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정유년

귀인

by 김동의

나 말고도 촛불을 든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파면되었고 한참 바닷속에 침몰해 있던 세월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인양되었다. 처참하게 녹슨 뼈대가 세상에 드러난 만큼 관련된 모든 실체적 진실이 규명되기만을 바랐다.


대의원이란 타이틀도 어느덧 임기를 다 해 2017년은 단독으로 출마하게 됐고 많은 조합원들의 찬성표 덕에 또다시 당선됐다. 첫 술에 배부를 리는 없었다. 회사는 날 길들이기 하듯 적당한 거짓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거나 다른 대의원들에게는 공유했던 정보를 대외비라며 막았다. ‘대외라니... 나는 회사 밖의 사람이란 말인가?’ 싶었다. 소속 팀에서 이어졌던 악습이나 업무적 관행은 뿌리가 깊어 매년 노사 협의 안건으로 다뤄도 쉽사리 바뀔 줄을 모르며 협의점에 이르지 못한 안건들도 많아 힘에 부치던 날이 많았다.


노사 간 한치 양보 없는 팽팽한 사안에 있어 상대는 센터장, 실장, 팀장, 파트장과 책임연구원들까지 합세하여 조직적으로 대응하고 있었고 나는 친한 후배 D 연구원의 조언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회사와 논리적 공방을 펼칠 때에는 변호사의 모습이었다가, 대의원 대회 같은 곳에서는 입법 기관의 모습이었다가, 때론 기자의 모습으로 조합원들에게 소식을 실어 나르기도 했다. 그 어떤 페르소나도 내 본질과 닿아 있지 않았음에도 이 자리가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양 달리는 경주마처럼 멈출 생각 따윈 해보지도 못했다. 사업장 안으로 들어서면 언제나 투견처럼 날을 바짝 세웠으니 살짝 결은 달랐지만 회사 안에서는 입사 초 다짐했던 바와 같이 견마지로를 다 하고 있는 셈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퇴근 후 부쩍 자주 만나던 고교 동창 L의 권유로 거처를 옮겼다. 강남역의 그 자취방에서의 삶은 아무리 찾아봐도 좋은 점이 없었다. 물가도 비싸고 인근에 흔한 대형마트 하나 없었으며 매일 바삐 다니는 도시인들만 스치니 더욱 삭막하게 살게 되는 것 같았다. 작년 강남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수역 Angel-in-us에서 커피 한잔하다가 충동적으로 들른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산비탈에 위치한 꽤 널따란 3층 방을 보증금 1000만 원, 월 불입금 45만 원에 구하게 됐다.


친구 L도 머지않아 같은 건물 1층으로 입주하면서 거의 매일같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거나 이수 시장 근처를 배회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스트라이다(Strida) 라이딩도 즐겼는데 한강에 접근하는 데에는 이만한 수단이 없다고 여겨졌다. 툭하면 강바람을 쐬며 어르신들이 주로 하는 운동기구를 만지작 대거나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한강에 드리워진 윤슬을 보며 나는 언제쯤 사랑하는 이를 만나 저렇게 빛 날 수 있을지 와 강변으로 들어선 아크로 리버 뭐시기하는 아파트들을 보며 매달 얼마를 모아야 이런 집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한 담론을 즐겼다.


L과의 라이딩 시절


주말 중 하루는 꼭 아빠가 계신 요양병원을 찾았다. 작년 한참 재활훈련을 받을 때와 같이 호전되지는 않았지만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묻는 말에 고개를 힘겹게 끄덕이거나 눈을 깜빡이셨다. 다닥다닥 붙은 침대에 누워계신 다른 어르신들은 무조건적인 도움의 손길 없이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생명체로 흰 텍스타일 천장만 바라보며 세상에서 퇴장할 날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일주일 뒤에 이곳을 다시 와보면 아빠 근방에 계셨던 이들이 사라지거나 못 보던 어르신이 새롭게 와 계시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아빠의 숨소리가 좋지 않으면 요양보호사님이 오셔서 명치 쪽을 손바닥으로 몇 차례 두드린 후 목을 뚫고 삽관된 부분에 석션을 넣어 묵은 가래를 뽑아냈다.


같은 자세로 누워있기만 해도 뒤통수가 저려오거나 목이 불편해지는 법인데 움직일수 없이 누워서 눈만 깜빡이는 아빠의 모습이 새삼 불행해 보였다. 어쩌다 샤워라도 하려면 건장한 남자 두세 명이 동행해서 새파란 타포린이 깔린 들것에 환자를 옮겨 씻기곤 원위치시켜 다시 환자복을 입히는 그 짧은 순간에도 체온 조절이 안돼 벌벌 떠는 모습이 너무 딱해 보였다. 누워있는 사람이나 이를 지켜보는 사람이나 할 짓이 못됐다.


아빠와의 짧은 만남


나보다 이곳에 더 자주 와서 아빠 얼굴과 손발을 부지런히 닦고 면도까지 해주는 엄마도 대단해 보였다. 주 1회 와서 5분만 서 있어도 진이 빠지고 머릿속은 온통 절망적인 것들로 가득 차는 듯하여 남은 하루마저 좀처럼 웃을 일 없이 마치는 날이 많았다. 가끔은 인천 집에도 들러 미키, 마니, 모카 삼 형제(애견 치와와)와 살을 맞대며 쉴 때도 있었는데 아빠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좁은 발코니에 놓인 책장을 비롯한 어수선한 살림을 보곤 또 침체되는 기분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자리를 떴다.


모카와의 상봉




오랜 친구 중에 변호사를 하는 C라는 아이가 있다. 그는 교대역 인근에서 법무법인을 운영 중이었고 당시 가상화폐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았다. 조만간 적당한 상가를 구해 가상 코인을 채굴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이를 아주 큰 기회로 바라봤다. 아빠의 병원비와 암울한 엄마와 동생의 경제적 상황을 생각하니 한 줌이나마 쥐고 있던 돈이라도 이 기회로 불려두어야 활로가 뚫릴 듯했다. C에게 부탁하여 물색한 장소가 구해지면 그 구석진 자리만이라도 빌려 채굴기를 운영할 수 있냐고 문의해 보니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하다가 월 임대료는 자신이 부담할 테니 전기 요금은 운영할 채굴기의 수대로 분담하자고 했다.


비트코인은 국내에서 채굴기를 구하기도 어렵고 해외에서 들여오더라도 비용이 많이 들었으며 당시 기준으론 채산성이 무척 떨어졌다. 꿩 대신 닭으로 이더리움 채굴을 알아봤고 성능 좋은 채굴기 제작에 있어 대당 6개는 조립되어야 할 GeForce GPU 수급이 관건이었다. 괜찮은 메인보드 값이면 구해졌던 GPU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우리가 구했던 1060Ti 모델은 모두 품절 상태였다. 천신만고 끝에 삼성 반도체가 장착된 GeForce 1060 Ti를 수배하여 입금했고 임대로 얻은 군포시의 허름한 건물 5층 사무실에 모든 채굴기 자재를 홀로 옮겼다.


채굴기 자재와 완성된 채굴기


채굴기 총 부품비의 20%가 나의 가용 자금의 전부였기에 C에게 입금하고 냉방 기기 구입부터 전력선 연결 작업, 채굴기 조립, 채굴 프로그램이 세팅된 Window가 설치된 SDD 카피까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을 했다. C는 법무법인 일로 늘 여력이 없다 했고 그나마 내가 휴일에 쉬고 정시 퇴근이 가능하다며 현장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을 내게 일임했다.


채굴 프로그램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중단되거나 CPU가 멈추는 일도 종종 있어 원격으로 모니터링하다가도 수시로 현장 점검할 일이 많았는데 그 역시 내가 대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냉방 기기가 멈춰 급하게 달려가 사우나처럼 열기로 가득한 사무실을 식히고 자주 문제를 일으키는 개체의 H/W를 손보거나 SDD에 Window 프로그램을 재설치하는 지난한 작업을 이어가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새벽 두 시 넘어서야 집에 돌아가는 일도 몇 번 벌어지다 보니 투자금의 20% 밖에 보유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관리인 내지는 종업원으로 부림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꽤 불쾌했다. 자신은 체력이 없고 운전하기를 너무 싫어하니 체력적으로 자신보다는 낫다고 추켜세우며 내게 운전대를 맡겼고 매번 내 차로 서초동에서 안양 사무실까지 이동하는 모습조차 고깝게 느껴졌다. 물론 그 대가로 식사는 C가 사겠다고는 했지만 말이다. 국민학교 5학년 시절부터 쭈욱 친한 친구로만 알아온 C를 부쩍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 이대로는 못 할 짓이라 여기게 됐다. 이래서 친구끼리는 뭘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였구나 되뇌며 C에게 조심스럽게 그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실제로 이 즈음부터 아빠가 계신 요양병원에 입원비로 100만 원가량을 매월 부담해야 해서 당장 현금이 급하기도 했다. 당시 시세로 이더리움이 20만 원 정도였으니 쭈욱 운영했더라면 전기 요금을 고려하더라도 지금쯤 수익률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작년에 헤어진 인연을 생각하자니 더는 나와 결혼을 할 상대가 나타날 것 같지가 않았다. 어떤 여인이 나타나더라도 그냥 적당히 가깝게 지내다가 또 끝이 나겠지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곧 제네시스 브랜드에서 G70이라는 스포티 세단이 출시할 예정이라고 하니 그거나 계약해서 이곳저곳 폼나게 누비며 인생을 즐기기로 마음먹었을 때 한 처자가 나타났다.


7월 22일 비가 꽤 내리던 저녁이었다. 그녀는 내가 전에 살던 부천 상동에 거주지를 두고 있으며 중국에서 유학 중인데 지금은 방학 때 잠시 귀국해 집 근처의 베스킨롸빈스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일을 마치고 나서 만나봐도 괜찮겠냐는 제안에 그럽시다 했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나의 벨로스터 동승석에 탑승한 그녀를 빠르게 훑어봤다. 나이가 들며 느는 건 이상형에 대한 까탈스러운 조건과 상대를 스캔하는 속도뿐이다. 그녀는 키가 컸고 비율이 좋았으며 비를 조금 맞아서 그런지 조선 순백자처럼 밝고 티 없이 촉촉하게 빛나는 피부에 강하게 끌렸다.


늦은 시간인 만큼 피자헛에서 대충 요기를 때우곤 상동 야인시대 세트장 앞에 있는 탐앤탐스(지금은 사라진)에서 커피 한 잔씩 주문해 한참을 떠들었다. 나이는 나와 열한 살 차이여서 결혼 같은 건 생각 없겠구나 지레 짐작하고 멋대로 혼자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꺼냈고 그녀는 묻는 말에 간단히 답을 하거나 굉장히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에 대해 잠깐씩 얘기할 뿐이었다. 결혼한 이들이 결혼 상대를 처음 만난 순간 느꼈다던 그런 오오라나 광채 혹은 신비한 기운 같은 것은 관찰되지 않았다.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음을 은연중에 보이거나 말끝마다 배시시 웃어주지도 않아 그녀를 또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함께 차 한잔 하며 토커바웃해 본 결과 내 얘기를 잘 들어주고 엄마처럼 사치스럽지 않은 수수한 그 느낌이 좋아서 그날 밤 카카오톡으로 After를 요청했다.


다음날 현대백화점 U-PLEX에서 영화를 보자는 내 제안에 무척이나 덤덤하게 그러자는 대답으로 우리는 만남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사귈래?’ 라거나 ‘오늘부터 1일’과 같은 확정적인 의사표시는 오가지 않았지만 그저 요즘 아해들은 다 이런가 하고 그냥 따랐다. 그녀의 방학기간 동안 거의 빠짐없이 얼굴을 봤다. 아빠의 성년후견인 일로 가정법원을 가거나 기나긴 은행 창구 대기를 하는 지루하고 시시한 장소에도 함께했다. 단독으로는 거의 탈 일이 없는 기다란 자전거를 빌려서 남들처럼 꺄르륵대며 한강 바람을 맞는 뭇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도 즐겼다.


그녀와의 데이트


그렇게 뜨거운 여름이 저물어감에 따라 그녀의 방학도 끝이 보였고 다시 충칭(重慶)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왔다. 인천공항 출국장까지 배웅을 갔고 곧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곤 부쩍 가벼워진 벨로스터에 홀로 탑승해 인천대교를 건넜다. 이대로 쭈욱 볼 일이 없는 사이가 돼도 내 인생을 돌아봤을 때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생각하며 쓸쓸한 사당동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루 한 번 이상 영상통화를 나누거나 웨이씬으로 소통을 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인천 집과 아빠가 계신 요양병원에서만 지낼 생각을 하니 숨이 잘 안 쉬어졌다. 급하게 비자 신청을 하고 표를 알아봤다. 2012년 베이징 출장 이후 중국 쪽에는 발을 들일 일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대륙을 또 밟게 됐다. 추석 연휴 시즌의 인천국제공항은 처음 가봤는데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새벽부터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고 공항에서 한참 떨어진 이마트 앞 넓은 잔디밭에 주차를 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출국심사에 몰려든 인파를 보자니 에버랜드 티 익스프레스 대기열은 비교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며느리들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 정성스레 홍동백서 차례상을 차리는 집보다 진작부터 조상 덕을 봐 때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민족들을 보며 명절이라면 응당 진행돼야 한다고 믿었던 일련의 의식들이 부질없어 보였다.


충칭 공항에 마주나와 있는 그녀와 재회했고 만나는 순간부터. 나를 무척 반기는 모습에 전에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으로 충만했다. 짐을 찾고 대기 중인 택시에 올라 그녀의 유창한 중국어로 행선지를 알리는 모습이 기특하고 든든해 보였다. 지난 베이징 출장에서 봤던 차량 역주행이나 신호를 무시하는 식의 아포칼립스 영화를 방불케 하는 일들이 이곳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수시로 빵빵 클랙슨을 울리는 차들과 양보라고는 1도 없는 차량 틈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바람에 이미 내가 지닌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소진된 듯했다.


10월 초의 충칭은 보통의 여름날처럼 더웠고 대형 쇼핑몰들이 난립한 데에 반해 쇼핑할 거리는 더럽게 없었다. 관세 정책 때문에 수입품목은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메리트가 전혀 없었고 현지 브랜드를 사려니 선뜻 손이 가는 것들이 없었다. 대륙의 실수라고 일컫는 샤오미 체중계를 구입한 것으로 족했다. 나는 성격과는 달리 휴양지에서의 여행보다는 복작거리는 현지 시장이나 작은 상점들을 거닐며 쇼핑하기를 즐기는데 이곳은 그런 즐거움이 없어 살짝 아쉬웠지만 그녀와 함께했기에 마냥 좋았다.


모든 것이 거대했다. 홍야동에서 한참을 걸으며 소기름을 굳힌 ‘훠궈’를 파는 집을 많이 목격했는데 유학생들도 많이 구입하는 품목이라고 했다. 훠궈를 접해본 바 없는 나는 냄새도 그리 좋지 않은 제품의 비주얼을 보자니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비닐이 연상됐다. 관음교 주변으로 비현실적으로 높이 솟은 빌딩 숲을 구경했고 해방비의 인파 속을 해치며 다닐 적엔 '뉴발란스'의 짝퉁 브랜드인 '뉴발리온' 매장을 대놓고 크게 열어 운영하는 당당한 모습에 실소가 터지기도 했다.


마지막 임시정부가 있던 건물도 찾았다. 맑은 날임에도 그늘이 지고 다소 습했던 터로 기억하는데 많은 이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일부러 이런 장소를 택하지는 않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만리타향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해 조국의 독립이라는 일념 하에 분투하던 열사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절로 마음이 경건해지고 숙연해졌다. 온 김에 김구 주석이 앉았던 의자에도 한 번 앉아봤다. 제습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습하고 오래된 물건에서 풍기는 곰팡이 냄새가 의미 있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조금 안타까웠다.


충칭 임시정부에서


그녀의 학교 재학생들이 당일치기 패키지여행을 간다기에 어울려봤다. 수 시간을 버스에서 쭈그리고 이동했는데 놀랍게도 도착한 곳 역시 같은 충칭시 소속이었다. 유양현의 치우구려성 (蚩尤九黎城, Chiyou Jiuli City)에도 들러 열심히 사진만 찍었는데 아주 잘 지은 야인시대 세트장 느낌이 짙었다.


치우구려성에서. 이름만큼 구리지는 않았다.


다시 귀국해야 할 날이다. 겨울 방학 때까지는 꼼짝없이 롱디커플 신세로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충칭 공항에서 KFC 치킨버거 하나를 아무런 맛도 못 느끼며 삼키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출국길에 올랐다.


틈만 나면 웨이씬으로 마치 사무실 책상 주변의 사우들 보다 더 가까이서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이러다 질려서 나가떨어지지는 않을까 했는데 그녀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업비트와 BITREX로 한참 불타오르는 코인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흐뭇해할 때 즈음 성탄절이 다가왔다. 그녀는 아무런 기별 없이 충청도도 아닌 충칭에서 서울까지 찾아왔다. 항공료도 없었을 텐데 내년 졸업학기만 남겨두고 겨울옷을 이민 가방에 한 보따리 싸와 낑낑대며 사당동 산비탈을 올랐다. 이 순간 이 아이라면 결혼에 진심인 것 같으니 놓치지 말자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제네시스 G70 따위는 마음속에서 영구히 지우고 그녀와 함께할 궁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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