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소설 1
내가 10살쯤인가?
아빠가 퇴근하시면서 조그마한 택배 박스를 조심스럽게 들고 들어오셨다. 박스 안에는 까만 털이 몽실몽실하고 모양이 둥그스름한 작은 동물 한 마리가 고개를 바닥에 닿을 만큼 푹 숙인채 바짝 긴장한 자세로 웅크리고 있었다.
“아빠 이게 뭐에요?”
“현서가 뭔지 맞춰볼래?”
“만져봐도 되요?”
“그럼, 물지 않을테니 만져보고 맞춰봐”
“너무 작아요. 앗, 아기 고양이네요?”
“맞아. 현서 고양이 좋아하니?”
나는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동물을 말도 없이 집에 데리고 오면 어떡해요?”
“아이쿠 깜짝이야, 거 내 친구 상섭이 있잖어. 옆 동네 전원주택에 살고 당신도 친구들 모임 때 가끔 봤던.”
“그런데요?”
“그 친구가 고양이를 키우는데 새끼를 7마리나 낳았다잖아, 현서도 있고 하니 나한테도 한 마리 분양해 준다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진짜로 우리 회사로 가져왔지 머야.”
“야 신난다. 그럼 이 고양이 이제 우리 식구에요?”
“그래. 현서가 잘 키워볼래?”
“좋아요.”
엄마는 인상을 잔뜩 찌뿌리셨다.
“아유, 동물 하나 키우려면 돈도 많이 들고, 냄새도 나고 잡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못키워요. 당장 가져다 주던지 다른 사람 주던지 해요.”
“허 참, 친구한테 받은 선물을 어떻게 다시 돌려주라고 그러나.”
“엄마, 제가 키울께요. 제가 똥도 치우고 밥도 줄께요. 제발 보내지 말아요.”
‘장화 신은 고양이’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가장 측은하게 보일듯한 눈빛을 보내며 겨우겨우 졸라서 까만 꼬맹이는 결국 우리 식구가 되었다.
사실은 며칠 전에 아빠가 살짝 내게 귀띔을 해주셨다.
“현서야, 혹시 너 동물 키워볼 생각 있니?”
“동물요? 어떤 동물이요?”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빠를 쳐다봤다.
“무슨 동물이 키우고 싶은데?”
“음.. 강아지요. 저번에 제 친구가 강아지를 보여줬는데 너무 예뻐서 엄마한테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했더니 엄청 화내셨어요.”
“그래? 그럼 쉿, 엄마가 아시면 데리고 오기도 전에 절대 안된다고 반대할게 뻔하니 우선 우리끼리 비밀로 할까?”
나는 아빠와 새끼손가락을 걸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리고 아빠와 나 우리 둘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설레는 마음으로 어떤 동물이 올지 무척 궁금해하며 손꼽아 기다렸었다.
이름은 ‘까망이’로 했다. 조그만 눈도 몸도 온통 새까맣지만 그래서 더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엄마는 까만색이어서 싫고 털이 빠진다고 짜증을 팍팍 내셨지만 내가 사료도 주고 똥도 잘 치웠더니 다행히 버리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내가 잘 놀아줘서인지 까망이는 나를 무척 잘 따랐다. 말 못하는 동물이어도 눈치가 있어서 엄마 곁에는 거의 가지 않았다.
까망이 성격은 나를 닮았는지 무척 소심했다. 조그만 인기척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특히 청소기를 가장 무서워했다. 나는 강아지처럼 밖에 데리고 나가서 함께 산책도 하고 놀아주고도 싶었지만 작은 소리에도 너무 무서워하는 성격 때문에 할머니 댁에 며칠 놀러 가더라도 밥만 챙겨주고 혼자 남겨둬야 할 수밖에 없었다.
식성도 무척 까다로워서 생선을 눈앞에 두고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학교에서 집에 오면 어느새 내 발소리를 알아들었는지 문 앞에서 반겨주었고 학교에 가려고 신발을 신으면 내게 다가와 꼬리를 문지르면서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 주었다. 가끔 힘들거나 속상할 때도 따스함으로 나를 안아주고 위로해 주었다. 우린 그렇게 오랜 시간 단짝이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까망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더 줄었다. 새 학교에 적응하느라 조금 바빴던 어느 날,
“까망아~, 까망아~”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달려와 안기지는 않아도 문 앞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내 주변에 줄곧 머무르던 까망이가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계속 이름을 부르며 집 안에 숨을 만한 곳을 뒤져보니 내 옷장 안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다.
“까망아, 왜그래? 어디 아파?”
밥그릇을 보니 밥도 거의 안 먹고 왠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엄마 까망이가 이상해요.”
“어? 뭐가 이상해?”
“사료도 많이 남아 있고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게 어디 아픈 것 같아요.”
“아휴, 정말 가지가지 한다. 그럼 어떡해? 시간이 늦어서 오늘은 병원 문 다 닫았을텐데?”
“내일 학원 빠지면 안돼요?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아요.”
“낼모레 당장 중간고사를 봐야 하는 학생이 고양이 때문에 학원을 빠지겠다고?”
“그럼 어떻게 해요? 엄마가 혼자 병원에 데리고 갈 수 있어요?”
“아 싫어. 엄마는 고양이 싫단 말이야.”
“그러니까 내일 같이 병원에 데리고 가게요.”
“알겠어. 어서 씻고 밥이나 먹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응급실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근처에 밤새 운영하는 동물병원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지켜보기로 했다.
다음날, 까망이가 걱정되서 수업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 학교가 끝나자마자 숨 한번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려서 일찍 집에 돌아왔다. 까망이 밥그릇에는 그나마 유일하게 좋아하던 간식도 그대로 있고 숨 막히는 옷장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까망이를 보니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아 나까지 눈물이 나려고 했다.
“엄마가 아팠어도 저렇게 신경이나 썼을까?”
엄마의 핀잔을 들으며 까망이를 캐리어에 담고 급하게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 선생님은 까망이를 요리조리 진찰하시면서 열이 있으니 일단 주사를 맞고 잘 지켜보라고 하셨다.
집에 돌아온 까망이는 기운이 없는 채로 축 늘어져 자꾸만 숨으려고 했다.
“까망아. 제발 아프지마. 네가 아프면 내 마음도 아프단 말이야.”
까망이가 좋아하는 쿠션 침대를 내 옆으로 바짝 붙이고 밤새 뒤척이는 냥이를 비몽사몽간에 지킨다고 지켰지만 내내 거친 숨을 내쉬던 까망이는 결국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너무 슬프고 눈물이 나서 학교도 가지 않고 까망이와 함께 찍었던 사진만 붙잡고 내내 울었다. 엄마는 ‘고양이 때문에 학교를 안가냐’며 나무라셨지만 그건 까망이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항상 내 옆에 머무르며 따스한 체온을 나눠주고 다정한 눈빛을 보내주던 까망이가 금방이라도 어디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데 이젠 내 곁에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고 더 많이 놀아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생각만 가득했다.
“오늘만 봐준다. 오늘까지만 많이 슬퍼하고 내일부터는 모두 잊고 공부만 하기다.”
엄마는 하나도 안슬픈가 보다. 맨날 공부만 중요하게 여기는 엄마가 많이 미웠다.
그렇게 나에겐 까망이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다른 동물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그래서 아픈 동물을 치료해 주고 싶고 주인이 없거나 케어가 필요한 동물들을 보살펴주고 싶다는 마음이 언제부턴가 내 안에서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러면 우리 까망이가 하늘에서 나를 이해해 주고 용서해 줄 것만 같았다.
딸과 말을 섞지 않은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사춘기도 별로 심하지 않게 지나서 순하다고 생각했는데 무엇이 불만인지 갑자기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내내 침묵으로 나에게 항의 중이다.
요즘은 필요한 말이 있으면 문자로 한다. 내가 식모도 아니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잠도 자지 않고 기다리는데 누굴 닮아 이렇게 고집이 세고 까칠한지. 하긴 나를 좀 닮은 것 같긴 하다. 대학 입시 준비로 더 민감해진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한 번 더 참고 봐주고 있다.
나는 직장에서 파트 타임제로 일을 하고 있다. 원래는 종일 근무로 서비스업을 했었는데 요즘은 예전에 비해 회사 규모도 작아졌고 인력이 너무 많아서 교대 근무로 바뀌었다.
딸은 고등학교 2학년. 성적은 아주 상위는 아니고 그냥 조금 잘하는 정도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금방 한 손가락 안에도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요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지켜보는 내 속도 말이 아니다.
상황이 꼬여버린 배경은 대충 이렇다.
최근에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딸 친구의 엄마들과 차를 마신 적이 있었다.
엄마들끼리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지만 학부모 임원으로 만났다가 지금까지 연을 이어오고 있다.
딸의 친구는 거의 탑을 놓치지 않는 멋쟁이 승준이와 딸이 친하게 지내는 연희와 몇 해 전, 더 좋은 동네로 이사를 간 주희인데 엄마들 역시 나와 비교하면 훨씬 멋쟁이이고 직장에서도 높은 직위에 있어 다들 나보다 더 잘나가는 것 같았다.
승준 엄마는 집에만 있으면서 가사 도우미도 부르고 대기업 간부인 남편 덕에 목에 힘주고 다닌다.
예전에는 애들 성적도 고만고만하고 엄마들도 마음이 맞는 것 같아서 편하게 만났는데 요즘은 괜히 내가 더 초라해 보이는 것 같고 스스로 불편함을 느끼는 참이었다. 애들이 3학년이 되면 바쁘다는 핑계로 ‘모임도 그만 할까?’ 생각 중이다.
연희 엄마와 주희 엄마가 먼저 도착해 있어서 함께 차를 마시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는데 제일 잘나가는 승준 엄마가 역시나 누구나 알아주는 브랜드를 온몸에 휘감고 10분 늦게 나타났다.
“어서 와요 승준 엄마.”
“아유, 반가워요. 역시 나를 제일 반겨주는 사람은 주희엄마라니까. 다들 잘 지냈죠?”
“네, 우리도 이제 막 시작했어요. 뭐 드실래요?”
“요새 보약을 먹어서 차가운 음료는 안되고 따뜻한 레몬차로 할께요.”
“왜요? 어디 아파요?”
“아뇨. 요즘 내가 골프를 치느라 무리를 좀 했더니 우리 남편이 보약 한 재 먹으라잖아요.”
“아...”
다들 더 이상 얘기해 봐야 득 될 것 없다는 표정이었다. 평상시에는 주로 승준네가 말을 많이 하는데 오늘은 주희네 이야기에 관심을 모았다.
“주희는 학원 옮겼다더니 어때요? 잘 적응하고 있어요?”
이사한 후 주희의 성적이 올랐는지 무척 궁금해서 내가 먼저 운을 떼었다.
“네, 처음에는 조금 힘들어하는 눈치였는데 지금은 적응을 했는지 성적도 오르고 있고 이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그래요? 그럼 우리 연희도 그쪽으로 전학을 시켜볼까?”
“이사했다고 성적 오르면 우리도 어서 짐 싸야겠네요.”
농담인 듯 웃음을 지었지만 내 속 마음은 정말 이사를 가야하는지 하나씩 재보고 있었다.
“승준이는 여전히 탑인가요?”
승준이와 보이지 않게 약간의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는 주희 엄마의 질문이었다.
“어우, 말도 말아요. 나도 최근에 과외 선생을 바꿔 줬더니 공부하느라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승준 엄마는 좋겠어요. 아들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핀다니까.”
“현서 엄마는 어때요? 현서도 잘하고 있죠?”
현서와 친하게 지냈던 연희 엄마가 현서의 안부를 물었다.
“아니요, 요즘은 때아닌 사춘기가 왔는지 말도 잘 안하고 집에 오면 방문 걸어놓고 있어서 저도 얼굴 보기가 하늘에 별 따는 것 보다 어려워요.”
“현서도 힘들어서 그럴거에요. 잘 위로해 주세요.”
“저도 힘드네요. 어디다 속 터놓고 얘기할 수도 없고 남편은 자꾸만 그냥 지켜보라고만 하고.”
“다 그렇쵸. 애들 좋은 대학 보내려고 다들 속이 시커멓게 뭉그러져도 웃으면서 그냥 참고 있는거죠.”
엄마들끼리의 유일한 모임인데도 다녀오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쌓이는 것 같고 괜히 시간만 버리는 것 같아 ‘그만 나갈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도 가끔은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할 수 없이 만나고 있기는 한데 여전히 다녀오면 벌레를 씹은 듯한 찝찝한 느낌이다.
그래서 그날 학교에서 돌아온 현서에게 화풀이를 조금 하기는 했다.
“현서야, 이리 앉아봐.”
“왜? 나 공부도 해야하고 피곤한데.”
“엄마가 오늘 니 친구들 엄마를 만났어.”
“근데? 왜 승준이가 또 1등 했대?”
“그렇지. 승준이는 항상 1, 2등 하고 특히 주희가 이사를 가서 학원을 바꿨는데 성적이 많이 오르고 있다잖니. 우리도 이사갈까?”
“아빠는?”
“아빠는 버스 한 번 더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고 출근하면 되지.”
“나 영어 학원 바꾼지도 별로 안됐어. 이사한다고 성적 오르면 다 서울대 가게? 엄마, 그거보다 내가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를 만들어줘.”
“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 스카이도 좋지만 수의대 가고 싶어.”
“뭐라구? 갑자기 왠 수의대?”
“엄마도 알잖아. 내가 동물 좋아하는 거.”
“동물은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지. 그럼 다른 사람들도 다 수의대 가겠네?”
“그 말이 아니잖아. 난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걸 말하는 거야.”
“왜 꼭 수의대여야 해? 법대도 좋고 의대는 더 좋고... 뭐야, 여전히 까망이 타령이야? 그건 잠깐의 추억이야. 왜 아직도 그 기억을 붙잡고 있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동물들 옆에서 보살펴주고 지켜주고 싶은 거야.”
“됐어. 동물 얘긴 이제 그만해. 엄마는 동물 싫어.”
“엄마가 동물 싫다고 나까지 동물 싫어해야 해?”
그렇게 서로 자기가 원하는 것만 이야기하다 결국 딸과의 사이는 보이지 않는 유리 벽이 두껍게 내려앉은 듯 점점 멀어져만 갔다.
며칠 후, 나와 딸 사이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음을 눈치챈 남편이 내게 물었다.
“현서와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 아냐, 별일 없었어.”
“아닌 것 같은데...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아니, 현서가 계속 수의대를 가고 싶다고 그러잖아.”
“수의대?, 그런데?”
“뭐가 그런데야, 왜 꼭 수의대여야 하냐구? 예전에 까망이 키운 거 그거 때문에 자기가 동물을 엄청 좋아한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 감정 하나로 수의대 간다는 게 말이 돼?”
“말이 왜 안되는데?”
“뭐야, 나하고 말장난해?”
“아니, 난 궁금해서 당연한 질문을 하고 있다구. 왜 그게 말이 안되지?”
“우선 내가 동물이 싫어. 그리고 현서는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충분히 의대나 법대도 목표로 할 수 있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냐구.”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현서는 모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이제 막 무엇인가를 시도해 보려고 애쓰는데 당신이 미리 판단하고 애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은 안해봤어?”
“뭐라구? 내가 왜 현서 앞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해?”
“여보,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좀 들어봐. 어느 누구든 자신이 해본 것, 관심 있는 것,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싶어하기 마련이야. 특히 현서는 어렸을 적에 까망이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데 당신이 무조건 안된다고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들어?”
“아니, 좀 더 노력하면 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는데 왜 미리 포기하는 건데?”
“그건 포기가 아니라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거야.”
“당신은 왜 현서 편만 들고 그래.”
“편을 들다니? 오히려 내가 제 3자의 입장에서 아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거라고.”
“그래서 그냥 현서가 하고 싶은 거 하도록 저렇게 내버려둬?”
“무엇인가를 하다 보면 아이들의 꿈은 언제라도 바뀔 수도 있고 또 안바뀌더라도 나쁜 짓하는 게 아니고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겠다는데 왜 못하게 하는데? 난 하얀 가운 입고 힘없는 동물들 진찰해 주는 수의사가 더 좋아 보이는구먼. 현서를 한번 믿어봐. 우선 하고 싶은 대로 팍팍 밀어주고 응원해 주자구.”
“당신은 맨날 착한 역할만 하고 난 왜 나쁜 역할만 하는 것 같지?”
남편과 대화를 마치고 내 딸의 미래를 위해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지 고민하느라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 그리고 이제는 현서와 제대로 얘기를 해보자고 생각하던 참에 마침 현서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드디어 2학기 중간고사 성적표가 나왔다. 성적이 조금 오르긴 했지만 엄마가 보내고 싶어 하는 대학의 점수에는 한참이 부족했다. 나는 평소에도 동물들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아 내가 원하는 학과를 선택하고 싶은데 엄마는 자꾸만 내가 전혀 관심없는 다른 학과를 강요하신다.
오늘은 용기를 내어 내 진로에 대해 차분히 말씀드려볼 참이다. 엄마와 다툰 이후로 속상한 마음에 집중이 안되서 오히려 성적이 더 떨어지기도 했다. 엄마 역시 나를 위해 매일 잠도 못 자고 고생하시는 것을 알지만 내 마음을 전혀 이해해 주려고 하지 않는 바람에 괜히 걱정시키고 짜증을 부렸다. 더 이상 엄마와 이런 불편한 관계로 지내고 싶지 않다.
고민은 이제 그만! 부모님께 행동으로 보여줄 때가 되었다.
‘까망아, 너도 하늘에서 날 응원 해 줄거지...?’
“엄마, 나 할 말 있어.”
“그래. 어서 들어와. 엄마도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무슨 말인데 너부터 얘기해 봐.”
“나 중간고사 성적 나왔어.”
“어? 그래? 어디 보자, 어째 넌 맨날 거기서 거기니? 승진이네 엄마는 맨날 탑이라며 자랑하는데 난 너 때문에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잖니.”
“수학 점수가 이렇게 떨어지면 대학에 들어갈 수나 있겠어? 수학 학원 바꿔야겠다.”
나는 엄마의 꾸중에 또 심술이 나기 시작했다.
“수학 학원 안바꿔도 돼. 내가 못하는거지 수학 선생님이 못가르쳐서가 아니야.”
“왜 못하는데? 너 머리 나쁘지 않잖아. 좀 열심히 해서 성적 좀 팍팍 올려보란 말이야. 엄마도 자랑 좀 해보게.”
“엄마는 자랑할려고 나 낳았어?”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엄마는 딸 덕분에 자랑도 하고 얼굴 빳빳이 들고 다니면 안돼?
내 딸 공부 못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고개 숙이고 다니는 것 보단 백배 낫지.”
“엄마는 정말 대화가 안돼.”
“뭐야? 너 엄마한테 말하는 버르장머리가 그게 뭐야?”
“엄마는 내가 뭘 좋아하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 봤어?”
“그런게 왜 중요해? 하고 싶은 건 언제든 취미로 할 수 있잖아. 취미도 돈이 있어야 하는거고. 의사나 변호사 정도는 되줘야지. 내가 학원을 안보내줘, 그것도 아니면 네 뒷바라지 해주는 부모가 없어, 뭐가 부족해?”
“난 동물이 좋아. 수의대에 가고 싶단 말이야”
“니가 세상을 잘 몰라서 그래. 수의사 그거 해봤자 맨날 똥이나 치워야 하고 깽깽거리는 녀석들 뒷수발이나 들어야 한다구. 왜 그 고생을 사서 할려고 그래? 좀 더 열심히 해서 법대나 의대 가면 좀 좋아?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되잖아.”
“아이 몰라. 엄마랑은 대화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나는 엄마에게 너무 화가 나서 방문을 굳게 잠궈버렸다. 엄마에게 살짝 내밀어 보려고 했던 일말의 용기조차 빈틈없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원하는 결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욱하는 마음에 완전히 삼천포로 빠져버린 기분이다.
그때 마침 현관문이 열리며 아빠가 퇴근을 하셨다.
“왜 또 이렇게 소란이야? 여자들 목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네.”
“아니, 현서 성적이 나왔는데 별로 오른 것 같지도 않고 좀 더 열심히 하라고 했더니 저렇게 화를 내고 난리야.”
“당신이 또 애를 잡았구먼.”
“당신이 봤어?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성적표를 보니 여전히 제자리여서 좀 더 잘 해보자고 한 것밖에 없다구.”
“그렇게 뭐라고만 하지 말고 저번에 말한 것처럼 차분히 얘기를 들어줘야지. 두 모녀가 티격태격 성질낸다고 해결될 일이야?”
“당신은 왜 또 현서 편만 들어? 그러니까 애가 저렇게 삐딱하게 나오지.”
“어, 그만! 나는 빼줘. 둘 사이에서 나까지 터지고 싶지 않으니까.”
“아이 참, 나도 많이 속상하다구. 어서 옷이나 갈아입고 씻어요.”
원래는 남편과 상의한 대로 현서의 의견을 들어줄 생각이었으나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내가 바라는 대로 밀어 부쳤다가 더 큰 금이 가고 말았다.
잠시 후, 한층 더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젓가락질을 하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는 딸을 보며 남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어디를 지원하고 싶은데?”
“아빠, 나는 동물이 좋아. 강아지나 고양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고 챙겨주고 싶어. 예전에 우리 까망이도 내가 잘 보살펴 줬잖아.”
“그랬지. 우리 현서가 까망이를 잘 보살펴줬지. 그런데 그건 그냥 단순히 동물을 좋아하는 마음 아니었을까? 그 마음과 미래에 네가 직장을 가지고 사는 삶은 서로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아냐. 난 평생 동물들을 가까이에서 돌봐주고 싶어. 오히려 그게 내가 더 위로받는 느낌이 들거든.”
“동물을 케어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을 거야. 때론 아픈 동물을 하늘나라로 보내야 할 때도 있을거고 동물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할 수도 있고 또 동물들이 널 다치게 할 수도 있거든.”
“괜찮아. 아빠. 지금은 다른 것은 관심 없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을 목표로 공부하고 경험을 쌓고 싶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나야 뭐 동물 말고 의사나 변호사 같은 거 하면 좋겠지만...”
“내 친구들 말 들어보면 부모님이 가고 싶지 않은 과로 보내서 중간에 휴학하거나 그만두고 다시 공부하는 언니 오빠들도 많다던데.”
“그래서 뭐 너도 엄마가 다른 데 보내면 학교 그만두겠다는 거야?”
“어허~~ 그만그만. 성질내지 말고 현서 의견을 존중해 줍시다. 아빠도 현서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행복하기를 바래. 아직 1년이나 남았으니까 너도 목표로 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고 당신도 고집만 피우지 말고 우선은 두고 보자구.”
“아니 다짜고짜 그렇게 결론을 내 버리면 어떻해?”
“당신이나 나나 현서 의견 들을 만큼 들었잖아. 이제 당신도 현서가 마음껏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응원해 주자구.”
“아빠, 감사합니다. 역시 아빠가 최고야.”
“얘는 맨날 아빠만 최고래.”
“엄마도 땡큐땡큐. 엄마도 사랑해.”
남편 덕분에 다행히 이야기가 잘 되었다. 할 수없이 내가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집안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현서는 더 이상 ‘일어나라, 공부해라’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하고 있다. 그동안 아무런 목표없이 학교를 다니려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가장 좋은 것, 가장 부러운 것을 현서에게 강요했던 것이 아니었나 조금 후회가 되었다. 남편의 말처럼 현서를 믿어보기로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의 삶도 돌이켜보게 되었다.
나는 직장에서 파트타임을 하므로 현서와 가정에 더 충실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한편으로는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엄마들은 번듯한 직장에 있으면서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나는 현서 학원비 조차도 대주지 못할 만큼 벌이가 시원찮아서 한푼이라도 더 아끼고 절약하려고 애썼다.
나도 현서가 무엇인가를 저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난 어렸을 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도화지 위에 내가 표현하고 싶은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자연과 그리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채우고 나면 내 마음이 꽉 차는 것 같고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선생님들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며 미대에 가라고 말씀해 주실 정도로 상도 많이 탔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5남매 중 첫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떻게든 빨리 취직을 해서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물감 하나부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고 체념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그 꿈조차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어쩌면 현서를 통해 내가 해보지 못한 것들을 이뤄보고 싶었던 마음들이 스며들었던 것 같다. 지금도 가끔 미술 전시회에 가보면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꿈틀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럴 돈이 있으면 당장 현서 학비와 시집보낼 비용을 채우기에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는 현실에 꼼짝없이 붙잡히고 만다.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고 싶은 내 열정은 어느새 사그라들며 내 마음 한구석에 꽁꽁 숨어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부러워하고 비교했던 것 같다. 그래서 현서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져서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하고 편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계속 밀어부쳤던 것 같기도 하다. 딸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주지 못해 많이 미안했다.
결혼을 하고 현서를 낳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산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핑계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라도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나를 위해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하는지 신중하게 고민해 보고 싶다. 대학교 진학은 꿈도 꿔보지 못한 채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아온 고단한 삶을 다독이며 나의 꿈을 위해 다시 한번 몰래 숨겨두었던 빛바랜 날개를 천천히 펼쳐보고 싶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지만 예전에는 나에게도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하나 있었다. 크지 않더라도 어느 공간 일부에 내가 그린 그림들을 가득 채우고 소박한 전시회를 해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가장 깊숙한 서랍 속 작은 상자 안에 낙서처럼 스케치했던 밑그림들과 상장들을 꺼내어 보았다. 긴 세월 어둠 속에서 고이 잠들어 있던 나의 꿈들은 이미 색이 바랠 대로 바래서 누렇게 변해 있었지만 그 순간 나의 마음은 오히려 새롭게 빛나고 있었다.
‘나, 다시 시작해도 될까?’
P.S
올해 동아리에서 소설 쓰기를 생전 처음으로 시도한 끝에 겨우겨우 만들어 낸 첫 작품입니다. 많이 서툴고 부족하지만 나름 심각한 탈모와 머리를 쥐어짜는 두통의 고통을 함께 하며 열심히 써봤습니다. 소설의 'ㅅ'자도 몰랐던 우리 회원들을 위해 입술이 부르트도록 열심히 이끌어 주신 회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