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빅- 열폭버튼이 눌렸습니다[9]

상처준 이들의 불행을 꿈꾼다

by 윤성

살면서 내게 상처를 준 무수한 인연들의 불행을 꿈꾼다.

꿈만 꾼다.


왜 또 이런 생각이 이어지는 건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마음 속 흐린 날이 연속된다.

보통 흐렸다가 맑았다가 변덕이 심한데 이틀 연속 흐리다니,

어쩌면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요동치지 않고 안정되었으니 반가운 일인지.


이런 날 유독 살면서 사람에게 받은 상처들이 따가운 햇볕처럼 어두운 마음에 쏟아진다.

이런 날은 햇볕이 싫다.

눈이 부시고 짜증이 난다.

20대 첫 직장 생활을 하며 만났던 얌체같은 여자들.

내 몸매와 외모 평가를 하며 낄낄대던 여자들.

최소 남자들은 들리지 않는 곳에서 그랬지,

그 여자들은 면전에서 너 오늘 화장이 떴다, 엉덩이가 너무 크다, 다리가 짧다 등 외모 평가질을 해댔었다.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니까 새겨 들어." 라는 따뜻한 말과 함께,

불쾌하게 따뜻했던 그 말과 함께.


그 중에서도 제일 심했던 한 여자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았는데 당시 고액의 연봉을 받는 전문직과 결혼해 나를 포함한 모두의 부러움을 샀었다.

그리고 내가 그 회사를 퇴사하고도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애 둘 낳고, 철마다 유럽 여행을 다니며, 어느 동네에 집도 사고, 남편도 친정에 잘하고 어쩌고 저쩌고 얄밉게도 잘 산다고 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괴롭다.

뒤통수를 후들겨 때린다거나 발을 걸어 넘어지게 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면 큰 죄가 아닌 걸까?

말과 태도로 사람의 마음을 난도질 하는 건 벌 받을 일이 아닌 걸까?

아니면 죄를 지어도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 벌을 받지 않는 건 당연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고작 나 같은 인간에게 상처 퍼부었다고 그게 뭐 어때서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걸까?

나는 10년도 훌쩍 넘은 아직까지도 그 생각만 하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말이다.


이럴 때는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억지로 한다.

부럽지만 억지로 하는 거다. 그 여자의 마음이 불행하기를. 다 가진 것처럼 보여도 결핍이 있기를.

세상 온화한 표정으로 출퇴근을 하고, 업무를 하고, 집안일을 하지만 마음 속에 한번 그 여자가 떠오르면 그렇게 저주 아닌 저주를 한다. 이런 내가 못났다는 생각은 접어둔다.

그저 사람이니까 당연한 거라 생각한다.

내가 착해서, 남에게 피해주기 싫어서 마음속으로 그러는 게 뭐 어때서! 당당해지려고 한다.


문제는 저렇게 나의 열등감을 폭발시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거다.

살면서 무수히도 많은 상처를 받았고,

누군가의 암에 비하면 감기 같은 상처들이지만 그 자잘한 돌들이 낸 생채기가 몸 곳곳에 남아 아직도 건드리면 찌릿찌릿 욱씬거린다.

그들이 여전히 잘 나간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너무 마음이 괴롭고, 그들의 마음에도 그늘이 있겠거니 하고 싶은데 대상이 너무 많다보니 바쁘다. 바빠서 그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신포도의 합리화를 할 시간이 모자라다. 그러니 괴로워도 그냥 다른 일로 관심을 돌릴 수밖에.


또 문제는 저렇게 나를 괴롭혀놓고 잘만 사는 사람들 중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거다.

대표로 아빠. 나의 사랑하는 아빠.

사랑하지만 날 너무 괴롭게 하는 아빠.

나를 엎어놓고 때리고 한 겨울 마당에서 호스로 찬물을 끼얹었던 것만 생각하면 너무 싫은데,

악담을 퍼붓고 싶은데...... 또 더 어렸던 시절 날 예뻐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빠.

그를 저주하는 건 나를 부정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더 괴로워지곤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가 또 있다.

바로 나도 누군가가 쏟아붓는 악담의 대상일 거란 사실. 그러니 몸을 사리느라 늘 불안하고 피곤하다. 내게 상처준 누군가의 마음에 괴로움이 깃들기를 바라면서 누군가가 나처럼 나를 대상으로 악담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일이 이렇게 안 풀리나 싶은 거다.

정말 쓸데없는 생각들의 연속이다. 생각을 멈추자고,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도통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괜찮은 학교를 나왔고 가정도 꾸렸고 경단녀였다가 다시 안정적인 직장도 구했으니, 얕게만 보면 누군가에게 부러운 삶일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도 모르는 사이 상처를 줬을 수도 있고 말이다. 살얼음판 걷듯이 조심조심 살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혹은 배려하려고 혹은 잘해주려고 한 말이나 태도에 누군가는 섭섭해했고 누군가는 나를 손절한 적도 있다. 그러니 어쩌면 내게 상처를 준 그들도 이토록 진하게 남을 내 마음의 멍들을 의도한 건 아니었을지도. 조심한다고 했지만 결과가 이랬을지도. 그 여자도 정말 나를 생각해서 엉덩이 사이즈를 줄이라고, 짧은 다리를 보완하는 스타일로 옷을 입어보라고 조언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이런 생각들을 멈추는 것이다. 생각 다이어트가 시급하다.

생각은 아무 효력이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상처를 준 이들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게 지금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지금, 여기, 내가 행복하면 된다.

배 부르고 등 따시니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렇게 뜬 구름 잡는 생각을 하고 글로 적을 수 있는 일상에 감사해야 한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그때 참 좋았지, 는 별로다. 너무나 많은 행복의 순간들이 과거형으로만 남는다.

지금 좋다, 가 되어야 한다. 행복을 현재형으로 만들려면 생각부터 줄여야만 한다.


그러니 저녁은 숯불 돼지갈비든 꾸덕한 파스타든 기똥차게 맛있는 걸 먹어야지.

딴 생각이 나지 않도록.







keyword
이전 06화나의 절교이야기[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