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노동
파트 후배 D 연구원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설 연휴를 마친 첫 출근에서 팀장은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본인은 이사대우로 진급하여 자리를 옮겼고, 우리 파트장이 새 팀장으로, 그 밑에서 일하던 책임연구원은 새 파트장 자리로 오게 됐다는 사실을 전했다. 또한 내가 소속된 팀은 각각 부품개발과 조립을 전담하는 팀으로 나뉘게 됐다. 나는 여전히 부품개발을 맡은 조직에 속하게 됐는데, 새 팀장은 팀이 나뉘며 연구직 인력도 나뉜 상황에 대규모 인원 충원 없이 팀내 관리 파트를 따로 신설하여 그렇지 않아도 부족했던 부품개발인원을 그 파트로 유입시켰다.
기존 팀에서는 연간 진행될 프로젝트를 두 개발 파트에서 분담했는데 새 팀에서는 그런 구분 없이 개발 담당자 개개인이 모든 프로젝트를 맡게 됐다. 대신 담당하는 아이템 수는 소폭 줄긴 했지만 모든 프로젝트를 문제없이 조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밀어닥치는 일을 쳐내기도 버거운데 전임자들이 처리하지 않은 일까지 매듭을 지어야 했다. 2014년 6월 기준으로 개발담당자 개인당 71개 프로젝트를 맡았으니 얼마나 격무에 시달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나도 모르게 목이 꺾여 잠에 드는 경우도 있었는데 “김 대리, 밤에 대리 운전해?” 하는 이야기도 듣곤 했다.
메세나폴리스 롯데시네마에서 겨울왕국을 흥미롭게 관람했던 주말이 지나자마자 야망 터지는 새 팀장은 팀원들에게 새로운 업무를 주문했다. 양산 공장에서 불거져 나오는 문제를 사전에 대응하자는 취지에서 ‘문제점 발췌와 대응 방안 수립’ 위주의 일을 추가했고 그에 따라 팀원들이 거의 가볼 일이 없었던 공장 출장도 가게 됐다. 조직 변경 전 부품 개발을 담당했던 많은 연구원들로부터 새 팀장에게 양분이 될만한 보고 자료를 모조리 빨아낼 심산으로 관리 파트 인원을 선별해 간 것도 모자라 남은 개발 파트 인원들에게 공장 ‘양산성 사전검증’ 성격의 짐까지 지우니 조직은 점점 대화 없이 침체되고 각박하게만 돌아갔다.
퇴근하는 셔틀버스에서는 기절해서 잠들기 바빴고 집에 와서도 좋아하는 LOL게임을 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아서 남들의 플레이를 보다가 잠드는 것이 퇴근 후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힘없이 누워 TV 방송을 배경음악 삼아 게임을 관전하고 있는데 세월호 사고 소식이 전해졌다. 화면에 송출된 세월호의 모습은 옆으로 심하게 기울어 금방이라도 해수면 밑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은 위급한 상황에 놓였다. 저렇게 큰 선박이 저런 상태인데 왜 구명보트는 다가가지 않고 안에 있는 승객들은 즉각 바다로 뛰어들지 않는 것인지 의아했지만 전문가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하고 TV를 껐다.
다시 TV를 봤을 땐 배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 밑으로 가라앉았고 선수 부분 일부만 침몰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듯 바다 위로 힘겹게 솟아 있었다. 절망적이었다. 탑승객의 대부분이 학생이라고 들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 내가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언론에서는 에어포켓을 운운하며 생존 가능성을 언급했고 제발 그들이 가능성을 제기하는 대로 살아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이 위태로울 적에 방관할 수 있고 오래도록 실체적 진실 규명조차 못 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세상에 믿을 것 하나 없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봤다.
그렇지 않아도 아무런 말없이 각자의 일만 하던 사무실은 더 침울해졌다. 팀에서는 나에게도 새로움을 요구했고 그 새로움은 내가 창작해 낸 그 무엇이 아니라 타 부문이나 협력사에서 이미 지득한 정보를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어내 짜깁기한 보고서에 불과했다. 보이기 위한 보고서일수록 작업 진척이 몹시 더뎠다. 보고서 작성을 요청한 책임연구원은 지속적으로 디테일한 내용추가와 수정을 요구했고 잊을만하면 내 전화를 받아 들었던 한 설계자는 왜 이런 내용을 자신에게 묻냐며 꽤 진저리를 쳤다.
주변의 모든 것이 다 고되고 권태롭기만 했다. 군부대의 쌓이는 눈처럼 아무리 쳐내도 새로운 미션은 메일함에 쌓여갔지만 8시간 동안 쉼 없이 일하고 미련 없이 정시퇴근을 고집했다.
5월의 어느 날 출근을 했는데 매일 보였던 팀장 자리는 비어있었고 8시 아침 체조가 끝남과 동시에 급하게 전체 팀 회의가 소집됐다. 파트장은 어렵게 입을 떼며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J 책임연구원이... 오늘... 잘못됐다.”
라는 말을 전했다. 일부는 침통했고 일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일부는 울기 시작했다. J 책임연구원은 사무실 책상 위치로 봤을 때 나와 대각 방향으로 앉아서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셀 안에서 일을 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꿈과 같이 믿기지 않았다. 그 누구도 J 책임연구원 사건의 전말을 정확하게 알고 공유해주지는 않았지만 대규모 조직개편 이후에 격무에 시달린 결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 들었다. 팀에서는 애도할 틈도 없었을 텐데 고인이 안치된 병원에서 머무를 5인 1조 당직 조를 편성해 ppt 표로 공지했다.
장례식에서 마주한 고인의 배우자는 제대로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상태였고 차마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센터장을 비롯한 보직자들도 떼 지어 빈소를 찾아 유족들을 위로하며 고인의 죽음이 욕되지 않도록 산재신청에 필요한 자료 대응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팀원 모두가 빈소로 조문하거나 발인 자리에 함께 하느라 사무실을 비웠다. 꽤 오랜 시간 빈소에 머문 것으로 보이는 팀장은 일말의 자책도 애도도 않는 양 술에 취해 실언을 일삼았다. 49제를 치르던 향내음이 가득한 절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뛰어놀던 고인의 다섯 살배기 자녀들까지 마주하게 됐는데 그 모습에 절로 목이 메어왔고 이들의 앞날을 생각하자니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미어졌다.
이후 우리 선거구를 담당하는 대의원들은 비조합원인 책임연구원의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했지만 남은 연구원 조합원들의 트라우마와 스트레스 관리 차원으로 간담회를 실시했고 즉각적으로 조치할 것들이나 업무적으로 개선할 거리들을 취합하여 회사 측에 요구했다. 팀 단위로 외부 심리치료 과정도 병행됐다. 하루빨리 회사 내에서 기능적으로 문제없이 조직이 운영된다는 보고를 올리지 못해 안달 나 보이는 노무인력들은 매일같이 이곳의 동태를 살폈다.
비록 팀원들이 요구했던 책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팀장 이상 보직자 교체 요구도 졸속으로 협의됐지만 연구원 조합원과는 거리감이 있었던 노동조합이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힘없는 가장의 죽음에 대자보를 게시함으로써 함께 분노하는 그들을 보고 노조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은밀하게 행해졌던 보직자들의 부당노동행위 때문도 있지만 많이 관심 없었던 노동조합 행사에도 귀를 기울이고 참여하게 됐다. 매년 노·사 대표 간 진행되는 임금·단체교섭을 앞두고 노측의 선전을 응원하자는 취지로 진행된 출정식은 주로 기술직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행사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그해 출정식엔 팀에 소속된 연구원들까지 더운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원 참석했다.
유족 앞에서 적극 협조하겠다던 센터장의 말과 회사의 태도는 일치하지 않았다. 회사는 고인의 PC를 봉인하고 유족들의 면회를 거부했으며 죽음의 원인이 회사가 아닌 가족문제로 몰아가거나 개인의 약한 멘탈 때문이라는 소문을 흘렸다.
산재 관련 서류를 준비하던 유족들은 이미 확보한 팀원들의 진술서 외에 파트장 이상 보직자들의 진술서도 요구했으나 한참 지나서야 회사 방침상 보직자 진술서는 작성 불가하다는 답을 해줄 뿐이었다. 그렇게 외롭고 지난한 싸움을 펼치던 유족은 몇 년 후 가까스로 산재 승인을 받게 됐다.
나는 매일같이 야근을 일삼고 헌신적으로 일 했던 직원을 대하는 일면을 보고 더욱 회사와 나, 나와 일의 관계에 대해 돌아봤다. 소신 있는 정시퇴근주의자를 모난 돌 정도로 바라봤던 일부 팀원들까지 함께 17시 정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회사 측 모니터링은 더 촘촘해져 왔고 J 책임연구원의 죽음에 분개하며 일선에서 유족을 돕거나 대의원들과 소통했던 선배 연구원들도 하나 둘 회유돼 예전처럼 묵묵히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게 됐다. 불합리하다고 지적됐던 업무들도 수십 년간의 관성에 항복하듯 제자리를 찾아갔다.
함께 슬픔에 잠겼던 사람들도 언제 비극이 있었냐는 듯 일상으로 복귀해 부조리와 불합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처럼 보였다. 이 시기 즈음 소통이 거의 없던 후배 D 연구원이 사내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선배님. 시간 괜찮으시면 사내 카페에서 차 한 잔 할까요?”
이렇게 D와 답도 나오지 않는 팀의 부조리에 분개하며 회사 생활을 버텨낸 것 같다. 팀 선배 연구원인 S가 나를 너무 나쁜 사람처럼 묘사해서 그간 나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는 놀라운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소신 있는 정시퇴근주의자 뒤통수를 보고 저렇게 회사 생활을 하지 말랐다나... 꽤 호의적인 관계로 알았던 이의 전혀 다른 면모를 듣곤 이곳에도 믿을 이들이 없다 여겨졌다.
연애 중인 그녀와는 역시 홍대 앞을 주 무대로 LOL 게임을 비롯해 무척이나 소모적인 시간을 보내며 회사에서 받은 부정적인 것들을 털어내려 노력했다. 7말 8초 극 성수기에만 주어지는 여름휴가 때에는 미리 뭘 알아보고 예약할 여력도 없어 그녀의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예로부터 대구의 더위는 유명해서 그 정도를 체험해 보고픈 마음도 일부 있었다. 학창 시절처럼 밖에서 주야장천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간간이 앞산과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2.28 기념 중앙공원을 가까이 둔 동성로 정도만 걷다가 동아백화점이나 대구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며 에어컨 바람을 쐤다. 방문할수록 민족의 얼이 곳곳에 스며든 도시로 느껴졌다. 판매자와 소비자로만 만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부산과는 같은 듯 다른 그곳 억양이 무척 따뜻하고 친절하게 다가왔다.
어릴 적과는 달리 봉지 과자류를 즐겨 먹는 타입은 아닌데 교제하던 그녀로부터 노오란 허니버터칩이 보이면 무조건 사 두라는 당부를 받은 시기가 있었다. 홍대입구역 근방의 편의점은 물론이고 대형 마트에도 그 과자를 구경할 수가 없고 아예 출입문에다가 재고가 없음을 크게 써 붙인 곳도 보였다. 오히려 그녀의 반지하 방과 가장 가까웠던 GS25 편의점에서 인당 두 봉지까지 구매 가능하다는 안내를 받고 어렵사리 유명세를 치른 그 맛을 볼 수 있었다. 봉지 과자가 어느새 이토록 비싸졌는지 깜짝 놀랐다. 단짠단짠 불량한 듯 자극적인 맛을 선보이던 그 과자는 걸핏하면 부스러기가 입천장을 찌르거나 헐게 해 내겐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는데 그 인기는 해가 거듭되어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5월의 사고 이후 팀은 다시 종전과 같은 두 개의 파트 체제로 원복 되었고 각 파트에서는 업무와 그리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약간의 포상성격을 띤 해외출장 기회를 특정인에 치우치지 않게 순번을 정해 관리해 왔는데 이번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 박람회 출장은 내게 기회가 주어졌고 옆 파트에서는 고교·대학 동창인 N 연구원에게 순서가 왔다. 생애 첫 구라파 땅에 발을 들이게 돼 기대와 설렘 한가득 품고 비행길에 올랐다.
열다섯 시간 가까이 좁은 이코노미석에 앉았더니 혈행이 원만하지 않아 다리는 붓는 것 같이 불편했고 내내 구겨져있던 소화기관은 더부룩함을 전혀 해소해내지 못했다. 《The Last Emperor》와 같은 긴 영화를 몇 편이나 봤는데도 비행기는 도착할 줄을 몰랐다. 두 번은 못 다니겠다는 생각을 할 때 즈음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공항에 도착했고 앞서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구입한 화장품이 위험물이라도 되는 양 시비를 거는 공항 직원으로부터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곳 지하철 승강장은 매우 어둡고 사람이나 쥐의 소변으로 인한 지린내가 풍겼으며 키가 큰 독일인으로 가득했다. 열차에서 내 옆에 서 계시던 할머니 두 분은 키가 180cm는 족히 넘어 보였다. 예약한 숙소는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근처였는데 서울역보다도 두 배쯤 커 보이는 역사를 빠져나오니 흡연자들이 독한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곳곳에 담배꽁초가 버려져 있었다. 쓰레기 하나 없이 환경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폐기물 재활용이나 분리배출에 진심이었던 그런 유럽 국가는 아닌 듯했다.
역에서 숙소까지 가는 길은 그리 깊은 밤은 아니었음에도 우리나라의 편의점과 같이 불을 밝히고 있는 상점은 매우 드물었다. 트윈 베드룸에 짐을 풀고 끼니를 해결할만한 식당을 찾다 보니 다시 중앙역 근처까지 다가가 영업 중인 식당(호프집 느낌)에 출입하게 됐다. 손가락을 이용한 보디랭귀지로 메뉴를 선정했더니 돈까스와 같은 치킨 튀김 한 덩어리와 절여진 양배추 그리고 감자튀김이 한 접시에 담겨 나왔다. 이곳의 모든 음식은 튀겼느냐 삶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매번 감자가 기본으로 등장했고 매우 짜고 기름진 식단이 주를 이루다 보니 우리나라 음식이 그리워져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둘 다 활동적인 편은 아니어서 평일 일과시간 이후에는 주로 몰을 돌아다니며 아이쇼핑을 즐겼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팀에서 꽤 유행하다가 저물어가는 Crash of Clan 게임을 하다 잠들곤 했다. 모처럼 쉬는 날엔 N 연구원이 팀에서 빌려온 여행 책자를 뒤져 가볼 만한 곳을 찾아냈다. 심한 길치였던 N은 이동거리를 고려하지 못했는지 그가 선택한 하이델베르그에 도착했을 땐 이미 어둠으로 뒤덮였고 케이블카에 탑승했을 땐 깜깜한 하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꽤 춥고 고됐던 짧은 여행이었지만 일찌감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클래식한 상점들이 즐비했던 골목을 지나며 어린 시절 반짝이는 트리 앞에서 케잌을 자르던 추억을 살짝 떠올려 봤다.
인종차별의 한 형태인지는 모르겠으나 길을 걷던 나와 N 연구원 등에 몰래 찐득한 액체세제를 뿌려둔 이도 있어 공중화장실에서 한참 닦아내 봐도 사라지지 않는 거품을 지우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그래도 오랜 건축유산들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차보다는 사람이 걷기 편한 환경을 갖춘 좋은 면면들이 더 많은 기억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구라파의 선진 문물을 보고 선진 사회의 삶을 맛본 소신 있는 정시퇴근주의자는 삽시간에 구라파 마인드를 장착하여 한국으로 귀국했다.