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꽃 Jul 15. 2024

백두산 여행기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민족의 성산 백두산!

어느 평범한 날 지인과 만나서 얘기하던 중 "조만간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백두산을 간다"고 했다. 

같이 듣고 있던 남편이 “우리도 따라 가도 돼?”라는 한마디에 우리 부부의 여행은 갑작스럽게 추진되었다. 

교인들 서른 명 이상이 가는 ‘백두산 기도 등반’에 교회도 다니지 않는 우리 부부가 꼽사리 낀 것이다. 


사실 난 5년쯤 전에 직장에서 초등학교 체험학습으로 백두산 서파에 다녀왔었다. 

우리 조상님들 역시 대대로 덕을 쌓으셨는지 몇 가지 고비(학생들 몇명이 복통과 두통이 있었음)가 있었지만 다행히 천지는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백두산 근처에도 간 적이 없으므로 지금 아니면 다시 기회를 잡기 쉽지 않겠다 싶어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2024년 6월, 여행 계획이 있을 때는 일상을 가장 평범하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겨우 일주일을

앞두고 허리를 삐끗해서 백두산을 갈 수 있을지 한참 걱정했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허리는 많이 좋아졌으나

바로 전날 또 무엇을 잘 못 먹었는지 계속 설사를 하는 등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떠나기 전에 이런 상황들이 발생해서 부랴부랴 어떻게든 해결을 했다는 것! 

약국에 들러 지사제. 소화제. 진통제. 두통약. 알러지약. 피로회복제 까지! 각종 구급약을 미리 챙겼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아니면 여행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이 있어서인지 꼭 여행 전.후로 한 번씩 이렇게 탈이 났기때문에 여행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발목을 붙잡히는 기분이 들어 가끔 두렵기도 했다.

    

드디어 D-DAY!

남편과 각각 캐리어를 끌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단체 사진도 찍고 무안공항 내부에서 거의 3시간을 기다린 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젠 더이상 주저 할 이유가 없다. 

이미 나는 백두산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파란 하늘을 수놓은 하얀 구름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뭉게뭉게 피어 있었다. 팝콘을 튀겨놓은 듯한 모양도 있었고 회오리처럼 휘감아 도는 모습의 구름도 있었고 두꺼운 솜이불을 깔아놓은 것처럼 밟으면 통통 튈 것 같은 모습의 구름도 있었다. 

첫 만남의 어색함을 살짝 내려놓고 옆에 앉은 일행과 잠깐 대화를 나눴는데 ‘반 백이 다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짙은 구름을 보면 그 위에서 뛰어 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며 구름 사진도 찍고 동심도 나누었다.      

 


우리의 목적지 연길 공항에 도착한 후 식당을 먼저 들렀다. 새벽부터 분주히 서두른데다가  점심시간을 약간 넘겨서인지 현지식 냉면과 꿔바로우가 정말 맛있었다. 어쩌면 우리와 같은 말을 쓰고 같은 글씨를 쓰는 우리 조선족이 해 주는 음식이어서 더 맛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첫 코스로 용정으로 이동 해 독립운동가인 윤동주 시인 생가를 방문했다. 젊은 나이에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옥중에서 생체실험을 받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어느 세월에 저렇게 많은 시를 지었는지 생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커다란 돌들 위에 쓰인 몇 편의 작품들을 

읽는데도 시를 짓는 당시의 상황이나 모습이 그려지면서 마음이 헛헛하고 아려왔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문구가 여전히 이동하는 내내 귓가에서 맴돌았다. 


생가를 뒤로하고 동네 한바퀴를 돌아 산책을 하는데 전날 비가 온 뒤끝이어서인지 날이 무척 쾌청하고 맑았다. 특히나 곳곳에 피어있는 작약꽃과 동네 주변을 빨갛게 물들인 앵두가 너무나 탐스러웠다. 열매를 따시는 분이 맛 보라며 한 주먹 집어주셨는데 보기보다 많이 시었다. 

아마 비가 계속 와서 앵두의 달콤함이 더 연해졌나보다. 마음이 씁쓸해서 맛이 덜 했을수도...


버스를 타고 이도백하로 이동하면서 '차창 밖 저 멀리 보이는 언덕에 있는 소나무'가 우리가 중학교 때 배웠던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이라고 알려주셨다.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서 항일운동을 하던 비밀장소였는데

먼 곳에서는 소나무 찾기가 쉽지 않아 일부러 바로 옆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어렴풋이 소나무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일송정을 지나며 지금의 우리를 위해 싸워주신 애국선열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다함께 '선구자'를 때창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디에서~ 거~친 꿈이 깊~었~나~~~~~'

조금 지나니 해란강도 나왔다. 제법 규모가 큰 강이었다. 어릴적 아무 의미도 모른 채 불렀던 가곡의 가사인 해란강이 아픈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며 여전히 힘차게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애달팠다.     

일송정(저 멀리 정자 왼편에 있는 소나무)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해란강


우리의 첫 날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차로 이동하면서 많이 본 것은 작은 밭뙤기부터 거대하기까지 한 경작지에 옥수수가 대부분이었는데 이곳의 주요 작물인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적에 '솔바람이 몰고와서 조각구름을 걸쳐 놓았다'던 미류나무라고 키 큰 나무가 곳곳에 많았는데 나뭇잎들이 반짝이면서 양옆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는 가로수들이

60~70년대 우리의 옛 시골 모습을 연상케 해서 더욱 정겹게 느껴졌다.           

     


둘째 날!

중국은 유난히 해가 빨리 떴다. 새벽 4시쯤에 이미 여명이 피어올랐다. 시차때문에 한국시간보다 1시간이 더 늦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5시쯤 일어나 벌써 부터 준비를 마치고 6시에 아침을 먹었다. 

전날 가이드님이 말하길 ‘아침 식사 시간이 되면 난리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며 6.25 때 난리는 축에도 못 낀다’고 설명했었는데 역시나 6시에 식당에 갔더니 중국인과 한국인이 뒤섞여 밥줄의 꼬리가 안 보일 정도였다. 내일부터는 아예 30분 더 늦게 나가자고 일행들과 입을 맞췄다.


아침 7시, 드디어 백두산으로 출발!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중국 연길의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우리가 머무는 동안의 날씨만 거짓말처럼 햇볕쨍쨍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정말 하늘이 도와주는 건가 싶을 정도로 우리가 머무는 날들은 날씨가 화창했다. 

백두산을 향해 올라가는 하늘 길이 너무나 맑고 아름다웠다. 정상까지 가려면 길이 좁아지므로 셔틀버스를 2번이나 갈아탔다.

산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 올라가는 산길에 야생화도 제법 피어 있고 맑은 계곡물도 흐르고 보통 ‘6월부터 백두산 여행시기’ 라는데 야생화는 조금 이른감이 없지 않았다. 듬성듬성 피어나기 시작한 꽃 몽우리의 이제 막 깨어나서 기지개를 켜는 듯 여린 모습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서파에 올라가기 전부터 '1442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천지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 일행들은 힘들까봐 다들 겁을 잔뜩 먹고 있었는데 사실 생각보다 그렇게 난코스는 아니었다. 

어느 일행이 말하길 '목포 유달산 올라가는 계단이 훨씬 더 힘들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 높은 계단을 중국인 2명씩 앞뒤로 가마를 붙잡고 여행객의 무게를 고스란히 어깨에 싣고 바닥만 보며 걸음을 옮기는데 정말 너무나 힘들어 보였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어찌나 숨을 헉헉 거리고 몇 걸음 못가서 쉬고 또 쉬는데 아무리 돈을 벌기위해 하는 직업이라고 해도 무릎이나 다른 곳에 금새 무리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 될 정도였다. 우리 일행 중에서도 연세 있으시고 걷기가 불편하신 2분이 가마를 타셨는데 한 남성분은 당신의 몸이 많이 무거울거라며 돈은 다 내시고 중간에서 내리신 분도 있고 다른 여자분도 팁까지 얹어주시고 약간 더 윗 지점에서 그냥 내리셨다고 한다.     


다들 싸목싸목 사진 찍으며 웃고 떠들다 올라서니 드디어 목적지인 천지에 도착! 

백두산이라 불리게 된 이유를 살짝 덧붙이자면 1년 중 8개월이 눈으로 덮여있는 데다가 흰색의 부석(화산석)이 얹혀져 있어서 흰머리산 이라는 뜻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하늘에 약간의 구름이 끼어있긴 했지만 천지를 바라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계단 끝에서 한 컷 찍고 천지 앞에서 사람들 무리에 끼어 여러 컷을 찍었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지켜달라'고 기도도 살짝 얹었다.

백두산을 벌써 2번째 보지만 볼 때마다 정말 사진이나 그림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빛이 감도는 

호수 위에 하얀 구름들! 오늘 바라본 천지 역시 5년 전과도 같았고 여느 사진과 똑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오히려 내가 찍은 사진에 나를 합성으로 끼어 넣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내려오는 길은 가볍게 날 듯이 주변도 더 돌아보면서 여유있게 내려왔다. 

이렇게 우리의 첫 번째 백두산 서파 등반은 무사히 성공!

      


셋째 날!

어제의 산행으로 몸이 많이 피곤했을텐데도 새벽 5시가 되니 벌써 눈이 떠졌다. 

밖에서 내비치는 햇살도 여전히 굿~~

오늘도 마찬가지로 6시에 식사를 하고 7시에 출발하는 일정이다.

다들 다른 일행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시간을 정확히 지켜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북파 코스를 향해 가는 길은 더 멀었던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내가 좋아하는 자작나무가 많아서 마음이 더 설레었다. 그래서 가는 동안 자작나무에 관한 짧은 시도 지어봤다.

- 브런치스토리에 미리 글을 올렸다 -

산길을 따라 길이 좁아지므로 작은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올라가는데 경사가 무척 심해서 올라가는 차량도 오히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곡예하듯 최고 속도로 내달렸다.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까봐 살짝 무섭기도 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위험해서 통제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는 동안에도 행여 날씨가 안좋아 질까봐 살짝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쾌청한 날씨의 도움으로 정상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여행을 추진 해 주신 분이 같은 교인이어서 미리 사전답사도 하시고 우리 일행이 조금의 불편함이 없도록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써 주셔서 북파에서도 별로 대기하는 시간 없이 입구에 바로 들어갈 수 있었고 또 ABC코스들 중 VIP만 들어 갈수 있다는 C코스를 섭외 해 주셔서 사람들에게 떠밀려 이동하는 AB코스와 

달리 여행객이 거의 없는 방향으로 진입했다.

서파에서 본 천지와 또 다른 느낌을 갖게 하는 북파는 다리 한 발짝만 옮기면 북한 경계선을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라 약간의 긴장감이 맴돌았다. 때마침 군인 4명이 총기를 소지한 채로 우리가 더 이상 발 디딜 수 없는 

망루를 지나 산으로 올라가는데 호기심 반 부러움 반에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바람만 조금 더 거셀 뿐 하늘은 더욱 푸르렀고 날씨가 너무 좋아서 우리 팀이 정말 복 받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1. 북파에서 바라 본 백두산                                                    2. 북파 -AB코스 / 우리는  아래쪽 C코스

3. 북파를 오르는 언덕배기                                                                 4. 총기를 소지한 군인들 모습  


우리 일행 평균 연령이 65세라고 했지만 모두들 중도 포기없이 잘 올라왔고 사진도 원 없이 많이 찍었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말하자면, 백두산 정상에서 일행 중 어느 분이 사진사에게 사진을 찍고 값을 치르기 위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다가 실수로 만원짜리 2장과 5만원짜리 1장을 떨어뜨렸다. 아무래도 산과 산이 이어진 골이 깊다 보니 순식간에 돌풍이 다가와 돈을 빼앗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일행이 민첩하게 움직여 

5만원과 만원 한 장은 바로 주웠는데 다른 만원 한장은 험한 골짜기로 날아가버렸다. 

아마 이 골짜기 끝 닿은 곳에 현금을 포함 해 많은 보물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살짝 의문이 생겼다.  


북파.서파 백두산 기행은 아무 탈 없이 잘 마쳤고 근처에 초록빛과 푸른빛이 어우러진 금강대협곡을 

산책했다. 나는 두 번째 가는 길이라 추억을 곱씹으며 안내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처음 왔을 때 다람쥐를 

보지 못해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데크 아래에 다람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발소리가 들리면 나와서 먹이를 달라는 듯 따라다니는 모습이 예전과 사뭇 달랐다.

어느 분이 빵을 던져주니 양 볼이 터지도록 우겨 넣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발길 닿는 곳마다 다람쥐들이 

보였는데 나는 챙겨줄 것이 없어 많이 미안했다.  

산책을 마치고 차에 돌아와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어제 먹은 옥수수를 챙겨놨던 게 눈에 띄었다. ‘옥수수라도 던져줬으면 오늘 밤 많은 다람쥐들이 간만에 포식하며 행복한 저녁을 보냈을텐데..’ 싶은 마음에 미안함이 더 했다.     


이렇게 우리의 백두산 기행은 무사히 잘 마무리 되었다. 

백두산을 다녀오고 난 후 남은 하루는 두만강에 잠시 들렀는데 돌을 던지면 닿을 듯 바로 지척에 북한이 있었다. 가이드님 설명으로는 '비가 많이 와서 국경에 있던 집들이 다 쓸려 내려가 중국에서 연립주택을 지어줬다' 고 한다. 근처에 바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그저 그림일 뿐이었다. 

언제쯤에나 저 다리와 저 땅을 마음 편히 건너다니며 지난 세월을 추억하고 이야기 할 수 있을런지...

우리 민족 역사의 아픔은 고스란히 그 자리에 남겨 놓은 채 그렇게 백두산 여행은 막을 내렸다.     


우리 팀들은 정말로 다들 조상님이 대대로 덕을 쌓으셨을까? 아니면 일행 중 조상님이 나라를 구하셔서 그 덕으로 서파. 북파 모두 원 없이 볼 수 있었을까? 그도 아니면 열심히 기도하신 교인들의 기도빨이 먹힌건가? 

주변에 백두산을 미리 다녀오신 몇 분들 말씀을 들어보니 어느 분은 북파.서파 일정 중 한번은 비가 와서 길이 통제되어 올라가지도 못했다는 팀도 있고 또 어느 분은 올라가긴 했는데 구름이 끼어서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구름 걷히기만을 기다렸다가 결국 헛걸음으로 내려왔다는 분도 계셨다.

정말 보기 힘든 성산인데 우린 아무 탈 없이 아주 충분히 만족하게 즐긴 것 같다.


꿈 같은 시간이었다. 계속 머무르고 싶고 깨어나고 싶지 않은 좋은 꿈!

다행히 여행하는 동안 크게 아픈 일도 없었다. 다른 분들은 평소보다 많이 걷고 계단을 타느라고 종아리가 

많이 아프다고 하셨지만 나는 걱정했던 허리통증도 거의 없었고 생각보다 건강하게 잘 보냈다.

이미 과거가 되었지만 추억이 가득 담긴 사진을 보며 다시 기억하고 싶은 그 장면 그 순간을 곱씹을 수 있어 너무 좋다. 원판이 불변이든 내가 안 예쁘게 나왔든 역시 남는 건 사진 뿐인 것 같다. 

목사님을 비롯해서 일행들이 다들 너무 잘 해 주시고 잘 챙겨주셔서 정말 부족함 없이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들 ‘교회에서 다시 꼭 만나자’고 덧붙임도 있지 않으셨다. 

모두에게 너무 감사했고 백두산을 여행하는 시간들이 많이 설레고 좋았다. 다시 만나서 오늘을 이야기하며 또 다른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슬며시 바래본다.         

           

우리일정 6.25~6.29!                                                   첫날! 비온 뒤끝이어서 무지개가 살짝 보였음

장백폭포 유황온천 계란-노른자만 익음                                                          장백폭포의 위엄

백두산 천지에서 흐르는 물줄기                                                        북파 입구에서 바라본 노송

조선 평양시에서 만든 대동강 맥주와 아이스크림                                    장백폭포 유황온천수

작가의 이전글 자작나무 숲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