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무술년

굉음

by 김동의

나의 그녀는 마지막 한 학기만 남겨두고 본격적인 겨울방학에 돌입했다. 거의 매일같이 사당동에서 부천 상동까지 서로 오고 가는 당도 높은 연애활동을 펼치며 하루의 대부분을 붙어 지냈다. 사당동 원룸에서 LOL을 할 적에 단 한마디 불평불만 없이 옆에 앉아 나의 플레이를 관전해 주는 그녀의 모습에 더더욱 평생을 함께 할 귀인으로 여겨졌다.


그녀의 모친께서 나를 궁금해한다며 함께 식사를 하자는 제안이 왔다. 만남을 앞두고 크게 긴장되진 않았지만 내 형편없는 자산현황과 그녀와의 나이 차이에 비호감만 심어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중동 현대백화점에서 좋은 첫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뇌물로 KIEHL’S 수분크림 한 통을 구입해 인근에 있는 일식집으로 향했다. 처음 만난 그녀의 모친은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날 맞이해 주셨지만 웃음 뒤에 꼿꼿하고 엄격해 보이는 느낌이 있었다. 통상적인 Q&A가 이어지다가 대뜸 말씀하셨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고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감격이었다.


원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간 처가 식구들의 마음이 아플까 봐 급하게 살 집을 알아봤다. 회사 셔틀버스가 다니는 지역 위주로 신축 아파트의 가격을 보니 급여를 한 푼도 쓰지 않고 7년 이상은 모아야 간신히 작은 면적 한 칸을 얻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투자했던 코인들은 매일매일 바닥을 갱신했고 아빠가 계신 요양병원 입원비 백만 원부터 월세에 대출이자까지 매달 부담해야 하는 내 상황은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 인근에 위치하고 무주택 기혼 직원 대상으로 지원되는 사택을 알아봤다. 방 두 개에 민트색 몰딩만 봐도 연식이 짐작되는 공동주택이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못돼서 지체 없이 서초구청으로 달려가 혼인신고를 올렸다. 커플링 따위로 사랑을 다짐하는 애들 수준의 맹세와는 달리 낙장 불입, 절대 불변일 것 같은 엄중한 문서에 도장을 꾸욱 눌러 찍었다.


나에겐 보편적인 시선에서 행복의 순간으로 여겨질 법한 경사나 이벤트를 앞두고 발생할 가능성이 극도로 낮은 비극적인 일들을 상상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첫 일본 여행을 앞두고 도쿄 대지진이 일어나거나 불의의 비행기 사고를 겪는 것과 같은 망령된 생각들이다. 생애 첫혼인신고 후에 북한에서 뭔 미사일을 동해에 쐈다며 언론들은 연일 불안감을 조성했다. 깨가 쏟아질 신혼 생활도 못 해보고 전쟁에 동원되는 나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처음으로 컬링 종목을 관전하고 안경 쓴 처자를 응원했던 평창 동계 올림픽엔 뜻밖에 백두혈통이라는 독재자의 여동생이 그곳을 찾았고 머지않아 문재인 대통령과 국방위원장이란 사람이 판문점에서 만나 꽃 피는 계절에 걸맞게 화해 무드를 펼쳐가는 듯했다. 무탈하게 신혼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들과 미국의 트럼프를 응원했으나 염원했던 종전 선언 같은 것에는 미치지 못해 안타까웠다.




나의 신부가 치과 치료를 위해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5월 27일 아빠가 요양병원에서 호흡을 멈추게 됐다. 2년 넘도록 좁은 침대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고통만 받다가 이제야 벗어나는구나 싶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새벽같이 병원을 찾아가 본 아빠의 모습은 마치 흐르던 눈물이 그대로 굳어버린 듯 눈을 감지 못한 채 투명한 결정들이 각막을 뒤덮고 있었고 전과 같이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생명의 기운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몸은 차게 식었다.


지체 없이 순천향대학교병원 장례식장으로 아빠의 유해를 옮긴 후 정신없이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는 와중에 오동나무 관은 어떻고 수의의 재질 별로 가격 차이는 얼마 난다는 병원 측 직원의 말은 도무지 들리지가 않았다. 곧 한 줌의 재로 될 육신에 무엇을 덧 입힌다 한들 불초자가 효자로 둔갑할 수는 없는 노릇으로 여겨져 모든 옵션을 최저 그레이드로 요구했다.


장례지도사의 안내에 따라 엄마와 동생은 물론 새 신부까지 길거리 현수막보다는 조금 나아 보이는 소재의 상복을 걸치고 빈소를 지켰다. 생전에 아빠를 좋게 추억하는 지인들이 많았는지 적지 않은 인원이 이곳을 찾아 애도를 표했다. 같은 팀 소속 사우들과 함께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조직원들도 방문해 줬는데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못 나눈 것이 아직까지 불쑥불쑥 떠올라 나를 괴롭게 한다. 서로 뭘 그렇게 바쁘게 살았는지 교류가 뜸하던 친척들이나 텍스트로만 안부를 나누던 고등학교 동창들을 이런 날이 되어서야 만나보게 됐다.


아빠와 실제 만난 적은 없으나 온라인 카페에서 소통을 했다던 아저씨 세 분도 어떻게 소식을 접하고 찾아오셨다. 아빠가 쓰러지던 순간에도 놓지 않았던 휴대기기를 살펴보면 활동의 흔적이나 생각의 자취를 추적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은 아직까지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고 있다. 그 커뮤니티를 꼭 찾아 온라인상으로라도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기꺼이 연가를 사용해서 발인 장소까지 함께해 준 친구들과 후배 D 연구원은 평생 잊지 못할 듯하다.




처음 상주로서 치르는 장례식은 적지 않은 지출이 수반됨을 알게 됐다. 이 분야에 네이버 최저가 비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고 거의 모든 것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00원이라도 저렴한 곳을 찾아 헤맸던 평소와는 달리 수십만 원은 우습게 빠져나가는 장례 항목에는 큰 고민 없이 관대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조문객들 덕에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도 이천만 원가량의 큰돈이 남았다. 그 돈이 내 대출금액을 일부 상환하는데 쓰일 줄 알았던 생각은 나만의 큰 착각이었다.


발인을 마치고 인천 집에 머물렀던 날 엄마는 필사적으로 내 뜻을 가로막았다. 그 와중에도 빈소를 찾아와 준 자신의 지인들에 대한 답례와 본인 체면을 운운했고 대출금 중 일부조차 상환할 수 없다며 울부짖었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엄마와의 관계는 이 순간을 기점으로 더 엉망으로 치닫게 됐다. 고래고래 괴성을 지르며 그동안 키운 값을 내놓으라는데 도저히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고 미세하게 남아있는 애정마저 모두 타버리고 있었다.


생모는 2004년부터 약간의 나아짐도 없이 부쩍 쪼들리며 살아오는 동안 분수에 맞지 않은 헬스장 이용을 고집했고 그곳에서 알게 된 1기 신도시 아줌마 몇 명만이 인맥의 거의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어둡고 어려운 상황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공개할 성격이 절대 못 되고 괜찮게 사는 것으로 '보이는' 군살 없이 젊어 '보이는'데 치중하여 그마저도 피상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확신하고 있다.


아빠가 생전에 이용하던 중고 투스카니 차량을 끌고 다니면서도 그들에게는 '아들이 타던 차'로 둔갑시키는 식의 꾸밈이 리플리 증후군까지 이른 것은 아닐지 의심되기도 했다. 그 헛바람 내지 허세는 꿈 많고 배고픈 10대도 아니면서 당장 생계조차 불안정하게 살며 시니어 모델 학원까지 등록하는 상황으로 이끈 듯하다.


서른아홉 노총각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 마당에 별 뜻 없이 했을 수도 있는 생모의 말들이 문득 떠올라 꼬일 대로 꼬인 나는 아니꼽고 소름 돋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혼 꼭 안 해도 돼."

"애는 안 낳는 게 좋아."




이맘때 회사에서의 삶은 비교적 균형 있는 단조로움을 되찾았다. 나는 세 번째 대의원에 도전하여 당선되었고 여전히 개선되어야 할 사안들은 끊임없이 발생하며 항상 회사와는 날을 세우느라 피로한 생활이 지속됐지만 과거의 부조리함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던 D 연구원은 노동조합 전임으로 차출되는 바람에 조금은 외롭고 어설프게나마 난관을 헤쳐가며 끊임없이 활동을 이어갔다.


2015년 어느 날 D 연구원은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형님, 에쿠스 값에 대기업 브랜드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요.”


그 말에 묻고 따짐 없이 바로 궁극의 청약통장 기회를 써버렸다. 용인시 처인구에 한숲시티라는 대단지 아파트 설립 계획이 있었고 44㎡ 분양가가 약 1억 4천만 원으로 10%의 계약금만 준비하면 무이자 중도금 대출도 가능하고 마지막 잔금 시점엔 집단 담보 대출로 전환할 수 있다고 했다.


잊고 지냈는데 어느덧 그 아파트의 입주시기가 다가왔다. 회사와 접근성이 떨어져 매도해 버릴까 생각했다가 마피가 천만 원에 육박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회사 사택의 기회는 포기하고 그냥 실거주하는 방향으로 굳히게 됐다. 그즈음 이곳은 한숨시티라는 오명이 퍼지긴 했지만 나는 한숨 쉬지 않고 열심히 살림살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허리가 잘릴 듯 허리띠를 졸라매도 아파트 잔금을 비롯하여 새살림 장만, 예식장, 신혼여행까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신혼여행을 포기할까 하던 차에 장모님께서 급시우와 같은 천만 원 수표 한 장을 결혼 준비에 보태라며 내미셨다. 주택 비용을 제외하고 모든 결혼 비용을 합해보니 천칠백만 원에 미치지 못했다. 2016년 인천 집 이사를 앞두고 엄마는 대체 뭘 구입했길래 내 대출금 사천오백만 원을 다 썼을까 싶었지만 이제 와서 따져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위였다. 상당 부분은 아빠 병원비로 지불됐으리라 여기고 앞날만 바라봤다.


배우자의 졸업식과 유학 생활 청산을 위해 뜨거운 6월 충칭을 다시 찾았고 함께 입국해 사당동 원룸에서 7월 새 아파트 입주와 9월의 결혼식에 대비하여 분주하게 움직였다. 예식장은 무조건 하객들의 주차 편의를 1순위로 찾은 결과 인천 문학동 그랜드 오스티엄을 인당 식대 삼만 사천 원에 계약했고 신혼여행지는 L.A로 정해 여러 사이트를 물색한 끝에 항공권을 예매해 뒀다.


정들었던 사당동 집주인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예비 신혼부부는 널따란 농경지에 아파트만 덩그러니 세워진 한숲시티로 발을 들였다. 다행히 아파트 상가에 편의점이 입점되었지만 장이라도 한 번 보려면 역북 이마트나 코스트코 공세점까지 최소 10Km 이상은 기본적으로 움직일 각오를 해야 했다. 회사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전무하여 매일 자차로 통근했는데 편도 36Km의 국도는 1시간 40분이 넘게 소요되었고 교통량에 따라 시간 편차도 컸다. 평택시흥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었으나 편도 70Km로 비싼 휘발유를 더 태워야 했고 매일 지불되는 고속도로 요금까지 고려해야 했다. 주 5일 운전이 주업인 사람처럼 아스팔트 사나이가 되었고 운전만으로 진이 빠져 집에 오면 쓰러져 잠들기 바빴다. 30분이 운전 한계치인 사람에게 너무 가혹한 출퇴근 환경이었다.


한숲시티 전경


결혼식만으로도 준비할 것들이 의외로 많았다. 스튜디오 촬영, 주례, 생화, 폐백 등 가급적 건너뛸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생략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 웨딩드레스는 빌렸고 당일에 입을 내 예복은 지오송지오 아울레트 매장에서 199,000원 주고 구입했다. 누구와 시합을 벌이는 것도 아닌데 최단 시간의 예식을 하고 싶어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식전 영상, 혼인 서약서만 내가 직접 준비했고 행진곡으로 쓸 <사·랑·을·그·대·품·안·에> 드라마에 쓰인 허밍음을 어렵게 구해 USB에 담아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처가 식구들과 우리 부부는 아침 일찍 부천 상동의 메이크업 샵을 찾았는데 특히 내 헤어는 그냥 내가 할 걸 하는 후회가 오늘까지 남는다. 역시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예식장에 들어서고부터는 누가 크게 정신 사납게 구는 것도 아닌데 혼자 마음만 분주해서 일분 일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머리에 남은 것이 희박하다. 여든을 훌쩍 넘긴 큰어머니께서 식을 앞두고 강한 충청도 억양으로 내게 말씀하셨던 것이 그나마 인상 깊다.


“늬들 피백 안 하는 거 큰 실수 하는겨!”


피백...? 내가 간과하고 있는 어떤 Pay back을 말씀하시는 건가 했는데 결혼식이 끝나서야 ‘폐백’을 의미하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 큰어머니를 비롯해서 연세가 지긋하신 친척 어른들은 엄마에게 폐백을 생략했다며 아쉬워하셨다는 후문을 들었다.


너무 간소화된 예식에 자칫 지나치게 단조로운 인상으로 장인어른이나 장모님 지인들의 뇌리에 남을까 봐 문득 걱정되기도 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상태에서 예식장 여직원을 따라 우리 부부는 식장 입구에 섰다. 들어가라는 안내에 당연히 예행연습인 줄 알고 빠른 걸음으로 버진 로드를 걸었는데 젠장... 본 행사였다. 연습까지 생략됐을 줄은 몰랐다. 회사 동기였던 기자 W의 능숙한 식 진행과 노동조합 조직원들의 축가에 힘입어 그나마 초라하지 않게 혼례를 마쳤다. 구석진 곳까지 찾아준 수많은 하객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허겁지겁 도가니탕을 비롯한 뷔페 음식을 섭취하기 바빴다.


축의금도 생각보다 많이 들어와 여윳돈이 생겼지만 좋은 날 얼굴 붉히기가 싫어 아무 말없이 엄마에게 내밀었다. 엄마는 내가 결혼을 하더니 부쩍 철이 든 것 같다며 듣고 싶지 않은 칭찬을 뒤통수에 대고 했지만 어떤 리액숀도 없이 나의 까만 벨로스터에 몸을 싣고 인천국제공항과 가까운 호텔로 가버렸다. 생라면처럼 딱딱해진 머리카락부터 온몸을 뜨거운 물로 씻어내자마자 저녁 식사도 거른 채 뻗어 잠에 들었다.


L.A로 향하는 날 일찌감치 일어나 소울푸드인 순댓국밥 한 그릇을 든든히 먹고 비행기에 올랐다. 직항임에도 비행시간은 꽤 됐으나 싱가폴 에어라인이라 그런지 몇 년 전 독일 출장 비행보다는 한결 편하게 L.A 공항에 착륙했다. 예약해 둔 공항 근처의 숙소에 짐을 풀고 미국의 스트륏 공기를 콧속에 한껏 담아보고자 무작정 도로를 걸었다. 인도에 설치된 쓰레기통을 열심히 뒤적이는 흑인 아저씨를 보고 겁이 나서 도로 숙소로 왔지만 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는 것만으로 그저 신나고 괜히 억눌리던 온갖 번민으로부터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바로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다시 올랐다. 고령의 아주머니 승무원은 굉장히 노련해 보이면서도 퉁명스러웠다. 짧은 비행 중에도 몸이 추워 담요를 요청했지만 그딴 것은 애초에 없다고 했다. L.A까지 이용했던 싱가폴 에어라인과는 모든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라스베이거스의 숙소는 대부분 호화로웠지만 숙박비가 그리 비싸진 않았다. 화려하게 빛나는 도심을 거닐다가 고든 램지의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폼 나게 나이프로 미디움 레어 고기도 썰어봤다. 이름 모를 굳즈샵을 둘러보면서도 모든 사물이 반짝이는 듯했고 내내 구름 위에 뜬 기분으로 가급적 많은 것을 시야에 담아뒀다. 호텔 커지노도 이용해 봤는데 룰렛 한 게임 만에 50불을 잃은 아내의 입에서 순간 터져 나온 거친 쌍욕도 처음으로 들어보게 됐다. 구글링으로 최소 베팅액이 가장 낮은 오래된 호텔 커지노를 찾아 두어 시간 동안 간접흡연을 하며 고전한 끝에 그녀가 잃은 금액보다 네 배 이상 벌어 복수를 한 것만 같이 통쾌했다.


비교 체험 극과 극처럼 럭셔리한 라스베이거스 호텔에서 매우 단출한 L.A 한인타운 근방의 단층 숙소로 이동했다. 미국 범죄 스릴러물에서 꼭 험한 일이 벌어지는 장소와 외관이 흡사한 숙소는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매우 깔끔하게 리모델링을 해둬서 신혼여행 기간 내내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L.A 단층 숙소


할리우드과 같은 유명한 장소도 들렀지만 주로 소소한 쇼핑에 진심이었다. 여러 몰을 다니며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물품을 구입하거나 CVS와 같은 대형 드럭 스토어에서 애스피린과 같은 약을 비롯해 먹거리를 쓸어 담기도 했다. 유명 아울레트도 들렀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ROSS 매장의 맛을 알게 된 후 곳곳에 있는 ROSS 간판이 목격되는 족족 방문해 꺄르륵 웃어대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태어나서 내가 이토록 소리 내어 웃어본 적이 있나 싶었는데 미소에 길들여지지 않고 굳어버린 내 안면 근육으로 인해 촬영된 사진마다 몹시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다.


딱히 미국을 찬양하거나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한 번 일지도 모르는 이번 여행은 꼭 여행책자에 나와있지 않더라도 미국 스러움이 많이 묻어있는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들의 속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매사에 배어있는 그들만의 여유가 좋았다. 서툰 운전에 길 위에서 당황할 적에도 흔한 클랙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 그곳의 배려 있는 문화는 내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9박 10일이 순식간에 흘러갔고 인천 공항에서 내려 다시 내 차에 시동을 건지 5분도 지나지 않아 뒷 차량의 경적소리를 듣게 됐을 때 비로소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실감되었다.


신혼여행의 단면들


앞으로도 다른 국가로 여행 가게되더라도, 경제적으로 한층 여유롭게 떠나더라도 이때만큼 속 편하게 오롯이 여행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드물 듯하다. 그래서 먼저 결혼한 이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신혼여행은 꼭 미친 듯이 신나게 보내라는 조언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