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병신년

단절

by 김동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말 중 하나이다.


이인자 근성으로 가득 찬 학창 시절을 보냈고 아웃사이더의 길을 자처하며 걸어오던 내가 한 선거구의 노동자 대표가 돼보겠다며 나섰다. 지금과 같이 계속 살 수는 없어서 내린 불가피한 결정이었지만 앞으로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입사 이래로 거의 가 본 적 없는 현장의 처음 보는 기술직 사우들을 찾아다니며 이번에 출마하게 된 김 아무개라고 인사를 드렸다. 허언에 가깝더라도 당신들이 처한 지금의 노동환경을 어떻게 바꿔보겠다는 연설 같은 건 엄두도 못 냈다. 그렇게 멋쩍은 인사와 악수를 나누다 보니 고작 마흔 명도 되지 않은 현장 사우들을 만났을 뿐인데 잔뜩 긴장한 탓에 등줄기로 땀이 한가득 고였다. 역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다.


소속된 선거구에는 나 이외에도 다선의 대의원 경험이 있는 후보도 있어 그와 경선을 하게 되었고 운 좋게 더 많은 표를 얻어 당선의 영광을 누렸다. 때가 되면 조끼는 사이즈에 맞게 당선자에게 지급되지만 작년에 가입한 조직의 한 선배에게 미리 네이비색 노동조합 조끼를 받아 걸쳤다. 현수막과 같은 싸구려 재질에 주머니만 많아 모르는 이가 보면 퀵 배송을 온 것인가 할 테지만 그 어떤 갑옷보다 단단하게 나를 지켜줄 것처럼 느껴졌다.


집에 가서 아빠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부실한 치아로 어렵게 저녁 끼니를 삼키던 아빠는 그 말에 모든 행동을 멈춰 세우고 한동안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말씀하셨다.


“미친놈!”


평생을 회사원으로 살다가 임원으로 퇴임한 아빠가 쉬이 납득할 만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 예상했다. 차분하게 작년에 겪은 일들을 말했다. 인사고과에 대한 팀장 면담까지 언급했는데 아빠는 의외로


“그런 놈(팀장)은 확실히 죽여놔라.”


하며 더는 어떤 말씀도 없었다.


조끼 하나 걸쳤을 뿐인데 회사 안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바뀌어 갔다. 노사 간 상견례라는 타이틀로 센터장과 실장이 모인 자리에서 티타임을 갖기도 하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은 듯 매일같이 노무 담당 인력들이 찾아왔다. 작년에 D 연구원을 비롯하여 팀 서무까지 협박성으로 징계나 계약 해지를 운운한 사건에 대해 진상 파악부터 회사 측에 요청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팀장은 물론이고 파트장까지 자신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결국 S 연구원 혼자 그런 기특하고 참신한 발상을 하여 나와 D 연구원 그리고 서무에게까지 협박을 전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팀장이 이를 비롯해 야근 강요에 대한 공개 사과를 함으로써 일단락 지었지만 더 강한 조치를 요구하지 못한 게 후회됐다.


연구직군의 정시 퇴근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는 요구에도 실장은 연구원들을 ‘요즘 애들’로 지칭하면서도 흔쾌히 내 의견에 동의했지만 우리 팀장은 끝까지 연구직 간 퇴근시간으로라도 우열을 가리지 않으면 인사고과 부여하기가 어렵다며 반발했다. 참 근성과 신념 하나는 뛰어난 인재로 보인다.


내가 담당하는 선거구는 내가 속한 팀을 포함해 총 두 개 팀이었는데 이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로 그간 꼴 보기 싫던 팀장들과 회의하는 일도 잦아졌다. 평일 오후나 주말은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주관으로 진행되는 대외 집회까지 예정돼 있어 거의 갈 일이 없었던 광화문과 시청에 출몰하기도 했다. 이들이 내건 구호나 주장하는 바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임에도 그간 언론에는 왜 그렇게 폭력적이고 무식하며 대화가 통하지 않는 떼쟁이로 그려졌는지 의문스러웠다. 비정규직도 안전하게 일해 보자, 무분별한 쉬운 해고가 가능한 노동개악을 막자는 외침이 사회에 그렇게 해악을 끼칠 일인가 싶었다.


나의 의경 시절 이런 조끼를 입고 도로를 점령하여 집회를 벌이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이해되지 않고 혐오스럽기만 했는데 살다 보니 어느새 내가 그 조끼를 걸치고 방패를 든 경찰 앞에 서있으니 참 인생은 모를 일이라 여겨졌다.




방배동에서 일하는 고등 동창 L을 모처럼 강남역 인근에서 만나 저녁식사를 했다. 문득 도심 라이프를 살아보고 싶은 충동에 식사를 마치고 자취할 만한 방을 L과 함께 두세 군데 돌아봤다. 강남역 9번 출구에서 약 300m 떨어진 벨라체 오피스텔 11층 집이 1000에 60만 원이라길래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썼다. 부천 집에서 옷가지만 챙겨 원룸에 풀어놓고 L과 똑같은 스트라이다 자전거를 구입한 후 자주 한강 공원을 누볐다. 한강을 보고 친구와 잡담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도 꽤 괜찮았다.


한강을 즐기는 한량


부천 집의 소유자가 집을 매도한 관계로 이사할 새집을 알아봐야 했다. 아빠는 적당히 외지면서 부천과는 너무 동떨어지지는 않은 인천 장수동에 위치한 빌라를 1억 3천5백만 원에 계약을 하시곤 담보대출을 알아보셨다. 아빠의 신용도와 물건의 담보가치로는 9천만 원이 대출한도였던 것으로 보였고 나머지 금액은 자연스레 내가 부담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사 당일 아침엔 인천 집의 매수 금액도 아빠의 대출금액도 모른 채 엄마의 다그침에 이끌려 은행에 끌려다녔다.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지만 입사와 거의 동시에 엄마의 카드빚 때문에 발생시킨 신용대출 4천만 원은 즉시 상환하라며 아빠가 보내왔다.


그 대출을 말소시키자마자 다른 은행으로 가서 내 명의의 대출 9천만 원을 다시 발생시켰다. 위험한 말 같은데 뭐라고 쓰여있는지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한 채 은행원이 형광펜으로 그어놓은 위치마다 수십 회 서명을 하고 인적 사항과 주소를 수차례 반복해서 기입하였다. 은행 창구에 플라스틱 용수철로 고정된 볼펜의 장력 때문인지 여러 번 주소와 개인정보를 쓰다 보니 손아귀가 아려왔다. 묶여있던 그 볼펜을 보고 있노라면 또 한평생 은행에 저당 잡힐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측은해졌다. 은행 측이 인지세와 채권 할인을 언급하며 수십만 원을 내라는데 이 역시 내 몫이었다. 이 때문에 아침부터 심통이 도지고 감당할 수 없는 뭔가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엄마는 또 이렇게 얘기할 뿐이었다.


새로 이사할 인천집에 가봤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이라는 점이 흠이었지만 비교적 깔끔한 건물에 채광이 나쁘지 않아 마음이 놓이는 한편 아침부터 언짢은 기분을 은근히 드러내려는 듯 아무런 말없이 빈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내 PC만 차에 옮겨두었다. 빌라의 필로티 주차장 구석에서 아빠와 공인중개사 그리고 매도인 간 계약서에 서명하는 모습까지 보곤 불필요하게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삿날로 나쁘지 않은 날이었던지 유난히 해가 들이치고 있었고 그 햇살만큼 잔금을 치르던 아빠의 흐뭇한 미소가 유독 밝아 보였다.


이사를 앞두곤 아빠와 엄마는 부쩍 사이가 좋아졌다고 했다. 함께 살 집을 고르고 새 집에 들일 가구도 보러 다니며 전과 다르게 웃는 날이 많았다. 한적한 새 동네로 가면 아빠가 이장 선거에도 나가 인접한 군부대 이동도 건의해 보겠다는 포부를 엄마에게 밝히기도 했다. 이삿짐센터에서 큰 짐은 대부분 옮겼지만 폭이 협소한 발코니에 들인 책장에 넣어둘 살림살이 정리 까지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 하여 그 일은 고스란히 집주인의 몫이 되었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꽃게 걸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 발코니 책장에 아빠는 빛바랜 책들을 한 권 한 권 옮기고 있었고 그냥 버려도 괜찮았을 내 가구들까지 굳이 정성스레 싸와서 이건 본인 돈으로 꼭 내 자취방에 보내줘야 한다며 비싼 퀵 배송으로 그 중량물들을 보내왔다.


인천 집이 어떻게 정리되건 알 바 없다는 듯 자취방으로 돌아와서 현충일이 낀 짧은 연휴를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보낼까 궁리만 하던 후레자식에게 아빠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작년에 내가 KINTEX에서 구입해 온 연수기능이 있는 샤워기 헤드의 구성품이 보이지 않는다며 그 행방을 묻는 말에 온갖 짜증은 다 내고 끊었다. 그렇게 아빠와의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속 편하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엄마의 부재중 전화 알림이 떠 있었다. 불쾌함을 꾹 누르고 연락한 엄마는 울먹이며 아빠가 쓰러진 것 같다며 급하게 응급실 위치만 알려줬다.


인천 길병원으로 향하던 길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스치면서도 ‘괜찮을 거야. 잠깐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랬겠지’ 하며 스스로 다독였다. 응급실에 도착해서 만난 아빠는 그냥 편히 낮잠을 자고 있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늘 집에서 입는 편한 셔츠에 즐겨 입는 진녹색 계열의 체크무늬 반바지까지 모든 것이 그대론데 아무리 말을 걸어봐도 흔들어 봐도 반응이 없었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복받쳐 한참을 응급실 침대 옆에서 눈물을 쏟았다.


아빠는 당일 목에 구멍을 뚫어 기도 삽관을 한 채 하루 두 번 정해진 시간에 20분간 면회가 가능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꼬박꼬박 면회를 가며 엄마는 깨끗하게 삶은 수건으로 아빠를 닦아주었고 나는 평소에 잡지 않던 아빠의 손을 잡고 뭐라도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려 애썼다. 담당 교수님은 예후가 몹시 좋지 않은 ‘뇌간 출혈’이라며 외과적인 수술로 문제 되는 부위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멀쩡한 뇌조직까지 훼손하는 것이 불가피해 수술이 의미가 없다고 전했다. 기적적으로 의식이 돌아와도 말이 어눌하거나 사지를 씀에 있어 장애가 발생할 것이라는 말에 속이 타들어갔다.


부자의 손


면회를 왔던 둘째 큰아버지나 삼촌들은 이미 끝났다며 호흡기를 떼자는 말씀들을 하셨지만 아들 입장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누워서 자고 있는 아빠를 하루아침에 화장터로 보내자는 말이 닿지 않았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어렵게 염리동의 신점집도 찾았다. 용한 집이라며 대기가 일 년가량 밀려있는 곳이었는데 매일같이 문자를 넣었더니 빈 시간이 생겼다며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와 보라고 했다. 중년의 남성이 방에 앉아 내 이야기를 들었고 아빠의 병명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뇌출혈이라고 꼭 짚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는 좋지 않은 터로 이사를 했다는 말과 함께 평소 가족만 생각하며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며 아빠를 평하고는 저승사자를 속여 관에서 일으켜 세우는 주술을 할 테니 내게는 자신이 말하는 대로 따라주면 몸이 불편하기는 하나 정신이 들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표주박을 구해 소원을 적고 깨뜨린 다음 다시 꿰매라고 했고 아빠의 머리카락을 아빠가 즐겨 입던 옷에 담아 한강 같은 곳에 띄우라고도 했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빠가 눈을 떴다는 소식을 엄마가 호들갑스레 전했다. 말을 하거나 움직이는 것은 아니어도 옆에서 말하는 것들을 알아듣는 눈치였다. 며칠 뒤에는 묻는 말에 간헐적인 끄덕임을 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된 듯했다.


지푸라기의 흔적


중환자실에서 퇴원하라는 말에 인근 요양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환자실 입원비가 그렇게 비쌀 줄은 전혀 몰랐다. 아빠 명의로 가입된 보험은 전혀 없었고 집 매매대금에 보태진 내 대출금 중 잔여 4천5백만 원은 새로운 살림살이를 장만하는데 쓰인 것 같다. 엄마는 감당하지 못할 카드에 또 손을 댔고 그렇게 병원비와 생계를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였다. 쌓여가는 우편함 속 카드사의 독촉 메일을 보며 안 되겠다는 생각에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구였던 C의 법무법인에 개인 파산신청을 했다. 격렬한 반대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다.


아빠의 재산이나 채무도 파악해야 했기에 법원을 들락거리며 성년후견인 신청도 하게 됐다. 그곳에 첨부할 재산 목록 확인 차 아빠 명의의 계좌를 모두 확인했는데 합산을 해봐도 이십만 원에 미치지 못했다. 힘겹게 살아왔을 아빠 모습에 가슴속 무언가가 솟구쳤지만 꾹 눌러 참았다.


계속 휴가를 쓸 수는 없어서 어렵게 출근길에 올랐다. 나이가 지긋한 한 기술직 사우는 내게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요는 자신은 기술직이지만 맡은 업무가 단순 부품 납촉업무이다 보니 주말 휴일 특근에서 제외됐다며 이를 해결해 달라는 요구였다. 한 번만 보내와도 알아들을 것을 꼭 MMS로 네댓 번을 구구절절 보내왔다. 특근비를 벌지 못해 본인 생계에 지대한 영향이 있다며 병원은 물론이고 파산신청과 성년후견인으로 법원을 들락거리는 내게 쪼아대듯 말했다. 나만 무거운 짐에 짓눌려 옴짝달싹 할 뿐이지 세상은 다름없이 평온하게 돌아가는 듯하여 야속하게 느껴졌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청춘사업이 완전히 폐업 상태는 아니었기에 연이 닿은 소저를 마다하지 않았다. 6·25 동란 때에도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상황과 같이 다소 의외의 상황이랄까. 아무리 큰 슬픔과 고난이 괴롭혀도 사람인 이상 물도 마시고 밥도 먹어야 한다. 새롭게 만난 그녀는 다섯 살 아래 소띠이고 대학원 석사과정도 병행하는 병설유치원 교사이다. 아빠가 온전했을 때에는 나더러 무조건 공무원 공무원 공무원을 꼭 만나거라! 하셨는데 그런 공무원을 만나게 됐다.


그녀는 조금은 차가우면서 도도한 태도로 첫 만남을 가졌는데 나를 짓누르고 있는 짐이 고통스러웠는지 아빠의 상황을 얘기해버리고 말았다.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면 빠른 계산으로 이쯤에서 손절을 쳐도 괜한 미련을 두지 않을 수 있어서 괜찮겠다는 속내도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녀는 그럼에도 두 번째 만남을 가졌고 그녀의 아픈 부분도 숨김없이 드러냈다. 생각지도 못한 암세포의 발견으로 병상에 있다가 나온 경험과 회복 불가능한 간염으로 임신을 하려면 매일 복용하는 간염약을 포기해야 한다는 아픈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뭔가 불안하면서도 열정적인 만남을 가졌다.


평일 퇴근 후에도 강남역에서 건대입구역까지 청담대교를 두 번씩 건넜고 짧은 휴가기간 동안에는 그녀의 고향인 제주도 곳곳을 다녔다. 그녀와 만날 때면 현재 겪고 있는 모든 불행함을 잊는 듯했다. 나는 운전하는 것을 조금 많이 싫어하는 편인데 처음으로 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처자를 만나 좀 더 편히 행복감을 누렸다.


주말 아빠가 계신 요양병원으로 면회를 갈 적에도 이 기쁜 소식을 귀에 속삭였더니 반기는 표정을 짓는 듯했다. 아빠는 약간의 고갯짓과 극히 일부지만 손동작을 할 정도로 절망적인 예후에 비해 회복 측면에 있어 엄청난 진전을 보였다. 자가호흡과 엄마와 가위·바위·보를 시도할 정도였으니 재활치료를 잘 받으면 더 희망적인 상황을 기대해 봄직했다. 이때만큼은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겨 크게 돕는 줄로만 알았다.


하루는 요양병원에서 아빠의 소변줄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고 했다. 엄마의 말로는 초짜 의사가 실수를 한 것 같다고 했는데 의학지식이 전무하고 명확한 증거가 없는 환자 가족 입장에서 그와 같은 심증만으로 병원 측 과실을 입증할 방법 같은 건 전혀 없다. 그 실수로 인하여 염증수치가 가파르게 높아졌고 아빠의 움직임이나 반응은 급격하게 감소했다. 다시 3차 병원 중환자실로 가야 할 수도 있는 기로에 놓였던 토요일 밤에 그녀의 차를 타고 아빠가 계신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사당역쯤 지나다가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을 조금 이탈하는 바람에 언쟁이 벌어졌고 그녀는 그로 인해 내내 심기가 불편한 채 병원에 도착했다. 마음이 풀리지 않은 그녀는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며 주차장에서 기다릴 테니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아빠의 상태가 위중하다고 여겨 그녀의 마음을 달랠 생각을 못하고 그렇게 바로 올라가 버렸더니 5분도 안돼 먼저 갈 테니 볼 일 보고 알아서 오라는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하늘이 날 또 시험에 들게 하려는 것인지 왜 꼭 이런 순간에 그녀는 이러는 것일까 원망하며 내 가방과 지갑은 돌려줘야 나도 강남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녀는 다시 차를 돌려 병원 앞 1층에 잠시 서 있을 테니 차에 둔 가방을 가지고 가라고 했다. 머리끝까지 노여움으로 가득 찬 나는 그녀의 미니쿠퍼에서 가방을 빼며 아주 못나고 모질게 반응을 했다.


블랙핑크 제니가 말했듯 바람처럼 스쳐가는 흔한 인연이 아니길 바랐는데 그렇게 우린 짧고 뜨거웠던 만남을 끝을 냈다. 내가 조금만 어른스러웠다면 조금만 여유를 가졌더라면 그날 아무 일 없이 면회를 다녀오지 않았을까 싶지만 후회를 할 때는 항상 모든 것은 끝이 난 이후였다. 부디 건강하고 행복한 길만 그녀 앞에 놓이길 바랐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그간 전혀 관심 없었던 뉴스의 정치면도 보게 되고 정당별로 노동자를 보는 시선과 그에 따른 정책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여유시간이 날 때마다 유튭에서 우연히 접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을 정주행 하다시피 했다. 내가 1945년 이후 현대사를 너무 모른 채 바보같이 살아왔다는 부채감 비슷한 것이 들었다. 이 즈음부터 소위 레거시 언론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떠들어 대는 뉴스는 거의 듣지 않게 됐다.


그리고 광장으로 나가 남들처럼 촛불을 들어보았다.


시청 앞 촛불시위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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