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반야바라밀 (摩訶般若波羅蜜)
동양의 4대 기서로 꼽히는 중국의 대표적인 소설로 삼국지연의, 수호지, 홍루몽, 그리고 서유기가 있습니다. 각각 후 한말에서 위, 촉, 오 세 나라를 거쳐 진나라로 이어지는 200여 년의 이야기, 북송시대 양산박이라는 산채에 모인 108명의 호걸들의 이야기, 부귀영화를 누리던 한 가문의 흥망성쇠를 그린 이야기,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불경을 얻으러 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모두 실제 역사나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더욱 실감 나고 입체적인 소설들이 될 수 있었죠.
이 중 서유기는 실제 당나라의 고승이었던 현장법사 (602~664)가 불경을 가지러 서역(인도)까지 순례하고 돌아왔던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장법사는 17년간 서역을 여행하며 불교를 공부하고 경전을 모아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불경의 원문들을 번역하고 한문으로 옮겨 중국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죠. 특히 600여 권에 이르는 『대반야바라밀다경』을 260자로 짧게 요약하여 대승불교의 진리로 함축한 경전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계공 도일체고역)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을 건너느니라.
— 반야심경 중에서
그리고 반야심경의 핵심이자 대승불교 사상의 정수를 함축하는 구절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입니다. 마하(摩訶, Mahā)는 '크다', '위대하다'를 뜻합니다. 단순한 크기가 아니라, 세상을 초월한 위대한 차원의 넓음이죠. 반야(般若, Prajñā)는 '지혜'입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닌,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궁극적 깨달음이죠. 바라밀(波羅蜜, Pāramitā)은 '저 언덕으로 건너감'으로 번뇌와 고통의 이 언덕을 넘어 열반의 피안(彼岸)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크고 위대한 지혜를 익혀 저 언덕(고통과 번뇌)을 건너가 부처가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통과 번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건강, 돈,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기쁨도 누리지만 그만큼의 슬픔도 겪습니다. 가족 중 누군가 아프거나 혹은 우리 곁을 떠났을 때,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할 때, 다른 사람과의 불편하고 힘든 관계를 이어가야 할 때 등이 언제나 일어날 수 있죠. 이러한 괴로움에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바로 반야,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스토아학파는 기원전 3세기, 아테네의 ‘주랑(Stoa)’에서 제논(Zeno of Citium)이 시작한 철학으로, 후에 에픽테토스,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인물들에게 이어지며 로마 시대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의 핵심 사상은 인간의 내면적 자유와 평정심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스토아학파가 말한 아파테이아란 ‘정념(情念, 파토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상태’, 곧 흔들림 없는 평정(平靜)의 경지를 말합니다. 기쁨·슬픔·분노·욕망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순간 인간은 외부의 상황에 끌려 다니게 되지만, 이를 이성(logos)으로 통제하고 우주의 필연적 질서를 이해할 때 비로소 평온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죠.
기억하라. 당신은 잔치에 와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어떤 음식이 당신 앞에 있는가? 손을 뻗어 적절한 당신의 몫을 취하라. 그냥 지나가는가? 놔두어라. 아직 오지 않았는가? 그에 대해 욕망하지 말고, 그것이 올 때까지 다만 기다리라.
— 에픽테토스, 『엥키리디온(Enchiridion)』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의지뿐이며, 외부 사건이나 타인의 행동은 결코 우리의 권한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을 다스릴 때 진정한 자유와 평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아파테이아입니다.
위대한 지혜를 가지고, 저 언덕을 넘는 과정은 과학에서는 특히나 필수 불가결한 과정입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관찰과 실험을 통해 이론을 정립하여, 이를 해석하고 검증하여 결과를 도출해 내는 절차들이 언덕을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죠.
특히 인류가 지구라는 한계를 넘어 우주로 나아가려는 과정 역시 위대한 지혜, 아니 지혜들이 모여가는 위대한 도전의 기록이죠.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인간의 활동무대는 지구, 그중에서도 표면적의 30%를 차지하는 육지에서만 국한되었습니다. 그러나 1957년 소련이 쏘아 올린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와 1961년 유리 가가린이 탄 인류최초 유인 우주비행선 보스토크 1호는 인류가 지구라는 한계를 넘어 우주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고 첫발을 내딛는 순간 우리는 우주라는 새로운 언덕을 넘어가는 역사적인 경험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 사람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 닐 암스트롱, 인류 역사상 최초로 발에 발걸음을 내디디며
우주탐험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입니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이후 7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 누구도 지구 바깥의 다른 별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죠. 그러나 국제우주정거장, 화성탐사선, 우주망원경 등 인류는 멈추지 않고 지혜들을 모으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가진 모든 지혜들을 모아 우주라는 언덕을 넘으려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이자 사명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폴란드 출신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1857~1924)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자행된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 속에 드러난 사회적 모순과 인간 본성의 어두운 단면을 깊이 탐구한 작가입니다. 그가 남긴 대표작이자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1899년)은 콩고 강을 따라 들어가는 주인공의 항해를 그리면서 단순한 탐험 담을 넘어 인간 존재의 심연을 응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주인공이자 작품의 화자인 말로는 프랑스 상선으로 아프리카 콩고 강을 따라 항해하며 경제적인 목적을 이루고자 합니다. 유럽의 아프리카 진출은 효율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미개인을 문명화시켜주는 활동이라고 굳게 믿죠. 그러나 아프리카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이러한 선입견은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노예와 같은 처지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의 탐욕과 수탈에 의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던 것이죠. 이 끔찍한 세계 속 여정의 끝에 말로가 만난 '커츠'는 본래는 성실하고 유능한 주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둠의 심연에 잠식되어 버리면서 결국 상아수집에 끝없는 집착을 보이고, 원주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자 신적인 존재가 되어 있던 것이죠. 말로에 의해 구조되어 증기선에 오른 커츠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끝없는 깊이에 경악하며 외칩니다.
끔찍하다. 끔찍해! The horror! the horror!
— 조지프 콘래드, 『어둠의 심연』중에서
잘못된 지혜와 관념을 가지고 언덕을 넘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당시 유럽인들이 생각했던 선입견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무슨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현대 미술의 판도를 바꾼 인물 중 한 사람은 미국의 화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입니다. 그는 흔히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혹은 “드리핑(Dripping) 기법”으로 불리는 새로운 회화 방식을 개척한 화가로,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의 대표 주자로 꼽힙니다. 폴록의 등장은 당시 미술계에 지배적이던 고정관념과 전통적인 양식을 무너뜨린 예술적 혁명이라고 평가받습니다.
그는 붓을 들고 이젤 앞에서 정교하게 그리는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그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물감을 흩뿌리고 흘리고, 손과 몸의 움직임 전체로 그림을 만들었죠.
나는 내 감정을 그려 보이지 않았다. 그저 표현할 뿐이다.
— 잭슨 폴록
이 방식은 그림을 단순한 대상 묘사가 아닌 예술가와 행위, 순간의 에너지를 담는 과정까지도 작품의 가치로써 확장시켰습니다. 그가 남긴 대표작인 No. 5, 1948이나 Autumn Rhythm 같은 작품들은 질서와 무질서, 통제와 우연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강렬한 에너지를 보여줍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폴록의 그림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저 물감을 흘린 낙서가 예술이 될 수 있느냐”라는 비난과 조롱도 많았죠. 그러나 그의 작업은 “예술은 반드시 형상을 가져야 한다”라는 전통적 관념의 언덕을 넘어, 표현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삶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나이, 위치, 역할 등 어느 것 하나 멈춰있지 않습니다. 영원할 것 같지만 영원하지 않죠. 다만 변화에 대하여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냐, 능동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냐는 스스로에게 달려있습니다. 유속이 빠른 거대한 강에 빠졌다고 상상해 보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바뀌는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저 흐르는 물살에 몸을 맡기고 운명을 탓하겠지만, 누군가는 주변을 살피고 그 속에서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바로 그 태도의 차이가 언덕을 넘는 힘이 됩니다.
언제든지 인생의 언덕은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언덕이 내가 원하는 곳이냐는 다른 문제이죠. 내가 바라고 원하는 그 언덕을 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지혜를 쌓고 준비해야 합니다. 설사 누군가에게 떠밀려 원치 않는 언덕을 오르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하고 대비해야만이 그 너머의 길을 찾아서 갈 수 있으니까요.
『오늘도 자신 앞에 놓인 언덕을 넘으며,
스스로를 갈고닦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하나의 명언이 하나로 흐르다.
– 일언일맥(一言一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