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없이 맑은 그녀가
어머니 없이 새아버지 손에 자랐다는 사실을
내게 털어놓았다.
사랑꾼 남편에 말 잘 듣는 자식들,
경제적으로도 부족함 없이 우아하게 지내는 모습이
내심 나의 열등감을 자극하던 그녀다.
나를 도와주러 우리집에 자주 오는
그래서 그녀와도 자주 마주쳤던 우리 엄마를 보며
어머니 참 미인이시다, 하던 그녀의 퍼런 마음을
전혀 몰랐다.
그래,
글솜씨와 상관없이 누군가 정리만 해준다면
세상 그 누구의 인생도 책 한권은 거뜬히 나올 거다.
나만 해도 유년시절 겪었던 가난과 학대,
스무살 무렵 3년 가까이 이어진 수치스러웠던 연애,
학업과 직장생활에서의 고난과 좌절,
결혼 스토리, 육아이야기, 인간관계 이야기 등.
나름대로 화려하다.
남들에겐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아픈 이야기들,
그러니 누군가는 내 마음이 편한 줄만 알지.
아빠 생각만 하면 긴 세월 멍든 상처를 누군가
꾹 누르는 느낌이라 약에 의존한다는 것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지.
매일 차를 마시며
사람들은 보통 잔잔하고 예쁜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아주 가끔 함께 술잔을 기울였을 때
삶이 너무 잔잔하여 꺼내놓을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는
사람은 세상 통틀어 하나도 없을 거다.
확신하기 싫어하는 내가 이것만은 확신한다.
사연없는 무덤 없다고,
모두가 자신만의 크고 작은 짐을 짊어지고 걷고 있다.
큰짐도 너끈한 체격을 가진 사람도 있고
작은짐도 힘에 부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든 삶에는 각자의 무게가 있다.
대부분 거기서 거기라는 소리다.
그러니 결국 경험에 의존한 글쓰기는 한계가 있다.
누구나 경험에서 소재를 찾고 영감을 얻겠지만
플러스 알파가 중요하다.
정말 색다른 인생을 살지 않는 이상
글을 쓰기 위해 색다른 인생에 도전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공감할만한 일상에서 재미와 감동을 뽑아내야 한다.
기발한 소설을 기획하여 색다른 세상을 창조하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 깨달은 소소한 진리들을 잘 풀어내야 한다.
글을 통해 공감하고 싶다.
그렇게 잘 풀어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웃고 힘을 얻고 싶다.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풀어낸 책 한권 혹은 그 이상 분량의 글들을 몰입해 읽고 싶다. 몰입할만한 글을 찾기가 힘든 요즈음이다.
또 누군가 내가 쓴 글을 보며 웃고 힘을 얻고 이불을 던지고 씻고 움직이면 좋겠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직접 만나지 않고도 글만 보고 누군가 나를 좋아해주면 좋겠다.
나를 모르면서 글만 보고 매료될만한 글을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글쓰기, 인간만이 할 수 있다.
글자들을 모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
누군가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그걸 잘 해보고 싶다.
그 일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그 일을 통해 세상에 나를 알려보고 싶다.
얼굴 말고 내 이름 말고
나의 학력도 재산도 모두 차치하고,
오로지 글 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