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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Oct 08. 2024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

엄마에 대한 기억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를 닮아 있는 나의 모습을 본다. 

오똑한 콧날이며 외모는 아빠를 빼다 박았지만 온순하거나 뭐든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은 영락없이 엄마의 

모습이다.

수십년이 흐른 지금도 남편과 두고두고 되새겨보는 일화가 있는데,  

부모님이 외출하신 어느 날 남편과 친정집에서 오랜만에 대청소를 하다가 잘 쓰지 않는 오래된 물건들과 마당 한귀퉁이에 손잡이가 썩어서 문드러진, 절대 다시 쓸 수 없을 것 같은 빨래 방망이를 쓸어 모아 동네 골목 전봇대 앞에 내다 버렸다. 그런데 시장 다녀오시던 엄마가 빨래 방망이는 물론이고 종량제 쓰레기 봉투 안에 있던 물건들까지 죄다 다시 꺼내어 들고 오시며 

“이거 아직도 쓸만한데 누가 갖다 버렸냐?” 라고 물으셨다.  

“엄마 그거 오래 되서 못 쓸 것 같은 거랑 손잡이가 다 썩어서 안 쓸 것 같아 내가 버렸는데 그걸 다시 주워 오셨어?” 

엄마는 그랬다! 

우리가 봤을 때 다시 쓰기 힘들 것 같던 물건들조차 버리지 않으시고 재활용하시거나 아껴두셨다. 할 수 없이 절대로 쓸 수 없을 것 같은 물건들은 엄마 몰래 멀리 가져다 버리기도 했다. 

어릴적 기억을 되짚어보면 집안 구석구석에 못 쓰는 물건들이 많이 쌓여 엄마 아빠가 다투시던 기억도 많았다. 젊으셨을 때에도 아빠가 입으시던 난닝구(면티)를 버리지 못하고 입으셨고 오래되어 늘어진 속옷들을 다시 꿰매어 입거나 삭아서 떨어진 고무줄을 새로 바꿔 두고두고 입으셨다. 

엄마의 낡은 서랍장 안에는 여러색 실로 땜빵 해 놓은 구멍난 양말이나 누런 속옷들 한켠에 새 수건이나, 새 양말, 새 속옷 등 꺼내보지도 않은 새 물건들이 여러개 있었다. 좋은 것을 사다드려도 내내 아끼시다가 결국 색이 바랜 박스들만 하나 둘 쌓여갔다. 

창고를 한번 씩 들여다보면 선물로 받으신 새 그릇, 새 물건들이 불편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엄마에게 물어보면 결국 “느그들 아무나 필요한 사람 가져가서 써라. 엄마는 필요없응께”라고 대답하셨다. 

가끔 친정에 갈 때마다 집에서 필요한 생활용품들을 하나씩 챙겨오는 재미도 있었지만 사용하지 못한 새 물건들은 결국 제대로 기능을 다 해 보지도 못하고 유행이 지나거나 주인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버려지는 경우가 있어 아까운 마음은 둘째치고 내 것이 절대 아닌냥 신경도 쓰지 않는 엄마의 모습이 안타깝기까지 했다.

음식도 대부분 좋은 것은 가족들에게 먼저 나눠주고 먹다 남은 것을 챙겨드시거나 벌레먹은 것 조차도 썩은 것을 떼어 내고 드셨고 변비에 좋다며 가끔 유통기한이 지난 것을 드시기도 했다. 

물건도 지나치게 절약하시니 돈도 당연히 철저하게 아끼셨다. 

재래시장에서 천원짜리 물건을 사시면서도 백원이라도 깍으려고 흥정하는 것은 기본이고 엄마를 위해 돈을 쓰시는 일은 거의 드물었던 것 같다. 

한 때는 너무나 궁상맞은 엄마 모습에 나까지 엄마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엄마의 희생 덕분에 우리 가족이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남 부럽지않게 살았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였을까? 

평상시에 엄마에게 ‘이것 버려라, 저것 버려라’ 라고 말했지만 정작 나도 엄마처럼 잘 버리지 못하고 식구들 중 누구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챙겨주고 싶어서 아끼게 된다. 그리고 시부모님을 포함해서 일곱 식구와 살다보니 싸면서 양이 많은 것, 저렴한 것 등에 길들여져 나 조차도 여전히 돈 쓰는 것을 어려워하는 편이다. 

대부분 싼 물건이나 남들이 쓰던 중고를 사서 쓴다고 '싼 게 비지떡'이라는 속담을 들먹이며 남편이나 시어머님께 꾸중을 듣기도 하고 내가 입고 사용해야하는 물건들도 저렴한 것을 고르다 보니 가끔은 '내가 나의 값어치를 떨어뜨리고 있는게 아닌가?' 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절약 덕분에 우리 식구들도 큰 부족없이 잘 살았다고 나 스스로를 위로 해 본다.  

그래서 종종 애들에게도 '엄마 이제 아끼지 말고 그냥 써~~' 또는 '엄마가 안 쓸거 같으면 그냥 버려~'라는 잔소리를 자주 들었다. 

작은 예시로 장조림 같은 맛있는 반찬도 아이들 위해 남겨 놓으면 다이어트 한다며 닭가슴살이나 자기들 입맛에 맞는 다른 먹거리를 사먹으므로 결국 버리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좋아 보이는 물건들도 버리지 못하고 혹시나 하고 소중하게 보관 해 두면 내 기억속에서 잠시 잊혀져 있다가 역시나 다음에 그 모습 그대로 먼지만 쌓인 채 짠~! 하고 나타나는 비슷한 모습이 되풀이되는 과정을 겪는다. 

우리 세대의 물건들은 애들의 취향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더 예쁘고 단순하고 좋은 물건들이 많이 나오니 나라도 잘 쓰고 버리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엄마는 매일 매일 새벽에 밭으로 논으로 나가셔서 먼지를 한껏 뒤집어 쓴 채로 어스름한 저녁이 다 되어서야 들어오셨다. 밥상을 치우고 나서도 TV앞에 앉아 졸린 눈을 비벼가며 각종 야채를 다듬거나 껍질을 까는 등 항상 쉬지 않고 분주히 움직이시던 모습과 그래서인지 손이 성할 날 없이 자주 다치시고 손톱이 다 닳아져 때가 낀 것처럼 항상 새까맣던 기억들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오랜만에 친정 대문에 들어서며 "엄마~~" 하고 부르면 대부분 뒷밭에서 "오야~~~" 하고 메아리처럼 대답하시던 모습, 이제는 그마저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엄마의 부지런함은 천성이기도 했겠지만 엄마세대의 전형적인 희생과 사랑의 아이콘이었다.

후에 반평생 사시던 집과 밭을 팔고 고향으로 이사를 해서 편하게 지내시는 동안 오히려 서서히 치매가 왔었는데 육체적인 고생은 줄었으나 엄마의 마음도 진정으로 원했던 좋은 선택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엄마는 이것 저것 밭에서 수확한 작물들과 방앗간에서 직접 짜신 고소한 참기름과 어디서 주워 모으셨는지 작은 은행알이 가득한 검은 봉지를 한번씩 챙겨 주셨다. 구수한 자연의 향이 진하게 풍기는 은행알을 어떻게 까서 말리셨는지 그때는 귀한 줄도 모르고 몇 번 먹는둥 마는둥 하다가 결국 곰팡이가 생겨서 버렸던 죄송한 기억이 있다.  

애들도 다 커서 타지에서 지내고 이제서야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하고자 하니 곁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이 참 야속하고 덧없음을 느낀다. 

날이 쌀쌀해지는 가을이 되니 스쳐가는 바람에도 엄마에 대한 소소한 기억과 엄마의 향기와 잔잔한 그리움들이 더욱 진하게 묻어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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