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다퉜다. 참 오랜만의 일이다.
우리 부부는 평상시에 TV 화면에 YouTube를 켜놓고 밥을 먹는다. 나는 이왕이면 밥 먹으면서 짧게 편집된 재미있는 영상이나 영화 등을 선호하는데 남편은 꼭 정치, 경제, 전쟁 같은 시사적인 프로그램을 보려고 한다. 전에도 몇 번 내 의사를 충분히 밝혔지만 잘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아 '어차피 나도 정세는 알아도 괜찮겠다' 싶어 리모콘을 양보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개를 직접 사냥하는 프로그램을 켰다. 나는 ‘밥 먹으면서 살생하는 프로그램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으나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면서 ‘네가 무슨 천사인 줄 아느냐’며 면박을 줬다. 거의 밥을 다 먹어갈 무렵 물개를 향한 사냥이 시작되었다. 난 얼른 밥숟가락을 놓고 싱크대에 그릇을 신경질적으로 넣으며 화풀이를 조금 했다.
"내가 YouTube를 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밥 먹을 때는 다른 거 보면 안돼?"
남편도 나름대로 변명을 하기는 했지만 이미 내 기분은 상해 있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빈그릇만 담궈놓고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함께 식사하는 동안만이라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내용을 보자는 의견이 그렇게 어려운 부탁인건지.
어차피 저녁은 다 먹었고 다음에 이어질 일도 커피타기, 과일 준비하기, 설거지 등 모두 내 일인데 잘 됐다 싶었다.
26년 동안 함께 사셨던 시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시고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의 방해나 간섭없이 '집안 일 파업과 무언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누군가와 말다툼할 때 마다 '역지사지'의 입장을 고려해 본다.
평상시에는 남편의 성질을 대부분 맞춰주거나 서로 기분 상하지 않기 위해 거의 들어주는 편이지만 내가 뭔가를 크게 잘못한 경우도 아니고 남편에게 혼나야 할 만큼 나쁜 요구를 한 게 아니어서 이번에는 조금 세게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하디 순한 나를 건들면 결국 남편이 손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야했다.
주말인 토요일에는 직장 공사로 인해 출근했다. 서로 불편하게 집에서 뭉그적거리느니 차라니 공간을 달리하는게 더 나은 것 같은 상황이다.
난 직장에서 바빠서 컵라면을 먹을 수 밖에 없었지만 남편 역시 예상대로 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다. 나는 글도 써야하고 집안 일도 해야하고 여러가지로 할 일이 많은 반면, 남편은 내가 밖으로 끌어내기 전까지는 대부분 TV 앞에 붙박이가 된다.
퇴근하고 나서도 애들 방에 들어가 나중에 읽으려고 미뤄놓았던 책을 읽고 한 숨 자기도 하고 혼자서도 할 일이 많아 뒹굴뒹굴 무척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잠자리 역시 애들방에서 처음 자는데 남편의 코고는 소리도 안들리고 생각보다 춥지 않아 덕분에 꿀잠을 잤다.
일요일에는 갑자기 눈이 많이 와서 집에만 있었다.
남편은 밤새 눈이 많이 쌓여 직장에서 비상이 걸렸는지 며칠 전에 챙겨 준 내복 바지와 장갑과 털모자를 잘도 챙겨입고 아침 여명이 밝아질 쯤 조용히 집을 나섰다.
남편이 없는 동안 요플레와 빵으로 아침을 간단하게 때우고 지인이 알려준 넷플릭스 드라마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꼼짝 않고 컴퓨터만 들여다봤다. 밥도 간단하게 먹으니 오히려 다이어트가 되는 것 같고 좋은 점이 더 많았다.
무척 오랜만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창밖을 마주하며 드라마를 보는 이 순간이 오히려 즐거웠다. 혼자 웃고 울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데 남편이 방으로 들어왔다.
남편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밖에 풍경이 너무 좋다'며 나의 팔을 잡고 어서 나가자고 했다.
난 별로 나가고 싶지 않다고 한번 튕겼다. 다행히 다시 한번 부탁하듯이 먼저 손을 내밀어서 그냥 모르는 척 따라나섰다.
최대한 따뜻하게 입고 밖으로 나갔더니 밤새 쌓인 눈이 무릎에 닿을 만큼 엄청난 양의 눈이 내렸다. 20cm정도 왔다고 했다. 몇 년만의 일인 것 같다.
나가서 눈 위에 구르고 사진도 찍으면서 동네 한바퀴를 돌고 점심시간이 되어 맛집도 들렀다. 약간 살얼음이 깔린 곳도 있어 평상시보다 걷기가 많이 불편했음에도 금새 만보를 넘길만큼 생각보다 많이 걸었다.
하얀 함박눈 덕분에 남편과 화해도 하고 또 추억 가득한 즐거운 하루를 만들었다.
이제 밥 먹을때 더이상 TV앞에 앉지 않는다. 별로 할 말이 없더라도 식탁에서 먹기로 했다. 좋은 결말이다.
역시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