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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 Jul 31. 2024

어느 서글픈 오후

할머니는 18평 남짓 낡은 아파트에서

할아버지랑 둘이 사셨다.


부부가 살던 아파트는 둘째 내외에 넘겨주고

낡고 작은 아파트를 얻었더랬다.


파출부로 생활비를 벌어 하루하루를 살았고

가끔 며느리들이 해다주는 반찬들로 식사를 했고

또 가끔 며느리들이 와서 화장실 청소라도 해주면

그렇게 고마워했다.


며느리 앞에서는 늘 아들 흉을 봤다.

한 성깔 하는 아들들을 데리고 살아주는 며느리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 뿐이었다.

누구보다 아들들을 사랑하면서도,

며느리들에게 잘 보여야

자식 손주들이 평화로울 거라 믿었다.


가끔 명절에 여섯 손주들이 모이면

손주들을 며칠간 도맡아 봐주며 아들 며느리들이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끔 했다.

직접 면을 뽑아 짜장면을 만들고

살얼음 동동 식혜를 만들고

손주들이 쓸 색색깔의 물컵을 사고 식기를 꺼내며

할머니는 참 행복했다.


여섯 손주들이 어지른 18평 좁은 공간을 정리하고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해대며,

할머니는 말했다.


텃밭을 가꾸고 싶다고,

마당이 있는 집에 살고 싶다고.


여섯 손주들 앞치마 하나씩 둘러메고,

직접 기른 상추 깻잎 풋고추 똑똑 따며 꺄르르

조잘대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런 날이 올까...?“


낡고 좁은 아파트 주방에 한뼘만큼 난 창밖을 보며

할머니는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런 날을 상상하며 서글프게 웃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난소암 판정을 받았고,

병원과 아들 내외의 거처들을 떠돌다가

모든 치료를 포기하고

다시 낡은 아파트로 돌아갔던 날,


어느 평범했던 늦은 오후.....

아파트 현관에 쓰러져 고된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가 잠시 슈퍼에 다녀오는 사이,

혼자 그렇게 떠나버렸다.


마지막 순간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60대 중반,

요즘으로 치면 한창의 나이에 할머니는 떠났다.

고생으로 얻은 병마와 싸우느라

머리도 빠지고 살도 빠지고 이도 빠졌지만

어떤 날은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흉하냐고 물어보던 할머니의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토록 평범한 늦은 오후,

대부분의 풍경은 그대로인데 사람만 늙어간다.

산도 나무도 바다도 텃밭도 그대로인데...

사람은 어김없이 오늘도 늙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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