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에 비친 너! 누구니? 헬스장에서 덤벨을 들 때 거울에 비친 시들시들해 보이는 내 모습을 맞닥뜨리면 낯설기 짝이 없다. 거울 앞에 서면 머리카락을 자꾸 걷어보게 된다. 흰머리가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다. 쪽가위로 자르면서 버티고 있는데 조만간 염색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느덧 중년이 되었단 걸 실감한다.
세월은 TV를 보는 취향도 바꿔놓았다. 월요일 밤이면 빨래를 개며 가요무대를 본다. 트로트의 애잔한 정서가 마음을 후벼판다. 주말이면 전국 노래자랑도 가끔 본다. 막춤 추는 흥부자 출연자를 보며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이 멋져 보인다. 토요일 저녁에는 자연과 옛 음식을 소개해 주는 한국기행을 즐겨 본다. 자연 속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람을 보면 "다 가졌네!"라는 말이 나온다. 한강뷰 아파트보다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이 그저 부럽다.
산책을 하다 들꽃을 보면 자꾸 멈춰 선다. 꽃마다 어찌나 스타일이 다양한지. 색깔은 왜 이리 고운지. 세상에 이렇게 많은 꽃이 존재한다는 걸 왜 모르고 살았을까. 카톡 프로필에 꽃 사진을 걸고 싶어진다. 누군가 말하더라. 20대는 자기 사진을 걸고, 30대는 아이 사진을 걸고, 40대는 꽃 사진, 50대는 대자연 사진을 건다고. 나도 자연의 순리대로 가는가 보다.
세월은 나에게 취향의 변화를 선물해 주었지만 힘은 빼앗아가는 듯하다. 이십 대 초부터 만난 남편은 나더러 소 같다고 했었다. 엄살을 부릴지 모른다고. 근데 요즘 나는 툭하면 지치다고 한다. 아들 왈 엄마는 '징징이'란다. 하루 놀면 하루 쉬어줘야 하고, 술자리에서 밤 10시를 넘기면 다크써클이 코끝선까지 내려와 먼저 일어난다. 분위기 깨는데 선수가 되었다.
친구들과의 대화 주제도 바뀌었다. 삼십 대에는 '어떤 화장품이 좋다더라'로 수다 꽃을 피웠다면, 이제는 '어떤 영양제가 좋다더라'가 주요 화제가 되었다. 최근에는 너무나 슬펐다. 건강을 챙기기로 함께 다짐했던 친구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평소 건강하고 웃음 가득한 친구가 많이 아프다고 하니 먹먹하고 허망해서 아직도 헤어 나오기 힘들다.
40대는 '불혹', '세상 일에 갈팡질팡하지 않는 나이'라고 하는데, 조그만 일에도 가을바람에 갈대가 흔들리듯 마음이 흔들린다. 앞으로 슬픈 일이 더 많아질 텐데 걱정스럽다. 어렸을 때 40대 시절 부모님을 보면 너무나 어른처럼 느껴졌다. 그땐 내가 어렸기 때문이었을까? 부모님은 어떤 기분이셨을까? 용돈 줄 테니 흰머리 뽑아달라고 하셨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부모님 흰머리가 성숙함의 상징처럼 보였다.
막상 내가 40대가 돼보니 아직도 어린아이가 내 안에서 자라고 있다. 겉은 늙어가고 마음은 제자리인 느낌이다. '이 말은 하지 말걸!' '좀 더 참을걸' 하며 오늘도 후회한다. 나이가 들면 소심하고 부끄러워하는 내 모습은 저절로 사라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낯을 가리고 못 하겠다는 말부터 나온다.
그래도 40대가 되니 여유가 생겨서 좋다. 만약 30대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과정을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면.. 타고 싶지 않다. 일과 육아로 뒤엉켜 정신 차릴 수 없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현재 삶이 만족스럽다.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있고 성장을 꿈꿀 수 있으니까.
이지성 작가의 '일독'에는 독서 멘토 추미옥이란 여성이 나온다. 주인공은 30대 후반인 독서 멘토 미옥을 처음 본 순간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 놀란다. 거만하지도 않고 사람을 많이 탄 듯 닳은 모습도 아니었다고 표현한다.
한마디로 미옥은 '산뜻'했다. 독수 고수라기에 좀 더 고루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지성, 일독 중>
'산뜻'이란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와서 동그라미를 쳤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만의 향기가 난다.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보기만 해도 전염되듯 내 마음이 가벼워지는 사람, 말을 걸어보고 싶어지는 사람도 있다. 특히, 자기관리를 잘 하고 자신만의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은 향기가 배어 나와 호감이 느껴진다.
미옥이 산뜻해 보인다는 건 내면이 건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타민 챙겨 먹듯 책을 읽으면 산뜻해진다고 작가는 알려주고 싶었던게 아닐까? 나도 미옥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겉모습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겠지만, 눈은 반짝이고 산뜻한 기운이 나는 중년의 내가 되길 소망한다. 미옥처럼 누군가를 이끌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