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밤마실 겸 식재료를 사러 마트에 가면 에어컨 공기에 움츠러든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후덥지근한 여름은 지나가고 산들산들한 공기를 즐기며 걷기 좋은 계절이 찾아왔다. 이 좋은 가을 날씨를 즐기며 어디로 떠날지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걷기를 좋아하게 된 건 마흔 살 무렵이다. 우연히 어느 유튜버가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는 영상을 보고 나도 새벽에 일어나고 싶어졌다. 한동안 새벽 5시에 일어나 차를 마시고 책을 읽은 후 밖으로 나가서 걸었다. 해가 어슴푸레 떠오를 때까지 걸으면 마음이 충만해졌다. 소소한 성취감을 맛보고 출근했다. 그때부터 걷기 매력에 빠져들었다.
집 옆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 트랙을 돌기도 하고 과수원 길을 걷기도 했다. 봄에는 귤향기를 맡으며 가을에는 돌담을 덩굴째 넘긴 노랗게 잘 익은 귤을 따먹고 싶은 유혹을 참으며 걸었다. 꿩이 푸드덕 날아올라 놀라기도 하고 과수원을 지키는 개들이 컹컹 짖어대 마음 졸이기도 했다. 동네 곳곳 나만의 걷기 코스를 개발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제주 시내였지만 외곽이라 공원 하나 없어서 아쉬웠는데 지금은 다시 찾고 싶은 그리운 산책길이다.
인천에 올라와서도 걷는다. 도시는 밤 산책이 매력적이다. 낮에는 무정하기 그지없는 회색빛 아파트가 밤에는 반짝반짝 다정한 불빛으로 나에게 위로를 건넨다. 적당한 조도의 가로등 불빛은 사색하기 좋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서해바다를 보며 인천대교를 벗 삼아 걷는다.
집안 꼴이 보기 싫을 때도, 핸드폰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 때문에 속이 답답할 때도,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을 때도 밖으로 향한다. 계절을 느끼기 위해서도 걷는다. 동네에 새로운 가게가 생겼는지 어디가 맛집인지 궁금해서도 걷는다. 요즘은 축구 삼매경에 빠진 아들이 풋살장으로 나를 이끄는 바람에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걷는다.
걸으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복잡할 땐 걷는 게 특효약이다. 머릿속 꼬인 회로와 마음속 응어리가 걷힌다. 마음이 정리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요즘은 글 쓰는 사람이 된지라 걷다보면 글감과 문장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빨리 걷지는 않기에 운동 효과는 별로 나지 않지만 명상 효과는 탁월하다. 나에게 걷기는 마음 근육을 키우는 시간이다.
언젠가 명상을 넘어서서 수행자가 되어 걸어보고 싶다. 많은 이들이 떠나는 산티아고 길에 가보고 싶다. 걷고 또 걸어서 군더더기 없는 상태가 돼보고 싶다.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