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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념일

by 바람꽃

2024.12.29. 일요일 맑음 – 제주항공 사고 발생


오늘은 남편과 결혼한 지 28년째 되는 날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연말이 되면 남편은 하루도 연가를 낼 수 없을 만큼 직장 일이 정신없이 바빴고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서 특별히 기념일을 챙기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시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시고 애들도 타지에 있는데다가 남편도 다른 부서로 이동한 덕분에 연말에 쉬어도 딱히 걸릴 것이 없으므로 모처럼 우리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기 위해 무안 공항 근처에 있는 황토 갯벌 캠핑장 카라반을 예약했다.

평상시에는 카라반 금액도 비싸서 예약하기가 쉽지 않은데 일요일부터 날을 정하면 거의 절반 이상이 할인되므로 평일 하루 근무를 접고 후딱 예약을 했다.


하얀 눈은 별로 안 왔지만 지나가는 한해를 되돌아보며 다가오는 새해를 기쁘게 맞이할 요량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청소를 마치고 캠핑장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갑자기 “이게 머여?, 가짜 뉴스여?” 하면서 뉴스 속보를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한쪽 귀로는 온 신경을 TV에 집중하고 마음속으로는 '그래도 캠핑은 갈 수 있겠지...' 생각하며 안 들리는 척 열심히 짐을 챙겼다.

그런데 다른 채널을 확인해 봐도 역시나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사망자가 28명이라고 해서 그나마 다행히 ‘다른 분들은 살았나 보다’ 라고 짐작했었다.

남편은 '우리가 예약한 캠핑장이 바로 인근 지역이고 큰 사고가 났는데 캠핑을 취소해야 하지 않겠냐?'며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타도 가지고 가서 띵까띵까 연습도 하고 별님, 달님 보면서 소원도 빌고 드넓은 바다 위에 떠오른 희망찬 일출을 바라보며 내 마음에 가득 담아 올 소소한 계획들을 가득 세웠으나 '큰 사고가 발생했다고 하니 기타는 놓고 가야겠군...' 이렇게 양보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교통도 통제되고 분위기가 더욱 심상치 않아져서 '정말 취소해야 하나?' 고민했다가 사고의 규모가 생각보다 점점 심각해지자 '이제는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결국 어쩔 수없이 캠핑을 취소했다.


바리바리 챙겼던 짐을 다시 제자리에 정리하고 나니 뉴스 보는 일 외엔 딱히 할 일도 없고 기분이 다운되기도 해서 분위기도 전환하고 바람도 쐴 겸 남편과 무작정 집을 나섰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산책만 하려고 했는데 여기저기 들르다 보니 만보를 넘어 섰고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많이 걸었다. 자칫 우울할 수도 있었을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조금 무거운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단둘이 동네 주변을 넓게 돌아보며 상쾌한 바람과 자연을 즐기면서 가장 개운한? 데이트를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내가 아는 지인 서너 명도 여행객 중에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다들 애들도 있고 좋은 사람이었다는 기억이 한켠에 남아 있어서 생각할수록 믿기지가 않고 정말 남 일 같지 않았다.

2년 전에 친정 부모님을 4일 사이로 모두 보내고 작년에는 시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이별이 얼마나 슬프고 허망한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생판 남인 나도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한데 남은 유가족들은 얼마나 황망하고 막막할까 싶어 감히 그 마음을 상상할 수도 없을뿐더러 한없이 빠져드는 슬픔의 골이 얼마나 깊을지 절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었다. 부디 유가족들이 하루빨리 슬픔을 이겨낼 수 있길 기도했다.


여기에서 처음 하는 고백이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문득, 자주 했던 생각이 있다.

'요즘처럼 종잡을 수 없는 기후 변화나 교통 사고, 지진 등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복잡한 세상 속에서 가족 간에도 마음 한곳에 고이 접어놓은 속 얘기들을 미리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혹시라도 엄마가 먼저 먼길 떠나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엄마는 너희들이 내 아이여서 너무 좋았고 우리 가족 덕분에 충분히 행복했고 한세상 즐겁게 열심히 잘 살았으니 많이 감사하다고. 다들 남은 인생도 더욱 즐겁게 잘 살고 오래 있다가 오라고. 그리고 아주아주 많이 사랑한다고!'


다음 날도 주위 상황과 아무 상관없이 여전히 해는 다시 떠올랐고 별일 없었다는 듯 새날은 다시 시작되었다.

산책하는 길에 한 줌 바람에도 힘차게 돌아가는 여러 색깔의 바람개비를 보면서 문득 임형주의 '천개의 바람이 되어' 노래가 생각났다.

천개의 바람이 슬프지 않도록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슬픔이 더 작아지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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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희생자 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와 애도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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