의 전매특허였다.
문어는 살아서 비닐을 씹어먹을 듯한 발놀림을 하고 있었다. 곤충 포비아에 생선도 마트에서 꼭 잡아서 오는 나이기에 문어 손질은 어림도 없었다. 나와는 대조적인 남편은 대야에 밀가루를 퍼붓고 살아있는 문어를 박박 문지르기 시작했다. 다리에 이물질을 뺀다며 싱크대가 밑으로 푹 꺼져버릴 정도로 박박 문질러 댔다. 마침 친구네 부부가 도착했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뜨악하는 동시에 너무 고마워했다.
"지석 씨 지금 우리 문숙(문어숙회)이 해주려고 그렇게 장갑까지 낀 거예요? 이야~감동이네!"
"오느라 고생하셨죠. 조금만 기다리세요 빨리 해서 드릴게요!"
남편은 결국 문숙이를 참 맛있게도 삶아냈다. 양파, 대파, 마늘을 듬뿍 넣고 중불에서 7분 정도 삶은 문어는 야들야들하기 짝이 없었다. 친구는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지만 삶은 건 괜찮다며 참 맛있게도 먹었다. 문어숙회를 요리해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특별한 날이니 친구네 부부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걸 대접하고 싶다며 자기가 잘하는 문어숙회 요리를 선보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사실 그건 우리끼리도 종종 해 먹는 요리였다. 횟집에서 나오는 문어숙회는 지극히 소량이지만 집에서 해 먹으면 그것의 몇 배는 더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심지어 가성비도 좋다. 초고추장을 살짝 바른 문어와 소주 한 모금의 궁합이란!!
문어를 얇게 썰어 접시에 올리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면서 십여 년 전 갯벌에서 잡은 망둥어를 손질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는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먹으면 행복하다는 그 단순한 진리를 잘 몰랐다. 코로나 시국에 외식하기도 힘든데 남편이 이렇게 차려주니 집에서 편하게 음식을 먹으며 얘기하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모처럼 영국에서 친구가 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술 한잔 기울이며 그동안 못 나눴던 속 깊은 얘기들을 하나둘 꺼낸다. 속이 후련하게 박장대소하기도 하고, 눈물이 주르륵 떨어질 거 같은 억울한 얘기나 서글픈 얘기를 하면서 서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갯벌에서 잡은 문어의 감사한 에너지로 우리는 또 다른 유쾌한 에너지를 얻으며 그날의 밤은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