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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 May 09. 2024

무채색 k씨의 어떤 하루

짧은 소설

k가 일하는 카페는 초등학교 앞에 있어서

커피보다는 떡볶이가 더 많이 팔리는 희안한 카페다.

k는 바리스타 자격증도 없고 제빵사도 아니지만,

떡볶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만든다.

벌써 4년째, 갓 입학해 엄마 손 잡고 떡볶이며 쿠키며 먹으러 오던 꼬맹이들이 벌써 4학년이 되었다.


물론 k도 4살을 더 먹었고.


카페는 오전에는 브런치 모임으로 바글거리고

오후엔 하교하는 꼬맹이들이 떡볶이나 쿠키를 사먹고,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엔 퇴근길 교사들이 들러 커피를 사간다. k가 기다리는 그도 교사들 중 하나인데

그는 이른 아침에도,

늦은 오후 퇴근길에도 커피를 마신다.


k도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 카페를 지킨다.


사장과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교대하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를 제외하고,

k는 평일에도 주말에도 이른 아침과 늦은 오후 카페에 있다. 그리고 매일 6시반이 되면 카페 문을 닫고,

헬스장이 보이는 다른 카페로 이동해 커피를 마신다.

그가 운동하는 헬스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동네의 다른 카페.


그는 k를 모른다.

하지만 k는 20년째 그를 지켜보는 중이다.

두 사람은 같은 중학교에 다녔고,

k는 전교회장이었던 그가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았다.

그는 교복이 잘 어울렸고 웃을 때 반달이 되는 눈매가매력적이었고 농구를 잘 했으며 키가 컸다.

반면 k는 존재감이 없었다.

그야말로 무채색,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도 괴롭히는 사람도 없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아마도 k는 자신과 다른 그에게 끌렸던 것 같다.

부모님은 k가 도서관에서 학원에서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 그때부터 k의 하루는 모조리 그였다. 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k는 조용히 숨어 그를 관찰했다. 그게 20년이나 지속될 줄 그땐 몰랐다.


k는 새벽에 집을 나서 그의 아파트 주차장으로 간다.

그가 같은 지역 교대에 진학했을때 얼마나 기뻤던지 모른다. 계속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으니까.

첫 발령 이후 그러니까 4년 전부터 그는 독립해 혼자 아파트에 사는데 아파트 지상 주차장에서 복도식 아파트 2층인 그의 집에 불이 켜지고 꺼지는 게 보인다.

운이 좋은 날는 베란다 창을 통해 그가 씻고 나오는 모습이나 TV 채널을 돌리는 실루엣도 볼 수 있다.

새벽에 그의 집에 불이 켜지는 걸 확인하고 k는 카페로 출근해 문을 연다. 그러면 20분쯤 후, 어김없이 그가 카페로 들어와 오트밀 라떼를 주문한다.

매일 얼굴을 보면서도 그는 k에게 관심이 없어보인다.

k는 별로 괘념치않았다.

시작부터 혼자만의 감정이었고 눈에 들거나 하는 더 바라는 게 1도 없는 관계였다. 그가 결혼을 했을 때도,

 1년 만에 소송이혼을 했을 때도 k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지켜만 보았다. 매일 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가 군에 입대해 전혀 보지 못하고 지낸 시간을 떠올리면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를 일이니까.


근데 요즈음 들어 자꾸 그가 욕심난다.

늘 이러다 말았는데 이번엔 그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길게 간다.


오늘은 그가 저녁으로 순대국을 포장한다.

운동이 꽤 힘들었는지 학교 업무가 고되었는지

헬스장에서 씻지도 않고 나오더니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귀가했다.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 등이 하나씩 켜지면서 그가 집에 들어가는 걸 가만히 바라보는 k.

그리고 그의 집 베란다가 잘 보이는 건물 뒤편으로 달려가 그가 불을 켜고 순대국을 세팅하고 TV를 켜고 순대국을 먹는 것까지 한참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집에 불이 꺼질 때까지 하염없이 보고 싶지만

오늘은 집에 조카들이 놀러온다며 얼른 오라던 엄마의 당부에 어쩔 수 없다.

모였다 하면 k의 결혼이야기나 취업 이야기가 나올 게 뻔해 마음이 무겁지만 조카들이 귀엽다.

조카라서가 아니라 외모도 하는 짓도 누가 봐도 귀여운

아이들이라 보러 가야만 한다.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k의 발걸음이 리듬을 탄다.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무슨 노래를 속으로 부르는지 도통 모르겠는데 어째 입꼬리가 자꾸 실룩실룩 대는 느낌이다. 언젠가 그에게 고백할 수 있을까?

목표는 그가 학교를 옮기는 내년 가을 전이다.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 같은 동네의 대학교와

같은 동네에 머물게 된 그의 첫 발령,

그리고 마침 그가 발령받은 학교 앞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기까지 엄청난 확률을 뚤어온 k다.

우연도 필연도 있었지만 어쨌든 더 이상 행운을 바라며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래, 그러니까 k는 늘 가던 길로 집을 향해 걸어가며 어느 늦여름 밤을 상상해본다.

세월을 돌아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오랫동안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그려보는 거다.

k의 뺨이 왠지 그윽하게 붉어진다.

상상만으로도 떨려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그래도 승산이 있다고 본다.

그가 주말마다 하던 소개팅을 멈춘 지 석달이 넘었다.

게다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며 같은 학년을 맡아 가깝게 지내던, 그래서 눈에 꽤 거슬리던 동료교사도 지난 3월 다른 학교로 발령을 받고 떠났다. 오케이, 좋다!

생각해보니 늦여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겠다.


하지만......


사실 그동안 k가 고백하고 싶었던 순간이 오늘로 족히 100번은 더 되는 것 같다. 늘 이러다 말았는데,

이번엔 과연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k의 발걸음이 달콤한 박자를 탄다.

밤이지만 경쾌하다.

집에 거의 다 다랐을 때는 양쪽으로 쭉 늘어선 가로등

불빛들이 한번에 쨍 하니 켜졌다.

좋은 징조라고,

k는 생각하며 자꾸만 꿈틀꿈틀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린다.

오늘 밤엔 그가 주인공인 망상도

막힘없이 진행될 것만 같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밤.


k는 달빛 아래 보면 잘 생겼고 햇볕 아래 보면 예쁘고

비 오는 날 보면 50대로,

눈 오는 날 보면 20대로 보이는 묘한 사람.


k의 고백이 로맨스가 될지 스릴러가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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