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
출퇴근이 고단한 것 외에 숲 속의 부부는 아름다운 동화처럼 평화롭고 자유로운 신혼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44㎡의 작은 공간 안에서 암묵적으로 정해진 각자의 집안일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고 널따란 대단지는 산책로나 자전거 트랙으로써 훌륭했으며 용인시에서 지어준 짐네이지엄 시설도 다른 어떤 곳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저녁 있는 삶은 낮 시간에 배우자가 탐색하여 찾아낸 예쁜 카페를 가거나 코스트코에서 못 보던 제품을 구입하기도 하고 한 발짝 나가기 싫을 때에는 Netflix 시청을 하거나 LOL 게임을 하며 보냈다.
LOL 이란 게임은 감히 인생의 축소판 내지는 조별 과제의 끝판왕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홀로 제아무리 훌륭한 기량을 펼쳐도 탈주해버리거나 고의 트롤링을 하는 팀원이 있는 한 승리할 수 없었고 반대로 내가 무임승차하다시피 팀에 기여를 하지 못해도 다른 팀원의 합이 맞으면 쉽게 승리를 거머쥐기도 했다. 주변에서 마주칠 법한 모든 유형의 빌런은 이곳에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내의 배려 덕분에 솔로 랭크 Iron 에서 Gold 티어 진입을 성공했다. 게임 결과마다 일희일비하고 인류애가 사라질 뻔한 숱한 고비를 넘기며 거머쥔 성취이자 인내의 결과물이라고 자부한다.
게임당 평균 20분에서 30분의 상대적으로 긴 러닝타임에 좋지 못한 자세로 얻은 근골격계 질환은 덤이었고 정신적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이후로는 발길을 끊고 실제의 삶에 집중하게 됐다. 가장 경제적이면서 편리한 취미생활임은 분명하지만 문득 유한한 인생을 상기시키면 매우 소모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아빠의 기일이 다가왔다. 간소하게 생전에 즐겨 드시던 시루떡을 준비하고 갈아 만든 배를 따르며 아빠를 추억하려 했는데 갑자기 백화점에서 가장 좋은 부위의 소고기부터 과일, 전 부침 거리를 사놨다며 돈을 입금해 달라는 엄마의 연락이 왔다. 나부터는 조율이시, 홍동백서의 허례허식을 근절하고자 했는데 본인의 삶도 허덕이면서 엄마의 저런 행동은 아무런 협의 없이 이뤄진 일방적인 통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작년의 장례식과 결혼식을 마치고 엄마가 보인 행태로 복받쳤던 설움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절연할 생각으로 아빠의 기일에 인천 집으로 가지 않을 테니 혼자 전을 부치든 술을 따르든 알아서 하라고 했다. 환갑도 되지 않은 나이(1960년생)에 사지도 멀쩡하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매번 궁핍함을 호소하고 가끔 연락이라도 오면 “짐네이지엄 연간 등록비 수십만 원만 빌려줄 수 있니?” 따위의 말만 오가니 휴대폰에 엄마의 부재중 전화나 카톡 메시지만 찍혀 있어도 한숨이 절로 나오고 뒷골이 땅겨왔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엄마는 다행히 병원 보조 업무를 시작으로 작게나마 노동 소득을 발생시키고 있었고 그 덕에 툭하면 맥주에 의존해 더 우울하게 보냈던 삶은 끊어낼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런 진일보한 모습에 여전히 엄마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지만 명절과 생신, 어버이날 정도는 꾹 참고 교류하고 있다.
내겐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연락이 딱 두 종류가 있고, 엄마나 동생에게 걸려오는 연락은 오늘날까지 절로 인상을 쓰게 만든다. 그 연락은 높은 확률로 비극적인 소식을 전하거나 금전적으로 곤궁함을 호소하는 것이 주된 내용으로 내가 사치와 향락에 젖어 배 두드리며 사는 것도 아닌데 그 무거운 시선들은 충동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나를 주저앉게 만든다. 그래도 동생은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발악을 하는데 형이랍시고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해 한스럽다.
어려서부터 동생은 매우 밝고 긍정적인 아이였다. 그 긍정의 정도가 지나쳐 시험 전 날에도 긴장감 하나 없이 방에서 체력단련을 하며 놀 뿐이었다. 공부에 전혀 취미가 없는 것치고는 중학교까지 반에서 약 15등을 유지하며 아주 엉망은 아니었는데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해서는 점차 최하위권으로 밀려난 듯했다. 아빠는 동생의 수능 성적을 보고는
“우리가 너무 신경을 안 썼네...”
하시며 개선 가능성이 극히 낮은 아이를 굳이 재수학원에 보내 화성시 구석에 위치한 전문 대학교로 비싼 등록금을 납부하도록 이끌었다. 그나마 성적이 나아 보이는 큰아들에게 부모님의 모든 관심을 몰아줬던 부작용인 셈인데 나는 그런 편중됨이 너무 부담스러웠고 동생도 늘 섭섭함을 느낀 부분이다.
먼 거리를 통학하느라 학업에도 불성실했고 간신히 졸업을 해서는 배운 전공을 살리지 못한 채 지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매니큐어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가족 같은 기업의 횡포에 창립멤버로서 톨루엔을 잔뜩 흡입해 가며 참여했던 동생은 얼마 못 가 일을 그만두었고 듣도 보도 못한 렌터카 회사에 취업을 해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지점장 밑에서 차량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 일 역시 부림을 당하는 정도에 비해 수입이 보잘것없어 고민하던 차에 둘째 큰아버지가 경찰을 퇴직하여 맡던 보안 업체에 이름을 올리고는 파주시 산하 전시관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 동생을 파주 원룸으로 보내며 아빠는 이례적으로 한참을 서럽게 목놓아 우셨다.
그 뒤로 동생은 늘 이력서에 한 줄 쓸 수 없는 일에만 동원되었다. 사촌 형(둘째 큰아버지 쪽)이 일산 라페스타에서 운영하는 수입과자점에서 박스를 나르고 POS를 두드렸으며 우리 집을 망하게 한 청주 신축 건물 지하 찜질방에서 수건을 개고 카운터를 보기도 했다. 둘째 큰아버지께서 종중 회장에 선출되며 야심 차게 신축한 종중 건물에 입점시킨 차돌박이 체인점에서 동생은 거의 모든 일을 점주처럼 맡았으나 주어진 권한은 전무했고 이렇다 할 자산 축적 없이 몇 년을 진천군에 매여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동생이 걸어온 길을 이용 내지는 착취로 보는데 그는 딱히 원망하거나 분노 섞인 마음은 없어 보인다.
그렇게 후리타(Freeter, フリーター)로 끌려다니기만 한 동생은 모아둔 돈도 없이 빚만 늘어 지금까지도 허덕이고 있다. 아빠가 돌아가실 적에 엄마는 개인회생 절차를 밟는 중이었고 나는 아빠의 대출금마저 떠안을 수는 없어 상속을 포기한 관계로 자연스레 아빠의 채무는 동생에게 전가됐다. 그는 인천 집에 머물며 자신 명의의 카드론까지 대응하느라 맹장이 터져도 명절이나 공휴일에도 야간 배달 일에 몸을 갈아 넣고 있다. 엄마라도 작게나마 도움이 되면 힘이 될 텐데 나나 동생 모두 그 부분에 대한 기대는 포기한 듯하다. 얘만 생각하면 내 위장부터 서서히 타들어가는 느낌에 쉽사리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방임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동생의 인생을 예로 들고 싶을 정도다.
그가 진천 차돌박이 체인점에서 일할 때만 해도 오래 교제한 연인이 있었다. 아빠의 장례식과 내 결혼식에도 참석한 처자인데 어린 나이에도 참하고 동생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내심 둘이 결혼하길 꿈꿨다. 안될 인연이었는지 그녀는 갑작스레 뇌종양을 앓게 됐고 몇 해 전 요절하고 말았다. 동생에겐 적잖은 충격이었을 텐데 외가댁 특유의 DNA를 갖춰서인지 아무런 표를 내지 않았다. 혼기를 훌쩍 넘긴 지금도 그저 자신에게 다가와 준 삼치(반려 길고양이) 집사 노릇을 하며 헛헛함을 달래는 듯하다.
심적으로 큰 힘이 되어준 노동조합 수뇌부에서 절대평가를 골자로 하는 회사의 신인사제도를 아무런 공감대 형성 없이 전격적으로 받아들였다. 노동조합 자문 변호사조차 이를 개악이라며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의까지 했는데 조합원의 고용안정과 권익 향상에 앞장서도 모자랄 집단에서 그런 결정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지난 박근혜 정부의 고용노동부는 노동시장 유연화의 일환으로 ‘쉬운 해고 가이드라인’을 정부 지침의 형식으로 발표했고 기업은 이에 맞춰 발 빠르게 인사제도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대한민국의 노동조합 결성률로 미루어보아 이미 상당수의 기업은 그와 결을 같이하는 제도를 정착시켜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쉬운 해고 가이드라인’은 성과·능력 중심의 인사평가 도입, 저성과자의 일반해고 요건을 취업규칙 등에 명문화할 것, 절대평가와 동료 피드백 등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 요소를 갖추는 것을 요건으로 두고 있다. 회사가 노동조합과 이런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은 신인사제도란 이름으로 절대평가와 동료 피드백을 도입해 ‘쉬운 해고 가이드라인’의 외형을 일부 갖춰놓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고 강하게 의심하고 있다.
개인의 성과대로 회사를 운영하자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에 대한 의문은 회사 바깥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많이 제기됐다. 정규 교육 과정 중 ‘노동’에 대한 과목은 전무했고 ‘노동’이란 단어만으로 입술처럼 새빨간 뢔드를 떠 올리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며 기업 회장과 닿는 인맥이 전무한 대부분의 우리네 서민들까지 모든 사안을 기업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이 익숙한 나라에서 제기될법한 질문이다. 하물며 광복 이후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유사 보수 내지는 보수 호소 조직의 카멜레온처럼 변화해 온 유구한 정당명이 거론되는 것조차 진저리를 치는 합리적 보수 혹은 진보를 자처하는 친구나 지인들마저 노동이나 노동권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기업의 입장에 선 이들이 압도적이다.
문제는 자신이 맡은 업무가 정량적으로 평가가 가능한 일인지, 자신이 소속된 직장에서 평가자의 진단이 얼마나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지는지 돌아보면 회사가 추구하려는 새로운 인사제도가 노동자의 워라밸과 고용 측면에서 명백히 후퇴시킨다는데 있다. 직장 생활하는 내내 이너서클에서 벗어나지 않고 평가자의 눈 밖에 나지 않을 확신이 있는 자 외에는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루저가 되는 시스템에 불과했다.
회사는 예로부터 직원의 고용의 안정을 해치는 노골적인 안건들을 노측에 숱하게 들이밀었다. 노동조합은 이에 대해 속아 넘어간 것이면 무능력한 것이고 알고 그런 것이면 부패한 것이니 어느 쪽이든 이번 결정이 나로선 무척 힘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너무 순진하게 노사관계를 단순화시켜 바라봤고 너무 순수하게 동지(同志)라는 이름 하에 모인 이들을 맹신한 것 같았다.
회사와 노동조합 둘 다 헐뜯으며 비관에 빠지긴 싫다. 보다 더 주체적으로 회사 생활을 하고 싶어서 조합원으로 남고자 책임연구원으로의 진급을 거부했고 좀 더 고용 측면에서 안정을 취하고자 노동조합이란 울타리를 선택한만큼 나보다 더 열정적이고 유능한 이들이 요직을 맡아 표리부동하지 않고 노동조합 본연의 역할을 해주길 바라마지않고 있다.
자랑스러운 나의 첫 집인 한숲시티는 매일 운전 한계 시간인 30분을 훌쩍 뛰어넘는 출퇴근 길로 인해 점점 한숨시티가 되어가고 있었다. 시속 110km/h에도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는 모습에 이대로면 내 배우자는 머지않아 과부가 될 것이라 여겼다. 이곳에서 신혼 생활은 행복했으나 고된 출퇴근 길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기 충분했다. 이런 고민을 알아챈 후배 D 연구원이 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형님, 화성시 봉담읍을 지나가다 보니 개편한 세상 아파트가 신축을 했던데 값이 싸요!”
귀가 코끼리만큼 커진 나는 그날로 인근 공인중개사를 찾았고 해당 아파트 단지를 두 채나 줍줍 하여 허덕이는 젊은 매도인을 만나 약 70㎡의 새집을 이억 일천육백만 원의 금액에 서명하고 말았다. 거주 중인 한숨 아니 한숲시티를 매물로 내놓았더니 머지않아 입질이 왔고 패를 안 보고 배팅하는 고니처럼 연세가 지긋한 매수인은 매물을 둘러보지도 않고 매매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쏘나타 한 대 정도 값을 양도소득으로 봤음에도 계약해 놓은 새집의 잔금 처리를 위해 보유한 현금까지 탈탈 털어봤으나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또 금융기관의 힘을 빌리고자 대출의 한도를 알아봤다. 그것은 투기 뭐시기 지역에 해당하고 방 빼기(방 공제)라는 시대착오적인 계산법을 적용하여 예상했던 금액보다 한참 낮았다. 지역을 제외하고 면적과 신축 단지라는 측면으로만 봤을 때 그리 비싼 금액은 아니었지만 나는 저금통의 동전까지 동원하여 정말 간신히 그 집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청소 업체를 쓸 여력도 없어 우리 부부는 시멘트 분진과 포름알데히드로 가득한 우리의 새 보금자리를 물티슈에 의존해 구석구석 닦기 시작했다.
코털에 미세한 석회 분진이 채 떨어지지 않고 남아있던 다음날,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오빠! 나 임신했어!”
어제 배우자를 유해 물질에 잔뜩 노출시킨 내가 너무나 후회스러웠지만 처음 느껴보는 묘한 감정들이 환희와 뒤섞여 소용돌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