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성 Jul 10. 2024

싫었던 계절이 좋아지는 나이

늙어간다

눈 내리던 날 태어난 나는 여름이 싫었다.

끈적거리는 촉감이 싫고 뜨거운 햇볕도 힘들고 장마 때 불어오는 물기 가득한 바람은 최악이었다.

뭘 먹어도 맛이 없고 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증은 쉽게 해소되지 않고,

그저 추운 날을 떠올리며 겨울만 기다리며......

40번이 넘는 여름을 버틴다는 심정으로 보냈다.


그런데 요즈음,

여름이 좋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건 싫어하는 게 줄어드는 과정일까?

나이 든 사람들의 고집, 젊은 사람들의 좁은 시각, 남자들의 무모함, 여자들의 내숭 등......

나랑 관련 없는 사람들의 어떤 면모도 참을 수 없게 혐오하며 지냈는데 점점 무던해진다.

여름도 그 중에 하나다.


오늘 구내식당에서 점심으로 수제비가 나왔다.

한 여름에 뜨끈한 수제비라니, 예전 같았으면 차라리 굶었을 나다.

더운 걸 싫어하다 보니 여름엔 늘 시원한 음식을 달고 살았다.

살얼음 띄운 냉모밀, 아이스 아메리카노, 수박, 머리가 깨질 것처럼 차가운 팥빙수.

그런 게 아니면 여름을 버틸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구내식당에서 먹은 수제비가 참 맛이 좋았던 거다.

따끈한 국물에 야들야들한 밀가루 반죽이라니, 국물의 깊은 맛도 수제비의 식감도 아주 훌륭했다.

땀을 쏟으며 한 그릇을 다 비워냈다.

그리고 후식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따뜻한 라떼를 주문했다.

작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다.

여름엔 냉모밀 아니면 쫄면에 망고빙수 후식이 정석이라 믿으며 40번의 여름을 보낸 내가,

이럴 수가.


한바탕 땀을 내고 따뜻한 라떼를 손에 들고 있자니

한 여름의 거리 풍경도 눈부시게 싱그럽다.

늘 지나치던 나무들도 여름이 전성기인듯, 셀 수 없는 초록 잎사귀들을 만개한 채 바람에 반짝거리고 있다.

겨울의 수묵화로 그린 듯한 나무와는 다르다.

겨울 나무가 고독하게 때를 기다리는 느낌이라면 여름 나무는 그 때를 맞이해 만끽하는 느낌이랄까?

바라만 봐도 멋스럽다. 존재 자체로, 무채색인 나의 가슴을 초록빛으로 물들인다.


땀 흘리며 오고 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예전과 달리 활개하는 생명력을 본다.

예전엔 땀을 저렇게 흘리면 어휴 지치겠다, 싶었는데

이젠 몽글몽글 솟은 땀방울 하나하나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훈장처럼 보인다.

가까이 가면 땀 냄새가 나겠지만 멀리서 보니 싱싱하고 맑은 향기가 난다.

왜 지금껏 멀리서 보지 못했을까?

관계로 힘든 순간도 업무 때문에 지치는 순간도 몇 발짝 떨어져 보면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뜨거운 여름, 어디론가 오고 가는 사람들의 땀방울처럼.


일주일 넘게 이어진 장마가 잠시 주춤하고,

간만에 고개를 내민 쨍한 햇볕이 내 머릿속 긍정회로를 윙윙 돌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볕이 닿는 모든 여름 풍경들이 아름답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

다시 오지 않을 올해 여름.

같은 모습, 같은 심정으로 결코 다시 머물지 않을 이번 여름, 여기 이 공간.


만끽해야지.

싱그러운 여름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셔야지.

우리에게 몇 번의 여름이 더 남았을지 모르지만 100번도 되지 않을 건 분명하다.

그러니 즐겨야지.

생각해보면 여름을 싫어할 이유가 없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서 언젠가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

추위를 견딜 수 있게 온기를 채워 놓는 거다.

몸과 마음 속 그득하게 따땃한 온기를 채워 두었다가,

언젠가 너무 추워서 버티기 힘든 날 오늘 채운 이 온기를 꺼내 쓰는 상상을 해본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호호 입김을 내뿜어 손을 덥히던 찰리를 떠올린다.

<러브레터>의 눈 덮인 학교 운동장을 떠올린다.

<설국열차>와 <겨울왕국>의 설경도,

<이터널선샤인>에서 짐 캐리와 케이트윈슬렛이 눈밭을 뒹굴던 장면도 떠올려본다.


그리고 현재,

지금 올해 뜨거운 여름의 풍경을 본다.

회사 근처 공원에서 공을 차고 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갈색 피부가 땀으로 흥건하다. 티셔츠도 머리카락도 땀으로 젖어 살짝 스치기만 해도 후두둑 땀이 묻어날 것만 같다. 초록색 나무 사이로 덥지도 않은지 축구공을 뻥뻥 차며 몰려 다닌다.


귀여워.


여름을 싫어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활기차고 싱그러운 여름을 싫어할 이유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