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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봄날

창작 소설

by 바람꽃

매년 4월 첫째 주 토요일, 숙영이네 네 자매는 전주에서 모인다.

부모님의 산소가 선산에 있기도 하고 마지막 살아계실 때까지 추억을 가득 담은 발자취가 여기저기에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3주기가 되었다.

비가 와서 날씨는 별로였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 만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했다. 부모님이 단골이었던 식당에 먼저 도착한 숙영은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겨본다.


“숙영아~”

“집에 아무도 없냐?”

“요놈의 가시나가 집 비워놓고 또 어디 나갔다냐? 들어오기만 해봐라!”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밖에서 친구들과 공기놀이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말괄량이 아이처럼 동네 구석구석을 뒤지며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닐 즈음에 아버지는 숙영이에게 ‘집 비우지 말고, 전화 잘 받으라’는 심부름을 시키셨다.

“숙영아~~ 놀자.”

“어? 나 집 봐야 헌디.”

“인선이랑 현지랑 모두 모였어. 빨리와, 공기놀이 하게.”

“안된디... 아버지한테 들키면 이번엔 진짜 맞을 수도 있당께.”

“집 근처에서 놀다가 느그 아버지 보이는 것 같으면 얼른 들어가믄 되지”

“나 전화도 받아야 한당께.”

“그럼 안올거여? 좀 전에 유미도 온다고 했는디 그럼 니 빼고 우리끼리 논다.”

“아니, 잠깐만... 그럼 쪼금만 놀아 보까?”

결국 친구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몰래 나가서 놀다가 혹시라도 중요한 전화를 받지 못했거나 직장에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오신 날에 들키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혼이 났다.

어릴 적 숙영의 간절한 소원은 ‘선 없는 전화기가 빨리 발명되어 밖에서 놀아도 전화 받을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숙영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마을 끝쪽에 위치한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산 쪽으로 올라갈수록 맑은 계곡물이 있어 한여름에도 남자아이, 여자아이 구분할 것 없이 함께 어우러져 물장구를 쳤고, 평소에는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을 인근 공동묘지를 무척 두려워하면서도 정월대보름 등 특별한 날이 되면 도깨비가 나타날 것만 같은 무서움을 참고 다 찌그러진 깡통에서 타오르는 작은 불씨에 의지한 채 들로, 산으로 언니 오빠들을 따라 잡기놀이를 하면서 밤새 돌아다니기도 했다.

숙영의 집은 높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거의 정사각형 구조다.

아래쪽은 항상 시끄럽게 울어대는 돼지우리가 있었고 왼쪽엔 사글세라도 챙기기 위한 두 개의 방이 딸린 낡은 별채가, 오른쪽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과 무엇이든 갈아주는 오래된 절구통, 그리고 해마다 분홍빛 새콤달콤한 앵두를 내어주는 커다란 앵두나무가 있어 유일하게 혼나지 않고 마음껏 담장을 오르며 시원한 바람을 즐길 수 있는 최애의 공간이 오래도록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마당 한켠에는 농사 도구를 비롯해 온갖 잡동사니들이 늘어져 있는 창고가 있었는데 항상 어두컴컴해서 귀신이 나올까봐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또 친구들과 숨바꼭질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그리고 잡풀이 가득한 널찍한 마당 한 가운데에는 먼지 풀풀 날리는 콩깍지나 참깨 등 갖가지 곡식들이 뜨겁게 쏟아지는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잘 여물어가고 있었다.

가끔은 숙영이를 잘 따르던 순둥이 백구와 닭들이 서로 쫒고 쫒기며 활개를 치고 다니는 코믹한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날에는 닭장에 몰래 들어가서 따끈한 계란을 꺼내는 것도 숙영이가 좋아하는 일과 중 하나였다.

어떤 때는 참새를 잡기 위해 소쿠리에 나뭇가지를 엉성하게 걸쳐놓고 실로 묶어 방에서 한참을 기다려 본 적도 있고, 백구가 새끼를 낳으면 너무 예뻐서 오래도록 멍멍이들 곁을 지켰던 옛 추억도 가졌다.


숙영의 식구는 부모님과 딸 넷, 다해서 6명이다.

숙영과 15년으로 나이 차이가 가장 많이 나는 큰언니는 ‘진숙’, 둘째는 12년 차이의 ‘진영’, 셋째는 8년 차이의 ‘진희’, 그리고 한참 아래인 숙영은 언니들의 이름 끝자를 따서 지었다고 했다.

숙영이 언니들과 나이 차이가 많은 이유는 ‘엄마가 종손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종가의 대를 이을 아들을 갖고 싶어 늦둥이를 낳은 것’이라고 했다.

엄마는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툭하면 조상님들 제사를 치러야 했고 잘 알지도 못하는 친척들을 맞이하는 일이 숙영에게는 다반사였다. 그럴 때는 숙영도 엄마를 도와 마당을 쓸거나 풀을 뽑고 온갖 잔심부름을 했다.

꼭두새벽부터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매일 일만 하시느라 손톱이 자랄 새도 없이 거칠어지고 잠들기 전까지도 TV 앞에 앉아 매번 꾸벅꾸벅 졸면서도 채소를 다듬거나 잔일을 하셔서 손톱 밑이 까맸던 엄마의 고된 모습이 중년이 다 된 숙영의 뇌리 속에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어이~~~”

“엄마 어디 갔냐?”

“일하러 가셨어요.”

“마당에 뭣이 이렇게 어질러졌대. 여편네가 그렇게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당께.”

엄마는 밖에서 일을 많이 하시기 때문에 집안을 정리할 여유가 별로 없으셨는데 마당에 잡동사니가 어수선하게 늘어져 있거나 밥알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백구의 밥그릇이 굴러다닐 때면 아버지는 짜증과 함께 보이는데로 발길질을 하셨다.

어둑어둑 해가 질 녘에야 돌아오신 엄마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뒤로하며 마당에 내동댕이쳐진 살림살이들을 대충 정리하고 부산하게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방 안은 TV 소리만 요란하고 밥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윽고 “윽”하는 아버지의 신음소리와 함께 구겨진 인상에 깜짝 놀라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던 숙영은 잔뜩 웅크린 자세로 쥐 죽은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왜그요?”

“또 돌이네. 에이씨, 자네 땜시 내 이빨 다 빠지것네.”

“아따, 잘 씻은다고 씻었는디 왜 맨날 당신 밥에서만 돌이 나온가 모르겄네이.”

“에잇, 나 밥 안먹을라네. 저리 치워부러.”

또 한 번 밥상이 엎어진다.

이럴 때마다 숙영은 차라리 자신의 밥에 돌이 나왔으면 하고 바랬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혹시나 하는 긴장감으로 분위기는 썰렁하고 결국 또 아버지의 성난 마음에 휘발유를 붓는 꼴이 되어버렸다.


숙영의 기억에 오래 남았던 아버지의 모습은, 하루가 멀다하고 엄마와 다투시던 모습, 집을 비워서 자주 혼났던 일, 특히 언니들처럼 공부라도 잘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쳐서 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릴만한 건수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숙영은 아버지와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가로 막고 있는 것처럼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숙영과 아버지의 대화는 가장 단순한 몇 마디, ‘식사하세요, 전화 받으세요, 다녀오세요..’ 정도였다. 아버지는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숙영은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했다.

툭하면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자주 내셔서 가끔은 큰소리에도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마도 가난하지만 너무 아끼고 없이 사는 듯한 가정생활과 아버지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자존심 사이에서의 갈등이 식구들을 더 힘들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도 어릴 적에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지는 바람에 고생하며 자랐다’는 말씀을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숙영은 아버지를 이해하기보다는 엄마를 불쌍히 여겼다. 저렇게 홀대받고 자주 싸우시면서도 왜 같이 사시는 건지 어린 숙영의 마음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숙영의 겉 모습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짠 내 나도록 검소한 성격이나 무엇이든 아끼는 스타일은 엄마를 빼닮았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너무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더 그랬나 싶다.

고등학교 때, 타지역에서 자취를 했는데 용돈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아껴 쓰느라고 쉬는 시간마다 매점으로 달려가는 친구들을 부러운 듯 바라볼 뿐 그 흔한 빵이나 우유를 맘 편히 사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오히려 꼭두새벽에 일어나 도시락 싸기가 귀찮아서 삼일 정도를 쫄쫄 굶고는 맥없이 배고파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처량해서 내내 한숨짓기도 했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먹을 것을 달라고 속절없이 계속 아우성쳐대는 홀쭉한 배를 움켜쥐며 보건실에 누워 한참을 슬피 울었던 아픈 기억이 슬며시 떠올랐다.

“숙영아 용돈 안 부족하냐?”

“아니, 별로 쓸 데도 없어. 난 충분하니까 엄마나 아끼지 말고 맛있는 거 사드셔.”

“배고프믄 빵이라도 사 먹고 돈 부족하믄 얘기 혀.”

“걱정하지마. 용돈 아직도 많이 남았어.”

엄마와 늘상 나눴던 대화다. 주말에 잠시 내려갔다가 다시 집을 나설 때면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라도 꼬깃꼬깃한 잔돈들을 애써 챙겨 주시던 엄마의 정든 모습이 오랫동안 눈에 밟혔다.


언니들은 숙영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일찌감치 친정을 떠나 취직을 했거나 인근 지역에서 학교를 다녔다. 가끔 주말에만 잠깐 들렀다 하룻밤 정도 자고 금방 가버려서 숙영이가 거의 ‘외동딸’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초등학생이었던 숙영은 셋째 언니가 때깔 나는 빨간 뾰족구두를 신고 멜빵이 달린 하늘색 긴 치마와 나풀거리는 하얀 블라우스 위에 더 고급지게 보이는 반짝이는 양산을 쓰고 또각거리며 집에 왔던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기 전,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잠자리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는 학교 안 가?”

“응, 오늘 수업이 없어서 안 가도 돼.”

“수업이 없는 날도 있어? 와~, 좋겠다. 그럼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집에 있을거야?”

“아니, 금방 올라가야지.”

졸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금방 올라간다는 말에 서운함을 느끼며 발걸음을 돌리면서 늦잠을 자고 있는 언니가 무척 부러웠던 오래된 기억을 회상했다.

숙영도 빨리 자라서 언니들처럼 타지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환한 웃음이나 즐거움보다 삶의 전쟁터 같은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 큰언니를 따라 서울에서 며칠을 머물렀는데 형부도 잘해주시고 예쁜 조카도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되었는지 내려오자마자 ‘다시 큰언니 집에 가고 싶다’고 울며불며 떼를 썼던 기억이 아련했다.


엄마는 거의 매일 꼭두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들이나 논으로 일을 나가셨다가 저녁 노을이 물들 무렵이 되서야 땔감이나 수확해 온 작물들을 한 짐씩 이고 지고 들어오셨다. 움직일 때마다 피어오르는 마른 먼지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뾰족뾰족한 도깨비 가시나 거미줄 또는 잡풀 등을 싸디 싼 장식처럼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무거운 걸음으로 들어올 때면 ‘엄마는 왜 저렇게 힘들게 일만 하지?’하며 어린 마음에도 항상 애잔한 마음을 가졌다.

바로 저녁밥을 짓기 위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시커먼 아궁이에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몰아넣으면 자신이라도 엄마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고사리 같은 손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씨를 지키면서 부산하게 움직이시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는 했다.

“엄마, 매일 새벽부터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하면 안힘들어?”

“힘들제, 그래도 니 학교 가고 언니들 시집도 보내려면 열심히 해야제. 어쩌겄냐?”

나와 잠깐씩 대화를 하면서도 엄마의 손놀림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계속 손질하며 늦은 밤이 되도록 멈출지를 몰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5일마다 열리는 재래시장은 숙영이가 가장 좋아하는 날이다.

그날은 엄마와 오랫동안 같이 있을 수 있고 재미있는 장 구경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누렇게 변색되거나 다 떨어져서 꿰매고 늘어진 옷들을 입으셨지만 이 날만큼은 엄마도 깨끗하게 세탁한 긴 치마를 입고 립스틱도 연하게 바르고 숙영을 데리고 외출을 하셨다. 항상 지저분한 수건에 짓눌려 있던 까만 곱슬머리도 오늘은 해방이라는 듯 환한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숙영은 엄마 손을 꼭 잡고 껌딱지처럼 딱 붙어 다녔다. 엄마가 시장에서 한 푼이라도 깍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동안 숙영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시장 안을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쫌만 더 깍아줘~”

“아따, 많이 깍아 줬당께요.”

“그러믄 저거 쪼깐한 거라도 한 개만 더 찡겨줘.”

“오메, 나 이거 다 팔아도 남는 거 하나도 없어라.”

“아따, 짝은 거 하나 찡겨주믄 되제, 디게 그랬쌌네.”

“나도 안팔랑께 차라리 그냥 가쇼.”

서로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면 숙영은 엄마 치마를 붙잡고 그냥 가자고 잡아끌기도 했다. 가끔은 ‘그깟 몇 푼 그냥 줘버리지’ 싶으면서도 그 몇 푼 때문에 악착같이 깍아 달라고 사정하시는 엄마의 모습이 더 애처러워 보이기도 했다.

시장을 대충 돌고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바닥에 버려진 배춧잎이나 시레기 등 온갖 채소 찌꺼기를 모두 챙겨오는 일이었다. 물론 동물에게 주기 위한 먹이도 있지만 깨끗한 것을 잘 골라내면 한 끼 국거리로도 충분하다.


숙영에게는 아버지보다도 엄마에 대한 소중한 추억과 기억들이 가득하다. 엄마를 생각하면 항상 세트로 따라오는 기억들도 있다.

천장이 새까만 부엌 한 귀퉁이에는 잘 쓰지 않는 오래된 그릇들이 담긴 낡은 찬장이 있었는데 제일 윗부분 가장 구석진 곳에 천장만큼이나 색이 어두운 작은 놋쇠 밥그릇이 있었다. 그것은 엄마만의 비밀금고였다. 거스름돈을 받았거나 쓰고 남은 동전은 항상 그 안에 모아 놓으셨다. 동전이 많지는 않아도 바닥을 보이는 날은 거의 없었다.

숙영은 입이 심심할 때마다 까치발을 하면서 최대한 없어진 티가 안나도록 몰래 꺼내어 과자를 사 먹었다. 어렸을 때는 그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몇 번씩 되뇌이면서도 엄마에게 잘못했다고 한 번도 용서를 빌었던 기억은 없다.

숙영은 분명 엄마가 모르실 거라 여겼지만 어쩌면 엄마는 이미 알고도 모른 척하셨던 것 같다. 분명 숙영을 위해 일부러 모아놓은 것이라 생각되었다.


중학 시절 점심시간, 친구들 여럿이 둘러앉아 수다를 떨며 점심을 먹었다.

“와~ 영주야, 햄이 진짜로 맛있다.”

“그치? 우리 엄마가 사이좋게 나눠 먹으라고 넉넉히 싸주셨어.”

“우와, 넌 햄을 매일 먹을 수 있어?”

“그럼, 내일도 싸올테니까 싸우지 말고 먹어.”

숙영은 계란 옷이 입혀진 동그란 햄을 아껴먹으며 마지막 하나를 친구들 몰래 빈 도시락에 감추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도시락을 먼저 꺼내놓고 밭에 나가신 엄마를 기다렸다. 그리고 긴 해가 넘어갈 쯤에야 돌아오신 엄마에게 점심때 숨겨놓은 동그란 햄을 내밀었다.

“엄마, 친구가 햄을 싸 왔는디 너무 맛있어서 엄마 줄려고 갖고 왔어.”

“그래? 아이구, 우리 딸 이뿌기도 하지. 근디 냄시가 이상하다.”

“응? 어, 이상하다. 아까는 분명히 맛있었는디.”

“오메, 날이 더운께 상해부렀는갑다. 아까와도 어쩌겄냐. 백구나 줘부러라.”

그랬다. 아껴서 몰래 숨겨온 햄은 이미 상해있었다. 많이 속상했다. 그리고 다시는 아무리 맛있는 반찬이 있어도 절대 담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으면서도 가족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셨다. 어려운 형편에도 편식이 심한 숙영을 위해 계란 반찬을 빠지지 않고 도시락에 챙겨 주었고 아버지가 월급을 주시면 꼬박꼬박 새 옷도 사 주셨다.

숙영에게 엄마는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에 대한 사랑과 희생’이라는 아이콘으로 강하게 남아 있었지만 아버지의 이미지는 폭력으로 얼룩진 일상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베풀기는 잘하셨으나 속엣말을 참지 못하고 바른 말씀을 자주 하셨다. 성격도 급하셔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모르므로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식구들은 긴장 모드가 된다.

손주들이 밖에서 놀다가 방문을 제대로 안닫고 들어오거나 조금만 시끄럽게 해도 바로 언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오랜만에 찾아온 식구들도 친정에 오랜 시간 머물러 있기가 불편했다. 숙영은 친정에 가려면 한나절은 걸리기 때문에 항상 1박을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조금 힘들어도 언니들처럼 잠시 머물렀다 내려오게 되었다.

항상 버선발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엄마에게 많이 미안했지만 그것이 서로를 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고된 직장 생활을 오래 하셔서인지 아니면 장손이어서인지 황소처럼 고집스럽고 성격이 많이 강하셨다. 표현이 조금 거칠어서 주변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셨다. 어쩌면 그래서 엄마도 친하게 지내시는 이웃이 별로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두 분이 노년이 되어서도 경제적으로 여유는 있었지만 연세가 많아질수록 갈 만한 곳도, 할 수 있는 일들도 점점 줄어들었다. 자주 드나들던 운동모임에서는 다칠 수도 있으니 이제 무리한 운동은 안된다며 눈치를 주기도 했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면서 아버지에 대한 숙영의 감정도 물감 번지듯 점점 희미해져 갔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보니 ‘어린아이 시선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겠구나’ 싶었다. 힘들어도 참고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고운 정, 미운 정이 함께 섞여 그저 묵묵히 살아내는 복잡한 상황과 감정들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숙영도 나이가 들면서 ‘이제야 철이 드는 건가?’ 생각되었다.

가끔은 늦둥이인 숙영이가 ‘아들이 아닌 딸이어서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건 아닐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렇게 죄인 아닌 죄인처럼 스스로를 옥죄며 죄송한 마음을 갖기도 했다. 그래서 숙영은 ‘아들 몫까지 더 효도하고 잘 해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특히, 숙영은 신랑감을 고를 때 자신보다 나이가 좀 많아서 식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웃음도 많으면서 음악을 좋아하는 자신의 성향과 비슷한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았다.

대학교 때 과 선배를 만나고 ‘아, 이 사람이다’ 싶어 직장에 취직하자마자 부모님께 소개를 시켰다. 다행히 부모님도 모두 좋아하셨다. 선배는 숙영에게 ‘내가 아들 몫까지 다 하겠다’며 숙영을 위로해 주고 부모님을 많이 챙겨줬다.

결혼 후에도 숙영은 친정이 조금 멀기도 하고 오가는 게 번거롭기도 해서 자주 가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남편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들르자’고 했다.

친정에 가면 마당 청소부터 온갖 잡일을 도와드리는데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아버지 비위를 맞춰주고 잘 헤아려줘서 많이 고마워했다. 다행히 아버지도 아들 하나 얻은 듯 속얘기도 많이 하시고 볼 일이 있으면 남편과 동행도 자주 하시고 많이 의지하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가시고 싶다’는 바램을 비추시더니 갑자기 밭과 집을 모두 팔고 시골로 이사를 하셨다.

가족들은 엄마가 이제 더 이상 힘든 농사일을 안해도 되고 편히 살게 되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생 땅과 흙 속에 파묻혀 사시던 엄마가 갑자기 항상 해 오던 일손을 놓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자니 오히려 적적해하고 내내 헛헛해하셨다.

마치, 앞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던 배가 더 이상 노를 저을 필요가 없어 목적지를 잃고 표류하는 것처럼 엄마는 최근의 기억들을 하나씩 홀연히 떠나보내고 있었다.

갈수록 기억이 가물가물하셨지만 엄마에게 전화를 하면 숙영의 목소리는 또렷이 잘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

“어~ 숙영이냐?”

“잘 지내셨어?”

“어.”

“식사는 했어?”

“그럼.”

“무슨 반찬에 먹었어?”

“글쎄.. 생각이 잘 안나네. 그냥 이것저것 먹었제”

“나 안보고 싶어?”

“보고싶제. 언제 올래?”

“조만간 갈게.”

“머 먹고 싶은 거 없어?”

“어. 여기 먹을 거 많은께 암것도 사오지마.”

“나 갈 때까지 건강하게 잘 계셔.”

“그래. 너도 잘 있어.”


초고령화로 접어들자 엄마는 치매가 심해지셔서 복지센터에서 케어를 받아야 할 정도까지 되었고 혼자 집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버지 역시 해가 지날수록 바깥출입도 힘들어하시고 더 외롭고 고독한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코로나19가 한참 기승을 부릴 무렵, 숙영의 친정 부모님도 엄마부터 차례로 코로나에 걸리셨다.

엄마는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퇴원을 하셨지만 후유증이 남았었는지 몇 달 후 아무런 유언도 없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자식을 위해 온전히 희생하신 숙영의 엄마는 고운 주름 속에 잔잔한 미소를 간직하신 채 그렇게 조용히 떠나셨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너무 허망하고 미안한 마음에 숙영은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생각해 보니 엄마에게 딱히 잘 해드린 기억이 없는 것 같아 더 많이 서글펐다.

‘부모는 마냥 기다려 주지 않는다’더니 숙영의 엄마가 돌아가신 후 4일 새로 아버지마저 급하게 떠나셨다.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전하지도 못했는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숙영은 부모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도 제대로 배웅하지 못한 것이 더 마음 아팠다.

숙영에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두 분이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나셨을테니 이제는 아프지 않고 행복하시기만을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숙영의 기억 속 엄마와 아버지는 웃는 날보다 싸우는 날이 더 많은 고된 인생살이였다. 고단한 삶의 무게를 각자의 어깨에 한 짐씩 짊어진 채 힘들게 살아가는 부부였지만 또 반면에, 그래서 서로에게 오랜 느티나무처럼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른 봄은 친정 식구들의 계절이 되었다.

가장 먼 곳에서 사는 큰언니의 차편이 조금 연착되는 바람에 늦은 점심을 부랴부랴 먹고,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시던 친정엄마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산소로 향했다.

엄마와 아버지가 계신 곳은 잔잔한 푸른빛 호수가 눈앞에 바로 내려다보이고 드넓은 평야와 초록빛 산자락이 맞닿아 있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훌륭한 경치를 자랑했다. 산소 주변에는 해마다 새로운 계절을 알려주는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찾아갈 때마다 분위기가 새롭고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해마다 4월이 되면 여기저기서 날 좀 봐달라고 기웃거리는 작은 꽃망울들과 잔잔한 바람에 흩날리는 꽃비를 맞으며 부모님을 기억하고 언니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많이 설레기도 했다.

약간은 시린 바람이 남아 있지만 봄의 초입에 들어서는 이 시기에는 예쁜 벚꽃과 이름 모를 다양한 봄꽃들이 가는 곳마다 가득 피어 있어 부모님이 마지막 길 가시면서 숙영의 자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남겨주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년에는 겨울 동장군이 늦장을 부린 탓에 꽃들을 많이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올해는 그야말로 가는 곳마다 사방이 꽃들의 천국이었다.

“엄마, 아버지, 잘 계셨어?”

“작년 추석에 뵙고 벌써 반년이 지났네.”

“나 많이 보고 싶었지? 늦어서 미안!”

“겨울에 많이 춥지는 않으셨어?”

“지금은 따스한 봄바람도 불고 꽃도 많이 피었어. 너무 예쁘지?”

“두 분이 돌아가신 지가 벌써 3년이 되었어. 시간 정말 빠르다. 그치?”

“식구들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두 분 앞에 모였어.”

“엄마, 아버지도 이제 우리 걱정은 그만하시고 편히 잘 지내.”

숙영의 언니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고생한 기억이 대부분이어서 ‘생각할수록 가슴 아프고 애처롭고 측은하다’고 했다.

부모님과 함께 했던 오래된 추억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한 가족이어도 서로에 대한 기억과 감정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저장되어 있음을 느꼈다.

오늘은,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즐거웠던 순간들과 사연을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다독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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