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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기사년

아낌없이 받는 나무

by 김동의

헤어스타일이 조금 바뀌었다. 오랜 기간 유지해 온 다소 긴 바가지 머리에서 더 기장을 줄이고 가볍게 변화를 줬는데 바뀐 모습이 도토리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0대의 젊은 엄마가 두 아들을 매일같이 씻기고 헤어를 말리는 수고를 조금 덜어내려는 부수적인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헤어 제품이 변변치 않던 시절에 아이들의 모발을 바퀴벌레 등딱지처럼 반지르르한 윤기가 흐르게 만드는 것은 보통 정성으론 불가능하다.


동생과 나의 머리카락에 뜻하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왔다. 머릿니는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선사했는데 이를 박멸하기 위해 엄마는 한동안 아침저녁으로 특수한 약을 머리에 도포하고 비닐 캡을 씌워주셨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살피며 서캐를 잡아냈는데 엄마의 긴 손톱이 이럴 땐 유용했다. 톡톡 서캐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스르르 잠에 들었다.


도토리 머리 소년은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고 3학년 2반 최건식 선생님의 반에 발을 들였다. 생애 첫 남성 선생님이다. 50대의 나이에도 능숙하게 풍금을 연주하고 노래하며 음악 교육을 하시던 모습이 놀라웠다. 늘 '대통령 아들이 우리 반에 배정받아도 다를 바 없이 대하는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평하던 선생님은 출판업이나 문구업을 하는 사람들(소위 잡상인)을 가끔 수업 시간에 들여 그들에게 홍보할 기회를 부여하기도 했다.


나쁘지 않은 성적 덕에 3학년에도 부반장직을 맡게 됐다. 반장은 이국적인 큰 눈에 살집이 꽤 있는 아이였는데 경박하여 툭하면 선생님께 혼나곤 했다. 선생님이 체벌하려고 들면 큰 몸을 이끌고 교실에서 도망 다니다 못해 복도까지 뛰쳐나가는 독특한 면이 인상 깊다. 역시 2인자가 속 편하다.


3학년이 되니 일과 시간이 늘어 점심 도시락을 지참해야 했고, 교과서 수업 외에도 클럽활동 시간이 생겼다. 어쩌다 보니 구멍 뚫린 철판과 볼트류를 조립하여 원하는 형상을 만들어내는 과학 상자 시간에 참여하게 됐고 이를 위해 집에서는 ‘과학 상자 3호’를 구입해 줬다. 열심히 닦고 조이며 과학자의 꿈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는데, 막상 어른이 되니 과학 5호 또는 과학 7호로 조롱받는 제품을 개발하는 회사에 몸담게 됐다. 과학 상자는 5호까지 출시했고 4호(밀리터리)를 제외하곤 호수가 클수록 부품이 많고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5호 보유자는 그 상자의 크기만큼 아이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연이은 부회장 배지, 명찰 그리고 줄줄이 매달린 모범 배지들은 내가 어떤 인물인지 교내외에 알리는 증표가 되었다. 어떤 아이도 내게 함부로 헤드락을 걸거나 싸움을 걸지 않았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주머니에 동전이 있을 때면 겁도 없이 하굣길에 시장 쪽 오락실을 홀로 들락거렸다. 아는 이들만 아는 오락실만의 냄새가 있다, 전자기기 자체의 발열과 유저들의 승리를 향한 열기가 더해져 온습한 내기로 채워지고, 씻지 않은 오일리한 손과 마찰된 컨트롤 레버와 버튼은 경면가공이라도 한 듯 반들거리며 손때 묻은 비릿함이 진동한다. 실내 곳곳에 찌든 담뱃내가 뒤섞 도무지 순환이 불가능해 보이는 공간이지만 엄마 몰래 이곳에 왔다는 사실에 심장이 요동치느라 후각이 금세 마비된다. 1 coin이 50원에서 100원으로 늘어 큰 부담이 되는 만큼 더블드래곤(双截龍) 게임기에 동전을 넣을 때 울리는 경쾌한 띠리링~ 알림음은 다시금 정신줄을 붙들게 만들었다. 잘 풀리는 날에는 원코인으로 황금성 스테이지까지 진입을 했다.


작년만 해도 강남콩, 미류나무, ~읍니다로 써야 받아쓰기 100점을 받을 수 있는데 올해부터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같은 한국어인데 적응이 쉽지 않다. 이런 혼란을 틈 타 10월 시험에서는 학창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 과목 만점을 득했다. 당당히 집에다가 10만 원 상당의 재믹스(대우전자에서 제조한 게임기)를 요구해서 손에 쥐게 되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데 역대급 성취감을 일찌감치 맛보곤 자만에 빠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스카웉이라는 단체에 대해 설명을 듣고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아빠는 조금 고민해 보시곤 “그래! 한 번 해 봐!” 하며 큰 결단을 한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난 설명회에 다녀와서 전달만 했을 뿐 그렇게 보이스카웉에 가입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엄마가 동인천에서 사 온 유니폼만큼은 참 마음에 들었다. 보이스카웉 모임이 없는 날에도 그 유니폼을 입고 등교할 정도로 애용했는데, 막상 활동하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어린이들의 용기, 자립심, 협동심 고양으로 이 단체는 포장됐지만 전쟁의 산물이었던 만큼 스카웉 활동은 통상의 학교생활보다 더 수직적이고 엄격한 분위기 하에 절제된 행동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학교 행사에서 보이스카웃 유니폼을 입고. 춘추복은 별도 구매 필요.


스카웉에서 속리산 쪽으로 여름철 수학여행을 갔는데 집이 아닌 곳에서 시간마다 타이트한 스케쥴에 쫓기듯 단체 활동을 하는 게 참 힘겨웠다. 하루는 수영장에 갔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홀로 숙소로 돌아와 쉬고 있었는데 그 방의 분대장 격인 6학년 형이 씩씩대며 다가온다. 뒤에 서 계시던 스카웉 담당 선생님도 표정이 좋지 않다. 스카웉 활동에선 때마다 점호를 하고 줄을 서서 단체로 이동해야 하는데 내가 그걸 어기고 사라져 한참 애를 먹었나 보다. 그 형이 묻는다. “앞으로 개인행동 할 거야 말 거야?!” 개인행동이란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나는 '좋은 건가?' 하며 자신 있게 하겠다고 했다. 표정이 더 안 좋아진 형은 내게 엎드려뻗치라고 하곤 되묻는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도무지 알지 못한 채 개인행동 앞으로도 계속하겠다 하며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이렇듯 사회생활 정말 못 해 먹겠다 느낀 이후로 스카웉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또래 사촌들이 많아서인지 이 당시엔 친척과 교류가 많았다. 특히 여름방학 때면 포천 베어스타운 콘도미니엄에서 2박 3일 일정으로 머물며 사촌들과 몰려다니던 게 스카웉 활동 따위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놀러 가서도 삼시 세끼를 차리고 치우던 엄마와 숙모들은 명절과는 다르게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함께 웃고 즐기며 TV도 보고 고모들과는 화투놀이도 했다.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각자 삶이 바빠져서인지 이런 모임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포천 베어스타운 콘도에서 건전한 게임을 하는 엄마와 친척들


최소 주 6일 새벽에 집을 나서 백운역에서 삼성역까지 전철을 타고 출근하시는 아빠가 드디어 첫 차를 구입했다. 버건디 칼라의 대우 르망 4 도어 GTE가 탁송되어 우리 집 105호 앞에 늠름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장은 물론 주차구획선조차 없던 계양아파트는 A동 총 40세대 중 5대가량의 차량만 주차되어 있어서 요즘과 같은 '주차난'이란 말은 상상조차 못 했다. 해가 질 무렵 아빠의 회사 동료들이 잔뜩 오셔서 차 앞에 돼지머리와 막걸리를 놓고 고사를 지냈다. 오신 손님들은 돼지 입에 지폐를 끼워 넣기도 했는데 불쌍한 영혼이 노잣돈 삼아 좋은 곳으로 갔기를 바란다.


차량을 구입하기 직전, 부모님은 운전면허 1종 보통을 거의 동시에 취득하셨다. 멀미를 불러일으키는 새 차의 짙은 내장재 냄새가 채 빠지기도 전에 우리를 태우고 시운전을 나가셨는데 두 분 다 툭하면 시동을 꺼지게 하거나 꿀렁이는 주행을 선보였다. 수동변속기의 클러치 페달 타이밍이 익숙해질 때까지 종종 이런 일은 되풀이되었다. 2열 시트 머리 받침 뒤쪽 패키지 트레이에 놓인 모과 때문에 키미테 생각이 간절해졌지만 명절 귀향길에 삼촌에 의지하여 한 차에 여덟 명이 끼여 타거나, 외출 시 만원 버스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 삶이 한층 편해졌다.


나와 동생을 어느 정도 키웠다고 생각한 엄마는 우리 형제만 집에 남겨두고 계속 뭔가를 배우려고 했다. 하루는 VCR 촬영 학원을 등록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관뒀다. 또 하루는 피아노 조율 학원에 가겠다며 공구를 한 보따리 사 와서는 공구마다 나무 손잡이 부분에 정성껏 니스칠까지 하셨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는 일은 없었다. 배워 놓은 기술도 딱히 실용적으로 쓰이거나 소득을 발생시키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너무 일찍 결혼한 탓에 맞는 적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던 것 같다.


이렇게 엄마의 외부 활동이 있을 때나 약속이 있으면 외할머니 찬스를 쓰는 경우도 꽤 있었다. 나와 동생은 이런 외가댁이 그 어떤 친척들보다 가깝고 편하게 느꼈다. 외할머니는 작고 통통한 체형 때문에 황제펭귄이 쉽게 연상돼 친근감이 더해진다.

‘언젠간 먹고 말 거야!’ 하는 광고와는 다르게 난 언제나 치토스를 먹어대서 정작 밥상 앞에서는 입이 매우 짧았다. 더구나 외가댁 밥상은 내가 좋아하는 로스구이 햄이나 비엔나소시지는 구경할 수 없었고 김치류, 동치미, 된장찌개 정도였으니 더욱 손이 가지 않았다.


육고기에서는 냄새가 난다며 병적으로 거부하는 외할머니는 모처럼 쌈 채소를 잔뜩 가져오셨다. ‘나를 위해 고기를 구워주시는 건가?’ 했는데 아니다. 쌈 채소의 속은 이름 모를 야채들과 밥만으로 한가득 채워져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 나더러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안 먹냐며 남기지 않고 그릇을 비우셨다. 잘 드시는 만큼 건강하셨고 작은 키에서 발산되는 힘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외할머니는 다소 무뚝뚝한 투로 꼭 해야 할 말씀만 하시는데 아주 가끔 방언이 터진듯한 날에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할머니의 지인 성대모사까지 하며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나를 웃기는 일도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외가댁에 맡겨진 나는 산타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말을 끊고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다.


“싼타? 그따위 거 세상에 없어!”


일찌감치 산타의 존재를 알게 됐다. 외할머니는 MBTI 테스트를 해보셨다면 분명 T였을 것이다. 선물로 강남모형에서 출시한 킹라이온(볼트론) 로봇을 받았는데 갖고 싶었던 물건을 손에 넣어 기뻤던 한편 아빠는 대체 어느 가게에서 이걸 구입해서 언제 외가댁에 갖다 둔 것인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취미 같은 건 전혀 없는 듯이 그저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반복된 삶에 충실하셨는데, 그렇지 않아도 넉넉지 않은 형편에 우리 형제까지 맡겨지니 내색하진 않았지만 상당히 불편하셨을 것이다. 간석 시장 외에는 외출도 거의 없으시다. 유일하게 함께 멀리 놀러 간 곳이 민속촌이다. 자연농원(現 에버랜드)을 들러 민속촌으로 가는 버스 편에 부모님이 모처럼 외할머니를 모셨다. 자연농원에서 하차하는 승객들이 몹시 부러웠지만 외할머니와 함께 옛 조상들의 삶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외가댁에만 가면 더 극성쟁이로 돌변하는 우리 형제들을 케어하느라 고단 하셨을 텐데 이 잠깐의 여행이 부디 약간의 위로와 정신적 환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외할머니와 함께한 민속촌 여행


2003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외할머니(올해 98세)는 쭈욱 홀로 생활하셨다. 장녀인 이모와 큰 외삼촌이 가끔 혼자 계시는 집에 들렀다 가시는 듯했고, 우리 가족은 명절 때나 찾아뵈어 과일 정도만 먹고 돌아왔다. 형편을 뻔히 아는데도 막내딸 식구가 왔다며 반찬을 이것저것 해놓곤 한 보따리를 싸준다. 그러지 말라는데도 정말 몸이 불편해지기 전까지는 계속 반찬통을 보자기에 꽁꽁 묶으신다. 더 안타깝게도 작은 외삼촌은 1999년경 외숙모의 카드빚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우리는 물론 외조부모와도 소식이 끊겼다.


설상가상으로 연세가 들며 허리 이슈로 보조기구 없이는 거동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임대주택에 홀로 외롭게 계셨어도 자식이나 손자들 앞에서 넋두리를 늘어놓거나 당신의 고뇌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법이 없었다. 마치 아무 일 없는 평온한 사람처럼 일상적인 대화만 오갈 뿐이다.


아빠가 갑자기 식물인간이 된 2016년 이후로는 그 병실에 집중하느라 외할머니를 거의 뵙지 못했다. 그동안 외할머니는 이모가 집에서 돌보시다가 치매 증세가 생겨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요양원에 계신 다른 어르신들과 함께 지내며 오히려 치매 증상은 많이 호전되었으나 2017년경 요양원으로 찾아뵈었던 외할머니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신다. 대답 없이 누워있는 아빠에 이어 이런 모습을 보니 세상에 몇 없는 내 편이 사라진 것만 같다. 배우자와 외증손자도 소개해주며 인사드리고 싶지만 아직까지 생각에 머물러 있다. 모쪼록 그 작은 마을에서라도 평안하며 외롭지 않게 지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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