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체험 극과 극
1990년. 나의 밤색 명찰은 이제 4학년을 뜻하게 됐다. 바른생활로 시작하는 교과목이 이젠 없는 만큼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생존해야 하는 극한 경쟁체제에 들어서게 됐다. 국, 산, 사, 자를 중심으로 교과목이 많아진 어엿한 고학년이지만 치토스 덕에 상대적으로 키가 더 작아져 앞자리는 내 차지가 되었다.
한쪽 볼에 큰 사마귀 점 그리고 사천왕 못잖게 눈이 부리부리한 임희우 선생님이 4학년 6반 담임을 맡게 되었다. 이정무라는 아이가 반장이 되었고 내가 아닌 다른 아이들이 부반장에 올랐다. 이제 크고 노란 부회장 배지는 내려두고 평범한 학생으로 지냈더니 더는 내게 ‘교사용’ 참고서나 문제집이 주어지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조금만 떠들거나 수업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면 멀리서 그 애를 검지 손으로 가리키곤 손가락을 자기 발밑으로 향하게 하는 죄스쳐를 빠르게 두어 차례 반복한다. 지체 없이 튀어 오라는 명령이다. 별도의 지시봉 내지는 회초리 역할을 하는 도구가 따로 없는 만큼 선생님 앞에 선 아이는 짝짜자짝! 하는 소리와 함께 귀싸대기를 맞는다. 운이 좋으면 양 손바닥으로 한 방, 레프트 롸이트 각 한 방 이렇게 세 대만 맞는 경우도 있으나 대게는 한 번 더 양 손바닥으로 마침표를 찍곤 했다. 나도 맞아봤는데 양 손바닥이 뺨에 닿는 순간 안구와 뇌가 급격히 흔들려 정신이 혼미해짐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게 된다.
반장 이정무는 딱히 큰 잘못을 하지는 않았으나 툭하면 불려 나가 담임선생님의 샌드백이 된 것처럼 얻어터졌다. ‘저런 콤보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연속기와 함께 자진모리장단으로 2 분단 앞 쪽에서 시작된 구타는 2 분단 맨 끝과 3 분단 맨 끝을 돌아 3 분단 맨 앞까지 이어진 적도 있었다. 학교 생활이 그로 인해 공포스럽게 바뀌었고 위력에 압도된 아이들은 모범생은 못되더라도 숨죽여 조용한 척이라도 해야 했다. 이렇다 보니 급우들 간 못살게 구는 아이 하나 없이 내부결속이 잘 다져졌던 한 해로 남아있다.
우리 반은 수업이 끝나면 교실 옆에 붙은 계단 청소를 담당하게 되었다. 한 명당 계단 한 칸씩 맡게끔 담당자를 지정하여 쓸고 닦는 것은 물론 미끄럼 방지 금속 마감재까지 광을 내야 했다. 칙칙한 실내에서 쭈그리고 앉아 광을 내는 모습이 수용소의 포로들 같다. 평소에 학생들이 밟았다간 줘터지기 십상인 교사용 중앙계단은 일머리 있는 아이들만 선별하여 청소를 했는데 금속 마감재의 광택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거기에 자극을 받아 조각 사포로 열심히 맡은 계단을 빛냈더니 무서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귀가해도 좋다는 허락을 득했다.
오랜 기간 정든 계양아파트를 떠나야 할 때가 왔다. 이곳 십정동에서는 멀리 떨어진 인천시 북구 작전동 소재에 새로 짓고 있는 아파트를 분양 받았는데 입주시기가 도래하기도 전에 거주중인 집이 팔렸기 때문이다. 집이 완성될 때까지 애꿎은 외할먼네를 임시거처로 삼았다.
간석동에 위치한 문화연립(‘문화주택’이란 이름으로 아직도 있음!) B동 1층 끄트머리 집 거실은 우리 집 짐으로 가득 차 한 사람만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는 복도로 탈바꿈되었다. 방 세 개의 이 집에는 이미 외조부모와 작은 외삼촌이 살고 계셨고, 그중 가장 작은 방을 우리 가족이 사용하게 됐다. 엄마 입장에선 친정 찬스를 200% 활용하는 셈인데 이렇게 수개월을 신세 졌다. 이런 민폐가 또 있을까 싶다.
임시 거처에서 30분 넘게 버스 안에서 치이며 통학을 해야 했던 나와 동생에겐 이런 생활이 꽤 버겁게 느껴졌다. 학업에 있어 다소 자만했던 나는 힘겨운 통학길과 정신 사나운 집안 분위기가 더해져 성적도 흔들리고 학습의욕도 저하되었다.
외할먼네 집에 존재하는 TV는 두 대다. 작은 외삼촌 방의 것은 AFKN이 나오질 않았고 안방의 TV 앞은 외할아버지가 항상 지키고 앉아 계셨다. 토요일 오후 AFKN에 편성된 WWF 뢰슬매니아의 얼티밋 워리어를 봐야 하는데 시종일관 지루한 KBS1만 보고 계신다. 숨이 막혀 집 밖으로 뛰쳐나와 동네 오락실로 향한다. 주머니엔 달랑 백 원짜리 동전 한 개. 그곳에서도 WWF 게임을 하다가 앙드레 더 자이언트와 밀리언 달러맨 조합에 무릎을 꿇고는 아쉬운 마음에 남의 게임만 하염없이 구경한다. ‘INSERT COIN’ 메시지가 깜빡이며 수차례 반복되는 데모 게임 시청마저 지겨워질 때쯤 하늘은 어두워졌고 그제야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외갓집은 세상에서 제일 따분한 장소로 느껴졌다. 모든 장난감은 이삿짐으로 단단히 봉인되었고, 이미 질릴 대로 질려버린 나의 재믹스 게임기로는 작은 외삼촌이 열심히 ‘요술나무’를 하고 있었다. 동아전과 보다 두껍지만 낱장만큼은 매우 야들야들해 몇 장쯤은 재미로 찢어보고픈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며 전화번호부를 넘기다가 괜히 이곳저곳 명기된 번호를 눌러본다. 여러 국제전화가 안내된 내용을 보곤 국가번호와 함께 무작위로 통화를 시도했는데 알아듣지 못할 외국인과의 통화가 신기하면서 재밌다. 외할아버지는 사용한 적 없는 국제전화요금 청구서에 매우 억울해하며 전화국과 지난한 다툼을 이어갔지만 진범을 색출해내지 못하고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겨둔 채 2003년 별세하셨다.
우리 가족이 머무는 곳이긴 하지만 방 안은 모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짐으로 가득한 나무 장롱과 비키니 장이 들어서있어 간신히 누울 공간만 있었다. 괜히 장을 열고 압수수색하듯 뒤져본다. 정체 모를 옛 물건들이 많이도 들어있었는데 웬 철사 뭉치가 보인다. 만져보니 보통의 철사보다 훨씬 유연하다. 이빨로 깨물어 보니 ‘똑’하고 쉽게 잘린다. ‘4학년이 되더니 내 이빨이 강해졌나?’ 모처럼 자신감이 샘솟아 그 철사를 계속해서 절단해 질겅질겅 씹다가 입 속에 머금고 있었다. 이런 행위를 이곳에 머무는 동안 수차례 반복했는데 어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철사가 아니라 인두기용 납땜줄이었다. 1학년 준비물이었던 물체주머니에서 납의 시편을 봤음에도 그걸 잊고 지냈다. 나에게 어떤 면으로든 문제가 있다면 이 사건도 일정 부분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 믿는다. 생활기록부를 보면 1990년부터 1991년까지 키가 1cm밖에 자라지 못했다. 납의 좋지 않은 성분이 육체적인 성장은 물론 뇌 기능까지 저하시킨 것은 아닌지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
90년대 초까지는 명절이 아닌 주말에 친척들 간 모임이 꽤 있었다. 모임 장소는 주로 봉천동에 위치한 막내 고모댁인데 반지하를 포함하여 총 3개 층의 큰 주택이다. 막내 고모는 슬하에 1남 4녀를 두셨는데 막내 누나가 나보다 6살이나 많았을 만큼 나와는 나이차가 있는 누나들과 형이다.
그 집에 방문할 때면 누나들이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테잎을 함께 보곤 했다. 홍콩에서 제작된 영화인데 주윤발, 유덕화, 장국영 등의 멋진 배우가 툭하면 총을 난사하며 피를 보게 되는 비극적인 스토리가 주를 이뤘다. 홍콩에서 제작한 영화는 모두 흥미로웠고 세련된 도시가 화면에 많이 등장한 이유로 그곳을 우리나라보다 몇 배는 잘 사는 선진국으로 여기며 동경하게 됐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물고 있는 담배가 너무 멋있게 느껴져서 이후 할머니의 라일락 한 갑을 몰래 훔쳐 발코니에서 겉담배를 피우곤 했다. 제대로 한 모금 흡입해보려 하면 매캐한 기체가 내 목을 따갑게 만들어 절로 눈물샘이 터진다. 이 사탄의 한숨과 같은 물질을 할머니와 아빠를 비롯한 어른들은 왜 들이켜는 것일까? 나는 5학년이 되어서야 담배를 끊었다. 이래서 내 기관지가 좋지 않은가 보다.
나는 롯데월드의 존재조차 몰랐는데(물론 자연농원이나 서울랜드도 가보지 못했다...) 부모님이 우리 형제를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거대한 유리돔과 이색적인 건물 그리고 새로운 어트랙숀에 촌닭 둘은 휘둥그레진 눈을 어디에 고정해야 할지 모른다. 뭐니 뭐니 해도 놀이 기구하면 인천 송도유원지였는데 그곳과 비할 바 아니다. 공기부터가 달랐고 항상 흥겹게 “여기는 로옷떼 월드~♪”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딱 다섯 종류의 어트랙숀이 이용가능한 티켓이었음에도 매직아일랜드까지 종일 돌아다니며 신문물을 맛봤다. 외가댁 구석진 방에서 먼지 쌓인 물건을 뒤지며 납이나 씹다가 이런 날이 다 오는구나.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나중에 성공한 모습으로 또 와야겠다.
2학기가 되자 내가 빛냈던 계단의 금속 마감재가 방학 기간 동안 탁하게 산화된 채 방치되어 있다. 다시 포로처럼 굽혀 앉아 묵은 때를 벗기고 나면 나를 비롯한 소수만 남아 ‘해법수학’ 교재로 산수경시대회 준비를 해야 했다. 가뜩이나 갈 길이 먼데 무서운 선생님 밑에서 늦게까지 과외수업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정쩡한 성적으로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나보다 잘하는 아이들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니 풀이 죽었다. 그러나 나에겐 회심의 ‘전학 카드’가 품 안에 있다.
연일 이어지던 방과 후 특별 수업에선 모의 테스트도 병행됐다. 선생님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자 아이들에게 기나긴 잔소리를 이어가던 중 한 친구가 나의 비밀을 고해바쳤다.
“선생님 두성이(개명 전 내 이름이다...) 전학 갈 거래요.”
“뭐? 전학?”
선생님의 튀어나올 듯한 큰 눈동자와 볼에 있던 사마귀점이 동시에 미세하게 떨렸다. 언제 어떻게 커밍아웃할까 고민했었는데 오히려 시원했다. 산수경시대회고 뭐고 쌍 싸대기와는 이제 영원히 안녕이다.
드디어 새 아파트가 완공되었다. 황토색 새 옷을 입은 작전 1차 현대아파트가 이제 우리 집이다. 105동 504호 32평형의 우리 집은 새 가구와 새 가전으로 꾸며져 있어 좁고 칙칙했던 외할먼네 작은 방과 무척이나 대비됐다. 멋들어진 바텔 무선전화기까지 거실에 놓여있으니 부잣집 도련님이 된 기분이다. 동생 놈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한참을 둘러보더니 집이 왜 이렇게 넓냐며 감탄한다. 처음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에 살게돼 뚜렷한 목적 없이 15층까지 탑승해보고 종모양 버튼도 눌러본다.
새집증후군이 안 오면 이상하리만치 새 집은 본드 냄새와 시큼한 실리콘 냄새로 가득했지만 이마저 향기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새로운 이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온통 논이거나 오래전에 지어진 저층 건물들뿐이다. 엄마는 새 학교로 등교해야 한다며 아침부터 서둘러 채비했다. 우리는 한껏 수그린 황금빛 벼를 해치며 좁디좁은 논두렁을 걸었다. 신발은 금세 설피를 덧 신은 듯 질퍽한 진흙으로 크고 무거워졌다. 시멘트 바닥에 올라서서 진흙을 짓이기듯 덜어내며 옆을 봤는데 엄마의 하이힐 구두는 웨지힐이 되어 있었다.
전학 갈 학교는 작전국민학교로 아파트 단지와는 달리 기대했던 새 건물은 아니었다. 교실 문은 전과 다르게 슬라이딩 방식의 나무문이었고 바닥은 테라조가 아닌 마루다. 사소한 부분부터 이질감이 들어 그냥 다시 예전 학교로 돌아가고픈 마음도 잠시 먹어봤다. 4학년 3반 교실에 들어서서 신기한 듯 쳐다보는 급우들에게 어색한 인사를 했다. 담임인 최종균 선생님은 임희우 선생님보단 인상이 온화하고 무엇보다 학생들의 뺨을 후려갈기지 않아 참 다행스럽다. 배정된 번호는 63번. 60번대는 알고 보니 죄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전학생들이다.
교실 문과 바닥 타입은 물론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까지 전과 다른 것들로 인하여 가을 내내 학교에 정을 붙이기가 어렵다. 먼저 말을 거는 아이들도 소수 있었으나 이너 서클에 소속된듯한 아이들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한국인 사이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 같다. 자연스레 60번대 아이들끼리 아파트라는 공통분모로 엮여 소통하게 됐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숙제를 받았다. 연휴를 마치면 제출해야 하는데 대뜸 동·서독 통일에 대한 소감을 써 오라는 것이다. 객관식 문제 풀이에 익숙한 나는 이런 서술형 미션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반공교육을 할 때가 언제인데, 이제 와서 우리도 공산당과 손을 잡고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이뤘으면 좋겠다고 써야 할까? 쟤들이 왜 갈라졌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뭐라고 써서 제출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으나, 명절 내내 답이 안 나오는 미완의 숙제로 불편한 휴가를 보내게 됐다.
이사를 가고 전학을 했던 이 시기가 당시로선 알게 모르게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수업을 곧잘 듣고 학습한 바를 기억해 두던 나는 이때부터 태도가 다소 산만해졌다. 아빠는 항상 회사일로, 엄마는 이사 준비로 바빠서 전처럼 시험 기간에 나란히 앉아 총정리 문제집 풀이를 하지 못했다는 변명을 늘어놔본다.
나의 교육과정을 되돌아보면, 4학년부터라도 흔들리지 않고 교과목의 진도에 집중해야 이후의 학습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과 과정만으로 성과를 내고 대학을 진학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난 우리 아이는 적어도 초등 교육과정 중에는 전학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사교육 없이 스스로 책을 탐색하고 원하는 정보를 찾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데 아빠부터가 글러먹었다. 아이 앞에서 스마트폰 보는 모습부터 없애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아이가 읽는 책은 분량이 왜 이렇게 많은 지 한 권만 읽어줘도 목이 아프다. 내가 창작한 관념동화 정도의 분량이 딱 적당한데 아이가 들고 오는 책은 내용이 참 알차기만 하다.
매일 내가 아이와 함께하는 것이라곤 아이를 몸으로 짓이기고 간지럼 태우다가 괴물소리를 내며 쫓아가는 일 따위다. 내일부터는 유튜브 좀 그만보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갖도록 해보겠다. 아이의 미래 사교육비까지 땡겨와 이 집을 짓는데 털어 넣은 만큼, 꼭 책을 읽어주지는 못하더라도 여러 질문을 해보며 아이의 생각에 집중해보려고 한다. 어디서 봤는데 최고의 육아는 부모가 귀차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학교 공부는 못해도 괜찮으니 어디 가서 주눅 듦 없이 생각하는 바를 똑 부러지게 표현하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