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성 May 04. 2024

이겨야 사는 여자

승리 아닌 승리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자를 안다.

이 글은 그녀에 관한 뒷담화다.


언제나 종종종종 빠르게 걸어다니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털어내야 하니 숨은 턱까지 차고,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는 여자.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신조대로

상대를 설득하고 이길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 여자.


끝까지 밀어붙여서 동료에게 상사에게 신입에게

업무란 업무는 모조리 넘기고,

근무시간 내내 주식과 부동산 투자 관련 유투브를 보는 여자.

1원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는 여자.


본판은 굉장한 미인인데,

볼 때마다 표독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한번도 진정으로 웃는 걸 못 봤다.

자신의 시간이든 돈이든 조금이라도 손해볼까봐

종종종종.

월급도 경비도 1원이라도 덜 받을까봐 종종종종.

카드지갑 하나를 사도 최저가를 찾아 종종종종종종.

누가 10원이라도 더 싸게 샀다고 하면

그게 너무 억울해서 또 종종종.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눈빛으로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저의를 의심해 눈을 흘기고,

인간이란 본디 이기적이고 악한 거라며

떠들고 다니던 여자.


그렇게 부산을 떤 덕분인지

나랑 동기인데도 나보다 승진이 훨씬 빨랐고,

연봉 협상도 야무지게 해서

동기들 중에 가장 많은 월급을 받는다고 들었다.

게다가 주식도 성공하고,

대출을 최대로 끌어다 입지 좋은 곳에 부동산도 사고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만난 남편은 명문대 출신으로

대기업 임원 자리를 맡아놓은 사람이라나 뭐라나?


그 여자를 보며 그래, 역시 악해도 얍삽하게 자기 실속만 잘 챙기면 인생 승승장구 하네,

싶어서 깊은 좌절감이 들던 때가 있었더랬다.

착하게 손해보듯 살면 그냥 호구나 되는 건데

나는 왜 모질지 못할까,

물러터진 스스로를 채찍질하던 시절.

하지만 아무리 채찍을 후려쳐도

그녀처럼 이기는 여자가 될 수 없어 우울했던 시절.



근무 층수가 달라지면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언젠가 몸이 좋지 않아 쉬러 들어간다더니

얼마 전, 그녀가 건강문제로 회사를 아예 그만둘 거란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지난 주말 동기모임에 그녀가 출몰했다.

충격적인 모습으로.


역시나 종종 걸음으로 빠르게 걸어 입장한 그녀는

살이 너무 빠져 해골이 되어 있었고, 탈모도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였다.

그리고 자리에 앉기도 전에 모임장소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주차도 불편하고, 가격 대비 맛도 그다지 없는

이따위 식당에서 왜 모이냐며...... 같은 가격이면 훨씬 맛있는 근처 A식당이나 좀 거리는 있어도 분위기가 더 나은 B식당이 낫지 않았겠냐,

끝도 없이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사실 너무 변해버린 모습에 그녀의 말들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병명을 밝힐 수는 없지만 그 병이 원래 그런 병인지,

살은 다 빠져 가죽만 남았고 퀭한 눈에 잿빛 피부,

건조해서 자글자글해진 입술과 생기라고는 없이

짜증만 가득한 표정이 한때 예쁘다고 느꼈던 본판마저

이제는 찾을 수가 없는 몰골이 되어있었다.


작년에만 병원비로 천만원이 넘게 들었다며,

모조리 실비청구해서 받을 건데!!!

입사초기 철저하게 비교분석해서 보험 가입한 보람이

있다고 또 바들바들 떨면서 열변을 토하는 그녀.

지금은 집값이 떨어졌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니까 대출 갈아타고 좀더 받아 투자하려고

요즘 A부터 Z은행까지 모든 대출상품들을 비교분석 중이ㄹ................ 아아악!!


눈 앞에 기깔나도록 맛있게 차려진 해산물과 하이볼은

보는둥마는둥 먹는둥마는둥,

그녀는 그저 우리 동기들을 답답해 미치려 했다.

자신처럼 열심히 비교하고 분석하고 몸이 부서져라,

노력해야 결혼도 투자도 성공하는 거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그녀.

남편과 부부상담도 열심히 다닌다던데......

일을 미루는 것도 부부싸움도 부부상담도 무엇이든

최선을 다 하는 게 예전과 쌀알만큼도 달라진 게

없어 환멸마저 느껴졌다.


듣기만 해도 숨이 차고 너무 진절머리가 났달까?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계속 머릿속에 맴돈 건 단 하나다.

저 지경이 되고도 버릇을 못 고쳤네.

일을 안하려고 가지가지 노력을 다 해서 일이란 일은

남한테 넘겨놓고 유튜브나 보더니 결국

병이 났네, 병이 났어.

예전에도 끝없이 업무를 남에게 넘기고,

모든 공적은 자신의 몫으로 낚아채는 걸 보면서도

차라리 일을 하는 게

저렇게 일을 안하고 실속만 챙기려 기를 쓰는 것보다는

스트레스가 덜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기어코 연전연승하더니 저게 뭐람?

긴 시간이 걸쳐 몸을 갉아먹은 승리,

승리 아닌 승리.

결국 몸이 상할대로 상해 퇴사가 코 앞인데 아.직.도.

아등바등 저 난리를......


그렇게 동기들은 서로 그녀에 대한 짠한 눈짓을 주고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뼈만 남아 먹는 재미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그녀가 불쌍했다.

나는 자기연민이 굉장히 강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나보다 불쌍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성격이 먼저인지 병이 먼저인지 모를 일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성격을 고치지 않는다면

건강을 회복하기 어려울 거란 사실이었다.

그녀 빼고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에게 말할 수 없었다.


진정해, 대충살아.


라고 말한들 그 여자는 절대 변하지 않을 거란 걸

당사자 빼고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다.

한때 이기고만 사는 거 같던 그녀가

 길고 긴 세월 사소한 모든 분야에서 이기고 살았지만 결국에는 가장 중요한 건강을 잃고,

외모, 직장, 결혼생활 등 하나씩 무너져가는 와중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습은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렸다.


대충 살고 착하게 살고 적당히 손해도 보고

일부러 좀 져주고도 사는 나의 삶에 대한 태도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지는 하루였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두 주먹 꽉 쥐고 바들바들 종종거릴 필요가 없다.

아니,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그래서는 안 된다.

1원 아끼려고 바들바들 떨다가

스트레스로 병 걸려 병원비가 천만원이 넘게 나온다.

나의 건강, 내 마음의 안정이

이기고 지는 문제보다 중요시되어야 옳다.

그걸 깨달아야만 한다.


사실 나도 원래 종종이 스타일이었는데

늦게라도 깨달아 얼마나 다행인지.


아픈 그녀가 내 깨달음의 도구가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그날의 짠한 눈빛들을 이겨야만 사는 여자, 그녀는

 시기질투로 착각했을테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며 아득바득 애쓰지마,

말한들 그 또한 부러워서 하는 소리로

웃어 넘길 그녀니까.


종종 걸음으로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삶에 대한 열변을 토하던 그녀가 조금이나마 내려놓고 건강을 되찾길

바란다. 38kg이라던데 살도 좀 찌고......

건강이 상한 상태에서도 계속 저러다가 정말

어느 순간 뻥!!!!!!

터져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쓰다보니까 나도 참,

누가 누굴 걱정해?


요즘 이런저런 진상들 상대하느라

속 쓰리고 소화 안되는 나의 위장 걱정이나 하자.


글쓰는 돼지로 오래오래 먹고 쓰고 행복하려면

나도 아직 내려놓아야 부분들이

꽤 많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