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영화감독이 된 너에게

by 미아

안녕. 우리야. 내게 그랬지. 너에 대한 글을 한번 써달라고. 써보라고.

내 마음속에 니 녀석이 들어왔다 나갔나 싶었어. 너의 첫 장편영화 촬영을 앞두고, 네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온다고 했던 것처럼 나도 너에 대한 글을 꼭 써보고 싶었거든.


14살 때 처음 만나 벌써 20여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네.

한치 흐트러짐 없는 5:5 가르마에 힙합 바지를 입은 너와 톤온톤 코디에 발토시를 즐겨하는 내가 만났지.

우리는 좋아하는 남학생 동선을 따라 어느 날에는 양호실로, 어느 날에는 하교 후 그들 뒤를 몰래 따라가면서 뒷모습만 봐도 좋다며 펠리컨 마냥 끼룩댔어. 학원 쉬는 시간에 네가 무서운 얘기를 동작까지 더해서 하는 날에는 난 끝까지 듣지도 못하고 까무러치게 무서워서 니 등을 퍽퍽 때리곤 했지. 같은 학교 같은 반 같은 아파트 단지에 매일 보는데도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았는지 너와 내가 주고받은 교환일기만 몇 권이야.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너에게 감명 깊게 본 영화에 대해 얘기하면 넌 궁금해하며 보고 싶다 말했고 우린 그렇게 서서히 좋아하는 것을 나누게 된 거야. 고등학교에 가서는 함께 영화 제작 동아리를 만들어서 직접 청소년 단편 영화도 찍고 상도 받고 그랬잖아. 그게 시작이었어. 동아리 '다호라'를 함께 꾸려가면서도 나보다 제작에 대한 열정이 많은 너를 보면서 자극도 받고 항상 멋지다고 생각했어. 함께 만든 동아리였지만 다호라의 8할은 너였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나 국어시간에 네가 반 친구들 앞에서 장래희망에 대해 얘기했던 날이 기억나.

"제 꿈은 영화감독입니다. 영화를 알게 해 주고 좋아하게 해 준 친구 현주에게 고맙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널 쳐다볼 수 없었지만 심장은 이미 쿵쿵 쾅쾅 뛰고 있었어.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는 것을 느낀 날이었지.






우린 같은 꿈을 꾸었지만 직접 영화를 찍으면서 느꼈던 건 조금 다른 것 같아. 난 깜냥은 안되는구나.

넌 달랐어. 꺼지지 않는 불꽃을 마음에 품고 결국 영화과에 입학해서는 더욱 배우고 성장하며 너만의 장점을 부각시켰지. 네가 '영희씨'로 청룡영화제 최우수 단편영화상을 받았을 때는 마치 내가 수상한 것처럼 너무 기뻤어.


넌 가끔 힘들다고 인생 숙제를 다 끝낸 내가 부럽다고 했지. 그럼 난 오롯이 너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네가 부럽다고 했고. 꿈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네가 최고라며 도닥여주곤 했어. 우리야 아직도 인생은 뭐가 정답인지 모르겠지만 우린 그래도 각자 자리에서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나는 지금 두 아이의 엄마가 됐고 어쩌다 이렇게 틈틈이 글을 쓰고 있네. 음악 전공자인 엄마 덕에 성악이며 첼로며 그 길로 갈뻔하다가 결국 고등학교에 가서는 영화라는 분야에까지 도전했지만 난 감상하며 살아야 하는 인간이었던 것 같아. 아무리 끼가 넘쳐나도 두각을 나타내는 건 소수인 예술계에 지극히 평범한 내가 그 틈을 파고들 엄두가 나지 않더라. 자연스럽게 핸들을 옆으로 꺾어버렸지.


오늘 차 안에서 지석과 무슨 얘기 끝에 '과거로 돌아가면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냐'는 얘기가 나왔어.

둘 다 대답은 '딱히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없다' 였지. 촘촘히 살아왔구나 싶었어. 그런데 아직도 가끔씩 중고등학교 때 꿈을 꾸는 걸 보면(넌 이미 내가 하도 얘기해서 알지) 난 그때 몹시 즐거웠나 봐. 너네 농장 냇가에서 물장구치며 놀고 돌솥에 삼겹살과 파절이 김치를 올려 구워 먹고 밥까지 볶아먹고 나서 평상에 누우면 밤하늘 별들이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지는 거 같았지. 무서운 얘기 하며 서로 놀라게 하다가 내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 하면 넌 망을 봐주며 내가 편히 볼일을 보게 해 줬지. 그러다 냇물에 떠내려가는 무언가를 보고 냄새난다며 놀리는 너였어. 네가 배를 부여잡고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와 니 머리 위에 있던 집채만 한 보름달은 나를 여전히 15살 소녀로 돌아가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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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드디어 여주에서 '20세기 소녀' 첫 촬영을 하네.


이제 깃발을 꽂을 때가 된 거야 우리야.

네 마음속 불꽃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줘.

나는 늘 그래 왔듯이 곁에서 불꽃놀이 지켜보며 소리 지를 거야. 아름답다고 환상적이라고 비현실적이라고.


그리고 이제 나는,


"당신은 풀어내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라는 지석의 말과

"현주야, 부담 갖지 말고 조금씩 기록한다 생각하고 써봐. 너의 밝은 이야기"라고 한 네 말을 듣고 별것 아니지만 나만의 속도로 써보려 해. 그 공간에 있는데도 그 순간이 미칠 듯 그리워 사진을 찍는 것처럼,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을 소소하게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미 몇 번 한 거 같기도)

빛나는 열정을 지닌 너를 곁에서 계속 지켜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던 거 같다.

'20세기 소녀'에서 '21세기 영화감독'이 된 너의 첫 장편 영화 시작을 응원해. 건강하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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